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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주려고 두 번째 왔어요

작은도서관 이야기

by 참도깨비 2022. 4. 20.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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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출근하니 도서관 문 옆에 책 상자가 있다. 이사를 하거나 오랜만에 집 정리를 하는 주민이 두고 간 것 같다. 아무런 쪽지가 없어서 노끈을 풀지 않은 채 전화가 오길 기다렸다. 가끔 이사하시는 주민이 책을 버리려다 기증 받느냐고 물어오면 "뜻은 감사하나 보시다시피 더는 받을 수 없는 형편이라"고 정중하게 거절하는데 이렇게 책상자를 두고 가면 일단 기다렸다가 의사를 확인한 후 정리해야 한다.

얼마 지났을까. 독서동아리 회장님 문자가 왔다. 어제 도서관 문 닫은 후 전화가 왔는데 문이 닫혀 있어서 그냥 갔다는 분이 책을 주려고 두 번째 왔다고 하며 놓고 갔다고 한다. 독서동아리 모집 공고 쪽지에 적힌 전화로 물었던 모양이다. 그제서야 노끈을 풀고 책을 둘러보았다.

 

대부분 겹치는 책이다. 어느 유명한 독서프로그램 회사에서 하는 책읽기 프로그램 0세트란 프린트가 찍힌 권장도서들이었다. 그 회사에 근무했거나 아이들에게 세트로 사주었던 분이라는 합리적인 추론을 해볼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 저학년 동화에서 청소년 소설과 역사, 과학 관련 책들로 보아 아이가 다 커서 그동안 방치해두었다가 내놓았을 것 같다. 

아무튼 출간일이 오래 되었으나 대부분 새책이나 다름없다. 겹치는 책과 때가 지난 책을 추려내고 나니 열 권 남짓한 동화나 청소년 소설, 옛이야기 책이 남았다. 한두 권은 독서동아리 회장님 몫으로 내어드리고 기증도서로 입력하고 라벨 작업을 마쳤다. 근래에 없던 일이다. 입력한 책도 도서관 서가 사정을 생각하면 밀어두었어야 마땅했지만 읽을 만한 책이어서 서가에 꽂았다. 올해 시립도서관에서 받을 예정인 도서구입비 가운데 반 가량은 서가를 맞추고 나머지 반으로 신간 구입을 해야 하니 과연 서가에 다 들어갈 것인지 걱정도 되지만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으로 채우고 나니 만족해야지.

 

독서동아리 회장님은 동아리 회원 모집 공고를 번갈아 보며 몇 년째 늘어나지 않는 회원 걱정과 함께 주민들 상당수를 차지하는 초,중학교 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고 부모들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탄을 하다 가셨다. 자신의 아이에게 좋은 책을 보여주고 싶어 강보를 메고 강좌를 좇아다니던 시절이 아니고 아이나 어른이나 스마트폰에 지식과 인생 길을 묻는 때이니 책은 넘쳐나고 이렇게 추려져서 분리수거장으로 가게 되는 것일까. 굳이 처음 도서관을 하려고 했을 때 책을 어렵게 구하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여전히 새 책 욕심은 끊이지 않고 헌책방에서 어쩌다 발견한 보물에 눈이 번쩍 뜨이는 마음을 탓할 따름이다. 언젠가 정년퇴임하는 교수님의 연구실 책을 받아줄 곳이 없어 폐기된다는 소식을 듣고 어디 외곽에 기차처럼 긴 창고를 지어 고서와 귀한 책들을 보관하고 지식의 보고 같은 역할을 하는 도서관을 꿈에 그리던 것까지 말해야 무엇하리.

 

버리는 책을 따로 모으니 책 한 상자 그대로다. 겹치는 책과 함께 눈에 띄는 책은 <초등학생이 읽어야 할 한국 단편선>이나 <역사상식>, <자연과학이 흐물흐물> 같은 것들이다. 유행이 지나면 시들해지는 상품처럼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불티나게 권장도서로 오르던 책. 엄선한 책읽기 프로그램 대상 도서들 사이에서 살짝 민망한 책이지만 한때는 요긴하게 읽혔던 책들이다. 몇 번이나 망설이며 서가에 꽂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과감하게 버릴 건 버리고 새로운 책과 꼭 필요한 책으로 꽂고 잘 활용해야 할 때이니 기증한 분 대신 골라 버려주는 마음이 가뿐하다. 그러니 도서관의 책을 잘 빌려보고 진짜 사야 할 책을 사시라고 권하고 싶다. 잘 골라 배치한 책들을 알뜰히 이용하고 작은 서재를 만들었다가 훗날에 집을 정리할 때 내놓더라도 아깝지 않을, 귀하게 대접 받는 책으로 주고받는 미덕이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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