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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나일까? -청주 경산초 2학년 3반 아이들 시

시와 함께한 나날

by 참도깨비 2023. 7. 10.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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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나일까?

-청주 경산초 2학년 3반 어린이 시를 중심으로

 

2학년 3반을 맡고 계신 조우연 선생님이 내가 쓴 시 <>과 다리를 놓아주셔서 몇 달 전부터 기다리고 기다리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라는 시의 는 겁쟁이어서 내가 풀이라고 해도 뱀이 지나가고 멧돼지가 지나가도 팽팽 울 것이라고 고백하며 시작한 날. 아이들은 괜찮다고 괜찮다고 시를 외워서 읽어주었다.

 

내가 풀이라면

뱀이 지나가고

멧돼지가 지나가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을까

바람 불고 천둥 번개 치고

어두워지다가 비에 잠겨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이종수, <>

 

그런 겁쟁이 내 얼굴까지 그려준 2학년 3반 아이들, 몇 달 전부터 선생님한테 들은 이야기로 지레짐작하여 그렸다고 하는데 꽤 닮은 내가 많다.

아이들에게 동생이나 또래, 언니, 오빠, 형들의 시를 읽어주고 시를 써보기로 했다. 어른들이 쓴 동시에 맞춰 그런 것처럼 쓰지 말고 엄마나 아빠부터 어른들이 모르는 에 대해서, 내가 겪은 일에 대해서, 맛보기 시를 보고 생각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기 시를 써보자고 했다.

그랬더니 수업 시간에도 시 쓰기를 자주 한 시인 선생님 반답게 좋은 시로 화답해 주었다. 주저하는 아이들보다 말하기도 전에 벌써 쓰고 있는 아이들이 많을 만큼 다른 반과 다르다.

 

비가 온다.

후드득후드득

엄마는 지글지글

부침개를 부치고

식탁 위에 접시를

쟁그랑 놓고

냠냠 쩝쩝 먹었는데

부침개가 아프다고 소리쳤다.

 

신다솜, <부침개>

 

다솜이는 어제 비 오는 저녁에 부침개 부쳐 먹은 걸 썼다. 소리와 냄새부터 그대로 맛이 느껴진다. 비가 후드득후드득 오는 날, 엄마는 지글지글부침개를 부치고 식탁 위에 쟁그랑놓이는 접시만 봐도 가볍고 신나는 저녁 시간이 마법처럼 교실 안을 감싼다. 끝에 부침개가 아프다고 소리쳤다는 말에서 아이들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으나 다시 돌아가 지글지글, 쟁그랑, 냠냠쩝쩝 읽어주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부침개 자리에서 보면 그럴 법하다. 먹는다는 것은 먹혀주는 것에 대한 감사나 미안함 속에서 이뤄지는 일이니까. 조금은 억지스럽지만 2학년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을 일이다.

 

집에서 우산을 쓰고

학원에 갔다.

학원 가는 길에 우산을 돌렸다.

우산을 돌리니까

우산에 있는 빗방울이 떨어졌다.

후두두 후두두

소리가 좋았다.

 

이유지, <빗방울>

 

유지도 비가 온 날, 즐거운 놀이로 바뀐 이야기를 썼다. 제목도 빗방울이다. ‘라고 썼으면 후드득후드득내리는 빗소리에 그쳤겠지만 유지는 한발 더 나아가 흠뻑 젖은 우산을 둘려본 것이다. 아이들이라면 물웅덩이가 생기며 누구나 물창을 튀겨보고 싶은 것처럼 유지도 우산을 돌리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시를 쓰는 사람은 남이 하지 않는 일을 기꺼이 해보고 거기서 즐거움이나 재미를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 옆에 있는 친구 우산에 가서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가 새로운 웃음을 만들어내듯이 재미를 더하는 일이라는 것을 유지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준서는 상상을 더했다.

 

비는 어떻게 내릴까?

우리의 오줌일까?

그럼 번개는

우리의 방귀일까?

그럼 미세먼지는

우리의 침일까?

용이 슬퍼하겠다.

