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을 남긴다
문화가 있는 날 별똥별과학도서관 학부모 시를 중심으로
시 읽어주고 시를 한 편 얻는 날이기도 한 문화가 있는 날이 몇 차례 돌아서 다시 별똥별에 왔다. 아이와 어른의 마음을 꿰뚫는 시 한 편 한 편이 소중한 날이다.
딸 아이의 방학숙제를 봤다.
시 모음집을 만들고 자신의 시를 썼단다.
제목은 “엄마”
엄마는 친구가 되었다가
엄마는 마녀가 되었다가
엄마는 선생님이 되었다가
비로소 우리 엄마가 된다.
내 눈에 보이는 글자는 오직 마! 녀! 뿐…
흠…
<나는 누구일까?>, ○○○(유성별똥별과학도서관 어머니)
2018년에 왔을 때 한 어머니가 쓴 시를 읽어주니 무척이나 궁금해하신다. 읽어보면 충분히 공감하는 시라서 시 한 편씩 쓴다고 해서 걱정한 것이 한풀 꺾이는 모습이다. 어느 한 분을 지목하셨는데 다시 확인해 보니 그때 모두 이름을 밝히지 않고 내셨다. 시에서는 ‘마녀’ 한 글자로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었지만 오늘은 그야말로 누가 쓴 시인지 알아내야 하는 제목이 되버렸다.
시가 어렵다고들 하나 본보기로 시를 읽어주고 어떤 마음으로 나온 것인지 감응하게 되면 바로 자신의 말이 가장 필요한 자리가 된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인 셈이다.
오늘 너를 만나러 간다.
선뜻 나서지지 않는 발걸음을
책임감으로 재촉한다.
길거나
짧고,
재미있거나
안타까운
너의 여러 모습들,
어느 것이
너의 진짜 모습일까
아직도 너를 다 알지 못하지만
무관심으로
밀쳐두지는 않겠다고 다짐한다.
다시
누군가의 너를
따라 써보며
조금 더 너의 곁으로 가보련다.
이명희, <시>
이명희 님의 시는 그야말로 시를 만나러 오기까지의 마음과 시가 왜 필요한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도서관 담당자가 문화가 있는 날을 위해 애써 모은 오늘의 시인들의 이야기가 빛을 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걱정 반 두려움 반으로 시를 만나러 오는 길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차차 시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간결하게 표현했다. 무엇보다 길고 짧은 형식을 떠나 진짜 시를 채울 이야기와 시를 대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어서 시인들이 많이 쓰는 ‘시’, 끝없이 지표가 되어주는 다짐 그대로다. ‘길거나/짧고,/재미있거나/안타까운’ 시 속의 여러 화자들 속에 자신을 밀어 넣는 일이 시를 이해하고 쓰는 데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서 시가 나온다는 것을 모른 체했던 무관심을 버리고 ‘누군가의 너’를 지목하며 시 곁으로 육박해갔다는 말이어서 여러모로 귀감이 되는 시다.
네 머리 위 빠알간 리본,
꽉 채워진 너의 서랍,
매년 대관식 같은 너의 생일.
나는 네가 부러워,
아홉 살이 아홉 살을 부러워하듯
그렇게 네가 부럽다, 딸.
비 오는데 손목이 아픈 걸 보니
엄마는 어른이 맞는 것 같은데…
여수민, <어른이 없다>
지난 2018년의 <나는 누구일까?>가 마중물이 되어 여수민 님만의 간곡한 시가 되었다. 아홉 살 딸의 성대한 생일잔치를 부러워하는 ‘나는 누구일까?’인 셈이다. 어른이라는 짐이 크게 느껴질 법하다. 손목이 아프다는 사실마저도 오늘따라 애처롭다. 어쩌면 2연에 말했듯 아홉 살 대 아홉 살로 만난 자리여서 더욱더 부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많은 이야기를 바탕에 깔고 쓴 시여서 제목과 함께 오래오래 읽으며 새겨볼 시다. 아홉 살 딸이 조금 더 커서 이 시를 읽고 엄마의 마음을 쓰다듬어 준다면 또 다른 시가 나오게 될 것이다.
비가 온다
시를 쓰러 나가는 길이다
시를 어떻게 써야 하나
마음이 무거워진다.
비가 오니
수제비와 전을 먹어야겠다.
