상, 하반기로 나누어 참도깨비도서관에서 매주 목요일 저녁 7시에 했던 시집 읽기 모임 <어쩌다 시에 꽂혀서>에 참여한 정규원 시인의 첫 시집이다. 정규원 시인은 대청호가 내려다보이는 문의 옥새봉 농장에서 구절초 농사를 짓는 지구 농부다. 우리가 흔히 미화하기 쉬운 시인이 아니라 '호미 쥐고 밭에 나가'는 농부이자 '분노와 두려움이 심장계통의 치수(治水)로 다스려지는 것이라면/ 흘러가는 곳곳을 터주고 발라준 것과 장마전선의 한가운데서 두 팔을 벌린 당신을 칭찬해야 마땅'(<장마의 심장>)한 지구의 심장을 설계하는 엔지니어이자 '사랑과 투쟁의 깃발, 펄럭임 소리, 진화의 벼랑에 선 존재들'(<기러기 엔진>)을 노래하는 시인이다.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자 단가短歌 한 자락을 구성지게 부를 줄 아는 지구 농부여서 오히려 시가 그의 가슴에 들어와 잘 놀다 가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했던 삶을 구절초 농장 절터에 묻고 두루봉 동굴(‘흥수 아이’ 유적으로 알려진)의 용을 기다리는 천진한 청년이자 농부로 다시 사는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느 폭포에서 떨어져 하얗게 부서진/나를 만나고/빗물에 쓸려온 벌건 흙탕물 나와 만나/말없이 비릿한 몸을 누이고 밤길을 가는 강이다.”(<나의 길은 강이다> 부분)처럼 뼈를 맞춰 길을 만든 시로 시작하지만, “이 땅이 뉘 땅인지/한 번 붙어보자 퉤퉤/똥을 눠도 내가 더 많이 눴다 이놈아”(<멧돼지> 부분)하고 발을 구를 듯한 시는 흥미롭다. 구절초 농장이 있는 산벚나무 숲에서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 엔진을 만들어낸 것은 진지하고 결연하기도 한 시인이자 농부의 자세이면서 시대의 아픔에 연대할 줄 아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통증과 연결과 자유에너지와 여행의 함수관계는 기러기 엔진의 다이나믹한 성능을 보장하고 사랑과 투쟁의 깃발, 펄럭임 소리, 진화의 벼랑에 선 존재들, 심장에서 날개의 움이 트려고 하늘은 새파랗다.(<기러기 엔진의 구조> 부분)
그러니 시인이라는 환상을 걷어내고 그가 직접 농사지어 찌고 말려 내놓은 ‘구절초 차’를 마시며 지구 농부의 땅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시가 삶과 따로여서 뻔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 넘겨짚지 말고 시집 한 권 사서 기꺼이 그가 일군 땅의 시학으로 육박해 들어가보면 어느새 ‘기러기 엔진’의 구조로 창공에 올라서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성춘희 시인의 첫 시집 <봄볕 거래서>도 시집 읽기 모임에 참여하고 난 뒤에 묶었다. 음성 소이 말로 지은 밥상이나 다름 없다. 우리가 어렴풋이 안다고 생각했던 충청도 말 깊숙이 들어가 ‘낭중에 쓸 데가 있을 거이니 암 말뚜 말구 받아 둬 수툴리믄 팔아뻔지든가 묵히’(<따비밭-소이 5>면 묵정밭이 될 수밖에 없는 말과 음식, 꽃과 집 이야기다. 시에서 화자는 시인의 아버지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음성 소이라는 옛 공간에서 살았던 화수분 같이 흘러나오던 이야기다. ‘아버지의 소이 말’에 나타난 삶의 근간이 보이는 시편들이 다른 충청도 말을 근간으로 한 육근상 시인의 『여우』(솔)이나 이정록 시인의 홍성 말, 남덕현 시인의 산문집 『충청도의 힘』에 서 확인한 살뜰한 말들과 연대를 하는 듯하다.
구술하는 아버지의 얼굴빛이나 목소리 톤, 손짓까지 보이는 듯하다. 햇볕에 내놓은 반찬거리가 그냥 말르는 것도 아니고 ‘삐들삐들’ 말리니 내륙의 간고등어나 말린 생선처럼 밥상을 일으키는 맛마저 그대로 느껴져서 사투리라는 낯선 말에서 친근함을 느끼게 된다. 소이의 말과 음식, 꽃들은 시인이 다시 돌아가 눕고 싶은 ‘아흔아홉 창문이 있는 돌배나무집’이기도 하다.
대문 밀고 들어서면 횟독으로 만든 화단 우물 위로 돌배나무
옆댕이 사발꽃 오야나무 쪼꼬만해도 맛은 있었어
자러서 그리치 달리긴 음청 달려 동네 아덜 다 먹고도 남었어
장꽝 옆 굴뚝모팅이 부추꽃 복궁딩이 살구 자두 복숭아 맛이 좋았어
살구낭구에 달이 걸려봐 마당이 훤하지 토광옆 외양간 지붕에 박꽃은 어떻고
대추낭구도 메나리꽝 위에 싱그구 막골 유가네 모과 낭구 갔다가 울타리 가세다 몇 개 싱궜지 과일 낭구구 뭐고 터만 있으면 심어 놓능겨 꽂아만 놔봐 다 달리지
유다락만 해도 문이 몇 개여 살구낭구 쪽 그 짝에서 해가 뜨거든 안마당 바깥마당 삼지 사방으로 창을 냈어
부엌으로 댕기는 문 부엌에서 안방으로 반찬 그릇 드나드는 쪽문 아랫방 웃방 미닫이 안방 옆으로 미닫이 마루 문만 해도 열 개는 될 걸
후미리에서 젤 낳게 졌다 혔어 넘들은 아흔 아홉칸 방도 짓고 사는데 창문이라도 내야것다 한 겨 내가 지니까 내 맘대로 한 겨
성춘희, <아흔아홉 창문집> 전문
아름다운 창조자였던 아버지를 둔 시인은 아흔아홉 창문을 낸 집에서 시를 발견한 것이다. . 쪼꼬만해도 맛있기만 한 돌배가 달리는 집의 나무와 꽃들의 배치가 이룬 자리에 그려지는 상상의 그림만으로도 환하다. ‘살구나무에 달이 결려봐 마당이 훤’한 곳이기에 그것들에 감응하고 교감하기 위한 통풍까지 고려한 집이어서 자신의 시가 가난했지만 그런 호사를 누리고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억의 공간이어서 아름답다. 시인과 함께 아흔아홉 집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시 읽기가 즐거워지고 따뜻해질 것이다.
두 시집은 상, 하반기 동안 시집 읽기와 함께 자신의 시를 함께 나누고 합평하면서 시집 만들기 프로젝트를 거쳐 만든 결과물이기에 더욱 뜻깊다.
작은도서관이 살아남는 길 (0) | 2022.02.11 |
---|---|
자본론 있어요? (0) | 2022.01.12 |
작은도서관은 공공도서관에 대들지 말고, 더 잘하려고 하지 마라? (0) | 2021.12.07 |
작은도서관은 치유부터 (0) | 2021.09.13 |
작은도서관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0) | 2021.09.06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