자기가 내리고 싶은데

 

김준서, <날씨>

 

하늘의 전사들이 전쟁하듯 요란한 번개 치는 날이나 무척 더운 날 해를 먹어버리겠다는 맛보기 시의 영향일까? 준서는 자기만의 독특한 시를 썼다. 비가 어떻게 내리는지 책에서 봤으면 당연히 구름 속 물에 갇혀버릴 텐데, 그런 이야기야 책에 있는 것이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꼭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하면서 끝도 모를 상상을 펼쳤다. 비가 우리의 오줌일 수도 있다. 그게 말이 되냐고 웃던 아이들도 그렇지 땅 위의 물기가 하늘로 올라가서 구름이 되고 비가 오는 것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하며 또 다른 시의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번개는 방귀에 미세먼지는 침이 볼 수도 있다는, 준서만의 개성이 그대로 드러난 시다. 그런 날 용이 슬퍼할 수도 있다는 역발상(거꾸로 생각해 보는 일)까지! ‘날씨예보관이 멀쩡한 얼굴로 텔레비전에 나와서 말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무기가 용이 되어 올라간다는 전설이 요상한 날씨를 재미있게 말해주는 일이니 날씨에 대한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싶다.

 

개미는 비가 오면 어떻게 살지?

개미는 비가 오면 집에 들어가도

물이 차지 않을까?

개미들은 어떻게 어떻게

개미를 안 죽게 할 수 있을까?

진짜 궁금하다.

 

김하연, <개미>

 

하연이는 비 오는 날 개미 걱정을 하고 있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비가 그치고 나면 개미 굴을 청소하느라 바쁜 개미들을 보았다면 비가 오면 지붕도 없는 개미집은 어떻게 끄떡 없는 걸까?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는 일이기에 궁금증에서 시작하여 궁금증으로 끝냈다. 개미가 집에 들어가고 물이 차지 않고 그 많은 개미들을 안 죽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만으로도 그냥 단순한 관찰을 지나 생명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행 진짜 궁금하다는 빼도 충분히 다음 행동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오늘은 100권에

꼭 갈 것이다.

100권은 날 기다리고 있다.

나도 100권을 기다린다.

드디어 50권을 넘어

100권을 만났다.

정말 행복하다.

 

최수인, <나의 백 권>

 

수인이와 서연이는 학급 목표로 있는 100권 책 읽기에 바짝 신경 쓰고 있다. 요즘 학교에 고전 읽기 프로그램으로 100권을 목표로 마라톤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100권이 친구처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써서 독서왕 겨루기 같은 무지막지한 말보다 훨씬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것 같다. 수인이는 50권을 넘었다는 데에서 즐거움을 찾았고, 서연이는,

 

1권을 지나고 50권을 왔는데

100권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책을 읽어도 100권이 되지도 않는다.

이상하다.

 

박서연, <100>

 

50권을 가까스로 넘어서 다시 50권이라는 줄어들지 않는 목표치에 현기증을 보고 있는 것이다. 컵에 물이 반이나 차 있다는 생각이나 반밖에 없는 생각의 차이일까? 서연이에게 1권에서 50권까지 간 것처럼 앞의 책만 바라보라고 해야 할까? 수인이처럼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수인이와 서연이의 100권 읽기가 서로 비슷한 때 이뤄지길 바란다.

 

가경천에 나무가 내가 갈 길을 막는다.

나뭇가지로 풀로 내 길을 막는다.

풍이는 나무의 진을 맛있게 먹는다.

길을 막지 마라 나무야

계속 갈 길을 갈 수가 없다.

옆으로 가도 뿌리에 걸린다.

풍이는 왜 맛있게 먹는 거지?

그래도 길은 안 막나?

나만 막히는 걸까?