덕분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안현희, <비 오는 날>
비 오는 날 시를 쓰러 나오는 길은 무거웠다고 한다. 글에 대한 공포는 생각보다 크다. 자신의 삶을 누군가 대필해주었으면 바라지만 정작 말은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그것이 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막연하게 글 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 것이다. 시를 읽고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수많은 화자들이 보이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메아리 같은 것임을 알고 나면 어느새 시는 어느 장르의 글보다 매력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난 시를 쓰는 게 좋다
길게 안 써도 된다
자세히 안 써도 된다
내 마음을 다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나의 마음을
남겨둘 수 있어
시를 쓰는 게 좋다.
안현희, <시를 쓴다>
그런 점에서 안현희 님의 시는 본보기로 읽어준 시에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은 것 같다. ‘시를 어떻게 써야 하나’만 생각하면 두려움은 공포 수준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시가 혼자만 감춰두는 것이 아니라 낯선 독자를 만나는 것이기도 하니 귀뚜라미처럼 타전을 하는 것이고 모든 이야기를 다 하지 않고 ‘내 마음을 다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내 마음을 남겨둔다’는 것은 당연히 시를 읽는 사람이 헤아려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길게 쓰거나 자세히 안 써도 시를 써가는 지속적인 일이 언젠가는 삶의 이면을 말해주고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다 표현하지 않으려면 앞의 시처럼 다시 읽어보고 화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적극적인 감응 행위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시를 이해하고 나면 무조건 시는 알기 쉬어야 하고 자신이 이해하는 시만이 시라는 편견이 깨질 것이다.
청아한 물 떨어지는 낭랑한 소리가 난다
또~
도~
독~
태곳적 동굴의 숨 쉬는 소리가 보인다
뽀~
골~
고올~
밤새 술 익어가는 소리에 취해 한잠도 못 잤다.
한선희, <술 익는 항아리>
한선희 님은 집에 술을 빚어놓고 오셨다. 시를 읽어주는 내내 얼굴빛이 술 항아리처럼 흥겨워진 까닭도 시 그대로이다. 술 익는 소리를 들으시느라 밤잠을 설치고 나오셨어도 어떻게 하면 그 소리를 표현할까 고심하다가 술이 익으려고 숨 쉬는 소리까지 잡아내려고 했다. 다만 ‘청아한 물 떨어지는 낭랑한 소리’를 좀 더 맛있게 잡아낸다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있지만 집에 가셔서 바로 쓸 것을 알기 때문에 술 익는 항아리만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덧 계절이 바뀐다.
올해도 습관적으로 옷장 정리를 시작한다.
입을 옷 없다 항상 투덜거렸는데 어디선가 옷들이 스물스물 나온다.
여태 모아둔 옷들이 제법 된다.
여러 해 선택받지 못한 옷들을 다시 입을 수 있을까 고민해 본다.
이 옷은 운동을 조금만 하면 입을 수 있겠으니 패스~
저것은 여유 있게 입을 생각에 좀 커도 패스~
이래저래 다시 챙겨 두는 옷들이 다시 옷장을 메운다.
내가 정리 못 하고 못 버리는 것이 옷이던가 나의 마음이던가
미련한 마음에 미련을 남긴다.
김은정, <미련>
김은정 님의 ‘미련’은 동음이의어를 잘 살려 썼다. 옷장 정리는 환절기에 겪는 또 다른 미련이기도 하기 때문에 참가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습관적으로 정리에 들어가다 보면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자신의 미련이 미련한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작아진 옷은 살을 빼서 맞추고, 큰 옷은 여유 있게 입을 양으로 맞추다 보면 한동안 스스로 타박하며 견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쌓아둔 삶의 구체적인 ‘미련’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삶에서 끌어내어 그 자리에서 쓴 시는 솔직하고 담백하다. 근사하고 멋진 말로 꾸민 시보다 감동을 준다. 자신의 생각을 끌어내어 확장하는 발걸음인 셈이다.
오늘 참가자들의 나이는 서로에게 많은 감응을 줄 만한 조합이었다. 아홉 살 딸을 부러워 하는 젊은 엄마부터 시에 대한 두려움을 떨친 중년, 그리고 술 빚는 어르신까지 다양한 분들이 모여 시를 읽고 자신의 시를 써서 나누는 모임이 만들어졌으며 좋겠다. 문화가 있는 날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에 감사할 따름이다.
* 위 글은 2023년 4월 25일 대전 별똥별과학도서관에서 있었던
작은도서관 문화가 있는 날 <시를 쓰자, 시인이 되자!> 프로그램에서 나온 시를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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