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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전집을 버리며

작은도서관 이야기

by 참도깨비 2022. 4. 13.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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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유명한 가수가 텔레비전에 나와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하고 노래 부르는 시절에 1987년 초판 인쇄에 2000년 9쇄 개정판 위인전집을 버렸다. 백 권 가까이 되는 위인전집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까닭(어린 조카의 유품이기도 해서)은 따로 있었다 해도 때로는 질끈 눈 감고 버려야 작은도서관이 사는 길이긴 하다. 특히 작은도서관은 오래된 책을 버리고 새 책으로 바꾸는 회전율이 좋아야 한다고 하는데도 문학 관련 책들은 찾는 사람이 있어 천정까지 차도록 쌓아두고 있으니! 

 

일일히 라벨을 떼어내느라 한 권 한 권 다시 들여다 보았다. 옛날 숙제하느라 "태 정 태 세 문 단 세!"를 외치며 역사 인물표를 벽에 붙이고 위인전집을 장만하던 때가 있었다. 월부로 사서 방 한 켠에 쌓아두고 열심히 빽빽이 숙제를 했던 기억, 조선의 왕을 외우던 것처럼 한국 위인과 외국 위인들은 출판사별로 비슷했다.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모니, 링컨, 퀴리부인, 노벨, 광개토대왕, 강감찬, 이순신, 장영실, 안익태, 지석영..... 이름만 대면 아는 출판사에서 낸 전집은 하나같이 당대의 작가들과 화가들이 글을 엮고 그림을 그렸다. 속 사정으로 들어가보면 한 번 계약하고 돈을 받고 끝내는 매절 계약으로 중쇄를 거듭했겠지. 지금은 세계에도 알려진 유명한 그림책 작가가 겪었던 유명 출판사와의 지난한 저작권 싸움에 비하면 위인전집은 학생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셈으로 서로서로 좋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라벨 하나씩 다 떼려니 손가락이 아프다. 그래도 분리 수거장에 내놓으려면 모두 떼어내야 하니 라벨 작업을 할 때보다 더 고역이다. 부착력이 좋고 오래 간다는 독일제 필름이나 더욱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다 보니 중간에는 손가락이 떨린다. 요령도 없다. 말끔히 떼어내려면 손톱부터 손아귀 힘까지 내서 처리해야 한다. 어정쩡하게 서서 하자니 허리도 아프다. 나이 타령을 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권까지 떼어내고 도서관리 프로그램에서 제적도서로 배가변경(사실 거꾸로 먼저 처리하고 라벨을 떼고 있으나 귀찮아서 그냥 지나간다)을 하고 분리수거장에 가져다가 버렸다. 봄비가 내려 적당히 익어서 잘 폐기되겠지 하고 이별식을 하고 돌아와 생각하니 최근에 나온 책 한 권이 생각난다. <당신의 쓰레기는 재활용되지 않았다>(미카엘라 르 뫼르/구영옥 옮김/풀빛). 세심하게 분리수거하여 버린 우리의 쓰레기가 생각만큼 재활용되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다룬 책인데, 과연 이 책들도 제대로 재활용될 것인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마치 연금술사가 납을 금으로 바꾸려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버려진 쓰레기도 무한하게 가치 있는 물건으로 가공할 수 있다는 ‘재활용 신화’를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산뜻한 재활용 로고에 가려진 세계는 매우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다. 재활용 신화 속에서 우리는 죽지 않는 ‘플라스틱 좀비’를 만들어 내는 중"이라는 대목을 읽어보면 분리수거 잘 하고 있는 자신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그 다음은 신경 쓰고 있지 않은지 제발이 저린다.

 

 

오늘은 위인전기를 버린 날이니 다시 전집으로 엮인 책장에 집중하기로 한다. 서가 한 칸이 비었고, 서가를 새로 구입하면 어떤 책으로 채워야 할지 생각해 본다. 처음부터 '테스 형' 이야기를 했으니 위인전기는 벌써 시대와 고별했어야 마땅했다. 알만한 사람이 '테스 형!'이라니, 그것도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민주주의 시대에 '세상이 왜 이래?' 하며 분별없는 일을 벌였다는 것에 혀를 찼던 옹졸한 성격(책을 좋아하면서 점점 옹졸한 사서가 되어가는 것 같아 반성 중) 탓으로 돌리며 인물 이야기로 바뀐 이후 새로운 책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굳이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우리 삶을 뒤흔들며 입에 오르내린 위인들을 떠올려 보면 지금 시대의 인물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알아서들 찾아가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될까?. 그래도 좀 더 매의 눈으로 스스로 인물 사전 편찬위원이 되어 고르고 골라야 할 것이다. 백석 시인을 그림책에 담은 <시인 아저씨, 국수 드세요>(오승민/천개의바람) 같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책들이 있으니 북큐레이션 작업을 다시 해야 할 것이다. 서점이 한 발 빠르게 갔듯이 도서관을 찾는 이용자들을 다그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흥미를 갖고 관심을 갖게 할 동선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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