 

임태린, <나무가 길을 막는다>

 

태린이가 쓴 시 제목도 재미있다. 내가 가는 길을 가로막는 존재에 대한 불편함이랄까? 내가 가는 길을 막지 말라는 시 내용처럼 경고로도 들린다. 여기서 풍()이를 끌어들이니 더 물음표가 간절해 보인다. 풍뎅이는 나무에서 흘러내리는 진을 맛있게도 먹으며 자기 길을 가는데, 천변의 나무들은 우거져서 나뭇가지와 풀로 길을 막는 것도 모자라 뿌리로 한 번 더 막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굳이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는 태린이의 고집스런 마음이 느껴진다. 이렇게 자기만의 고집스럽고 달리 생각하는 바를 표현하는 것도 또 다른 독자를 만나는 길이니 좋다.

 

지우개는 왜 지우개일까?

놀라고 만들어진 걸까?

아니면 그림을 그리라고 만들어진 걸까?

나는 모르겠다.

그러면 뭘로 만들어졌을까?

혹시 먹으라고 만들어진 건 아니겠지?

 

지민혁, <지우개는 왜 지우개일까?>

 

민혁이는 지우개를 무엇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 가지고 노는 놀잇감? 아니면 그림을 그리는 도구? 그렇게 생각하다가 지우개는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하고 다른 생각으로 옮겨 간다. 먹으라고 만들어진 것 당연히 아닐 텐데, 그렇다면? 지우개는 무엇으로 만들어졌기에 쓱쓱 지우고 지우개 따먹기처럼 놀이 도구가 되기도 하면서 재미있는 거지? 하고 지우개란 말을 돌려보면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모르겠다)를 빼면 그대로 말놀이다.

 

꿈은 왜 꿀 때도 있고

안 꿀 때도 있을까?

베개가 마법을 부리는 걸까?

아니면 잠을 잘 때

우연히 꿈을 꾸는 걸까?

 

나는 왜 꿈을 꿀 때도 있고

안 꿀 때도 있는지 모르겠다.

꿈을 꾸고 일어나면 더 개운하다.

무서운 꿈을 꾸면 개운하지가 않다.

 

김채원, <>

 

채원이의 꿈도 지우개라고 할 수 있다. 지우개가 지워버린 그림을 다시 그리듯 도 내가 생각하고 걱정하고 몸으로 했던 일이 다시 그려지는 것이지 않을까? 베개가 부리는 마법일지도 모르는 꿈. ‘은 과학자에게도 연구 대상이지만 시를 쓰는 사람에게도 좋은 소재다. 채원이는 날마다 꿈을 꿀 때도 기억이 날 때도 안 날 때도 있다는 걸 겪으며 꿈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한다. 꿈을 꾸고 일어나면 개운하고, 무서운 꿈을 꾸면 개운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 몸과 머리가 부리는 마법과도 같은 것이니 계속 꿈 이야기를 써보았으면 좋겠다.

 

안녕하세요

이종수 선생님이 오셨다.

선생님은 그림 시를 잘 쓰시고

우연이 선생님과 친하다.

어떻게 친해진 것일까?

두 분 다 시를 잘 쓰셔서

친해진 것일까?

나도 모른다.

 

오한률, <시인>

 

한률이도 궁금한 게 많다. 우리 반에 시 아저씨가 어떻게 온 거지? 담임 선생님과 아는 사이라는 것은 눈치껏 알고 있는데 어떻게 친해진 것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시가 맺어준 인연은 그냥 아는 것보다 더 각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서 나도 모른다는 다른 친구들 시에도 반복되는 구절인데, 굳이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연이어 등장하는 유주와 건희 시에서처럼 재빨리 선을 긋는 느낌을 준다. 더 알아보아도 좋은데 시는 어렵고 재미없다/종이를 보는 순간 아무 생각이 안 난다/나도 모르겠다는 식으로 끝나는 것 같아 아쉽다. 한률이는 거기까지는 아니지만 자진해서 뺀다고 했으니 그것으로 훌륭한 시가 되었다.

 

연못에서 꽃이 피어났다.

연못에 개구리가 폴짝폴짝

꼬불꼬불 올챙이

뒷다리가 튀어나왔다.

개구리는 도대체

뭘 먹고 살까?

