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를 높이 든 아이들을
이어지는 <가린여울 사시는 유병욱 선생님께>와 <모교 방문>에도 뭔가를 들고 땅을 적시며 흐르는 어릴적 설렘이 <소나기 지나간 여름날>로 한바탕 후줄근하게 적시는 기분을 가져다 준다. 그러다가 압권인 것은 <첫걸음마>이다. 앞선 시집 <거기 그런 사람이 살았다고>에서 소 뱃속에서 태어나는 이야기가 압권이었다면 이번 시집에서 어린 송진권이 약간의 신기를 안고 첫걸음마를 뗀 시와 아부지 덕으로 입때까지 살고 있는 시인의 자리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러니까 제가 아무것도 아니었던 진달래 꽃술 흔들다 꽃잎 떨구는 바람이나 잠든 물고기 지나치며 비늘이나 문대다 지느러미 흔드는 물결 같은 거였을 적에요 여기 사람은 아닌가본데 처음 듣는 말로 누가 자꾸 밖에서 부릅디다 나야 노상 방 안에서만 뒹굴다 가끔 성질이 나면 패악이나 부리다 시악을 쓰며 울기밖에 더 했던가요 다들 들에 나갔는지 조용한데 마악 잠에서 깬 내가 뭔지 모를 어룽거림이 천장에 얼비치는 걸 보며 발을 들까부를 적에 또 누가 불러요 그 목소리 참 그윽하고 향기로워서 문을 밀치며 밖으로 나왔을 적엔 아무도 없고 목소리의 주인은 아지랑이 속으로 너울너울 가버린 성싶었지요 마침 빨래 함지 이고 들어오던 누나가 얼레 야가 그새 혼자 걸어다닌다니께 하는 소리에 복사꽃 산벚꽃 펑펑 터지는데 빨래터에 방망이질 소리 드높고 집집 굴뚝마다 연기 오르던 날 아닌개벼요
송진권, <첫걸음마>
누구나 태어날 때는 혼자였다지만 이것은 전편의 소 뱃속만큼이나 신비롭고 쓸쓸하고 절로 힘이 솟는 이상한 느낌이다. 그러니 일찍부터 시를 쓰려고 태어났다는 말이다. 게다가 철도원 일을 하며 시를 쓰고 있으니 역마살이 있을까 모르지만 잘도 누르고 사는 셈이다. 그게 다 아부지 음덕이지만. 대부분 아버지 나이 때가 되어서야 아버지 마음을 안다 하고, 아니면 그 전부터 패악질에 시악을 쓰며 단절하여 부재한 아버지이지만.
미움과 원망 이전에 누군가의 몸과 유전자를 빌어 혼자 태어나 사는 사람의 길에서 유랑하듯 마음을 다잡고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제 복으로 산다는 옛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세상만물의 기운과 음덕으로 산다 여기면 노철학자의 말처럼 '모든 글을 오가며 계속 여행하도록, 읽을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되돌려 주'는 시의 본분으로 살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니 장날은 얼마나 신이 나는지.
추석 밑, 대목장이다, 또렷하게 생긴 것, 못생긴 것, 안 생긴 것, 생겨먹다 만 것, 빌어먹을 것, 빌어먹다 쬐금 남겨둘 것, 오다 만난 것, 가다 만난 것, 오다가다 만난 것, 팔러 온 것, 사러 온 것, 사 갔다 되무르러 온 것, 혼자 온 것, 같이 온 것, 남 간다고 따라온 것, 어쩌다보니 와 있는 것, 큰 것, 작은 것, 즉은 것, 쬐끄마한 것, 눈곱만 한 것, 여문 것, 설익은 것, 너무 익어서 되바라진 것, 다리 한 짝 없는 것, 팔 한쪽 없는 것, 눈 하나 빠져나간 것, 뛰는 것, 걷는 것, 나는 것, 날아가다 잡혀 온 것, 얼어 죽은 것, 말라 죽은 것, 삶겨 죽은 것, 죽은 날 받아둔 것, 죽은지 얼마 안 된 것, 죽은 지 한참 된 것, 죽은 줄도 모르고 따라온 것, 모르고 따라온 것, 아침에 밭에서 따 온 것 모두 다 나와 흥성대는 장날이다.
송진권, <장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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