 

조유주, <연못>

 

유주는 언젠가 연못에 가서 보았던 개구리와 올챙이 이야기를 하는데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진다. 더 알아보고 싶은 것이나, 그런 궁금증을 같이 갔던 엄마, 아빠에게 물어보았더라면 괜찮을 것을, 하는 아쉬움의 거리, 연못이라는 생명체들이 살고 있는 공간에서 멀찍이 구경하고만 끝낸 것 같아 그렇다. 올챙이와 개구리가 한 자리에 나타난 것은 그렇다 쳐도 올챙이에게서 뒷다리가 튀어나온 것은 큰 사건이나 마찬가지인데 뭘 먹고 살까?’로 덮어버렸으니 더욱 더 아쉽다.

 

갯지렁이는

왜 갯벌에 있을까?

지렁이면 흙에 있을 것이지

왜 갯벌에 있을까?

갯벌이 좋은 걸까?

지렁이도 갯벌에 넣어주어야지

 

조건희, <갯벌>

 

건희는 정말 모르고 한 말이다. 갯지렁이와 지렁이가 사는 환경을 잘 몰라서 한 말이니. 갯벌흙과 그냥 땅흙이 어떻게 다르고 거기서 사는 비슷한 이름의 지렁이가 어떻게 사는지 알고 나서 아차하고 뒤늦은 탄식을 했으니 다행이다. 시를 쓰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고 배우는 것도 좋다.

 

지렁이가 죽었을까?

안 죽었을까?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헷갈리는 지렁이

지렁이는 어떻게 생존을 할까?

 

이산, <죽은 것 같은 지렁이>

 

산이도 앞선 유주의 <연못>처럼 거리가 느껴지지만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바라보면서 다음 행동을 기다리게 하는 시를 썼다. 요즘처럼 더워지는 날, 보도블럭이나 시멘트 바닥에 기어 나와 죽은 것 같은 지렁이를 본 것인데, 지렁이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로 있는 것을 보았다면 왜 흙에서 나와서 있는지 좀 더 알아보고 지렁이가 어떻게 사는지 느껴야 하는데 거기서 매듭을 짓고 말아서 아쉽다.

책상은 왜 받침대처럼 생겼을까?

글씨를 쓰라고 했을까?

책상은 네모같이 생겼다.

책상이 왜 만들어졌을까?

공부하라고 해서 만들어졌을까?

책상이 왜 만들어졌는지 궁금하다.

 

김채윤, <책상>

 

채윤이도 마찬가지다. 하루에 꽤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있는 책상에 대해 진짜 궁금한 것은 공부만 하라고 만들어진 책상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나, 왜 책상은 만들어서 우리를 고생시키는지라거나 다른 상상이 들어가면 좋았을 텐데, 궁금하다고만 하고 끝내버려서 아쉽다. 그러나 그런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으니 책상이 주는 무거움을 조금은 느낄 수 있어 다행이다.

 

엄마는 왜?

아빠를 이길까?

엄마가 힘이 센 걸까?

아니면 엄마가 잔소리를

잘하는 것일까?

하나도 모르겠다.

 

연규진, <엄마는 아빠를 이긴다>

 

그에 비해서 규진이는 아주 단호한 제목처럼 더 이상 모르겠다는 말이 모르겠다는 말로 들리지 않는 것을 말해준다. 엄마의 잔소리는 충분히 아빠를 이기고도 남는다는 것을 의뭉스럽게 말하고 있거나 아빠 편을 들어 하나도 모르겠다고 동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채윤이의 책상이 규진이의 시에 가까워지면 충분히 하고 싶은 말을 했을까? 궁금하다.

 

바닷속에는

뭐가 있을까?

보물 아니면 멸치?

뭐가 있을까?

몰라.

 

김동하, <바다의 전설>

 

동하도 자기 이름 뒤에 작가라고 붙여놓고 바다의 전설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서도 끝내 모름으로 끝냈다. 그야말로 바닷속을 상상해보면서 보물 아니면 멸치?’할 때는 전설이 시작되려나 싶었는데 용 머리에 뱀 꼬리도 아닌 것이 시시하게 끝내버렸다. 이렇게 여러 편을 묶어놓고 읽어보면 자신의 장점을 더 살려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 보일 것이라 믿는다. 굳이 단점은 아니니 조금 더 거리를 바짝 당겨보는 일이 필요하다.

 

무지개는 왜?

무지개일까?

이름도 빨, , , , , , ,

색도 그리고 정말 멋져

사람은 왜 살색일까?

여러 색이 있는 건

왜 없을까?

무지개 빼고

 

김준하, <무지개>

 

그런 점에서 준하 시는 무척이나 중요한 물음을 던져주고 있다. 제목은 무지개이지만 우리에게 다른 질문을 하게 한다. 친구나 어른에게도 통하는 질문이다. 무지개가 여러 가지 색으로 부르는 것은 다 아는 일인데, 사람을 말할 때마다 살색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있다. 아이들에게 물으니 살색은 살구색이라거나 연한 분홍이라기도 하고 갈색이라고도 하는데 준하는 무지개처럼 어울려 빛나고 멋진 사람 이야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급박하게 던지는 물음이어서 여러 색이 있는 건/왜 없을까?’하고 물어보고 무지개 빼고하면서 마무리했지만 뜻은 충분히 통한다. 어른들이 답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오늘 아침에 밥과 계란프라이를 먹었다.

밥을 먹다가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다.

나는 계란프라이를

계란후라이하고 발음할까, 계란프라이라고 발음할까?

일단은 계란프라이를 먹어야지.

왜냐하면

계란프라이는 따뜻할 때 먹는 거니깐!

 

임은지, <계란후라이? 계란프라이?>

 

은지 또한 아주 재미있는 웃음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영어에서 발음은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뭐라 읽든 계란프라이는 따뜻할 때 먹고 보아야 한다는 넉살이 어디에서 오는지, 은지의 너른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좋다. 엉뚱한 발상이 재미를 만들어내고 시를 여유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귓불은 어떨까? 시를 쓰기 전부터 귓불을 만지고 있던 유림이는,

 

귓불은 왜 말랑말랑한 걸까?

혹시 귓불 안에 말랑이를 넣었나?

아니면 귓불 안에 솜을 넣은 걸까?

 

귓불은 왜 말랑말랑한 걸까?

 

이유림, <귓불>

 

귓불이야말로 말랑말랑하면서 부드럽고 따뜻하면서도 찬 곳이어서 우리가 뜨거운 냄비를 만지면 으레 만지는 곳이 아닌가. 그렇다면 귓불이 말랑말랑한 까닭은 좀 더 재미있게 상상력의 폭을 넓혀 보았을 것을, 조금 아쉽지만 귓불을 만져보며 생각해 본 것만으로도. ‘말랑이를 넣었지 않았을까 말해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자꾸 귓불을 만져보게 하는 시여서 매력이 있다. 이렇게 즐겁게 한 편 한 편 재미있게 읽어주며 아이들과 놀다 보니 어느새 건희의 <이름> 앞에 와 있다. 아직 2학년인 건희가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을 거듭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나는 왜 나일까?’하는 물음만으로도 늘 동생과의 실랑이에서 지고 마는 현실을 잘 말해주는 시가 있을까 싶다.

 

나는 왜 나일까?

동생은 왜 동생일까?

내가 동생이면 안 되나?

난 왜 형일까?

 

조건희, <이름>

 

건희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동생이면 안 되나?’ 형으로 태어나 이런 부당함을 안고 사나?’하고 물어보았을 것이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그런 물음 몇 마디로 지금의 현실을 잊고 싶은 것이다. 동생 때문에 또 혼나고 형답게 행동하라는 말을 들었을 억울함을 호소할 필요가 없다. 짧고 굵게 그럴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 마디로도 충분하다.

이렇게 닫는 시까지 2학년 3반 아이들이 날 감동하게 해주었다. 다시 로 돌아가 겁 많고 여리고 따뜻한 마음끼리 훌륭한 시간을 보냈다고 자부하고 싶다. 앞으로도 시로 말하고 읽을 거라고 다짐하는 듯한 아이들의 눈빛이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 이 글은 7월 5일(화)에 경산초등학교 2학년 3반 아이들과 함께 쓴 시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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