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에서 김개미 시인은 이렇게 말하며 시작한다.
땅속에는
눈먼 두더지랑
부지런한 지렁이랑
코딱지만 한 개미가 살아
벌레 먹은 밤이랑
찢어진 나뭇잎이랑
죽은 곤충이랑
끝없이 이어지는 뿌리도 있어
이미 온 것들과
앞으로 올 것들
그리고 새로운 많은 것이
거기서 시작돼
언제나 깜깜한
밤인 곳에서
이 말은 김개미 시인의 시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뜻이다. 시인은 그곳에 자주 들러 '이미 온 것들'과 '앞으로 올 것들'을 만난다. 이번에는 드라큘라와 유령을 만났다. 드라큘라와 유령도 무서운 게 있고 혼자라는 공통점이 있어 이러다가는 둘이 사귀고 사람이 되는 건 아닌지 궁금해진다. 동시집이라고 해서 많은 주제를 다룬 동시들을 모은 것이 아니라 드라큘라와 유령만 가지고 써도 충분히 어린 독자들까지 모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가끔
나쁘고 무서운 무언자가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럼 나는 다리보다 먼저 깨어
꿈속에서 도망쳐 나오는
내 다리를 본다
<악몽>
누가 꾸는 악몽인가? 누구나 꾸는 악몽이다. 누구나 무서운 게 있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푹 자고, 아예 안 자고, 딴짓을 해봐도 잠과 현실 사이에서 훔쳐보고 웃고 있는 귀신이 있게 마련이다. 드라큘라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더 재미있다.
이 밤,
누가 나를 부르지?
내 이름을 이토록 다정하게 부를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데
나는 늙은 은행나무보다
대장 거북이보다 나이가 많은데
지금 나를 부르는 소리는
어젯밤 내가 나를 부르는 소리
누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어젯밤 병에 담아둔 소리
<누가 부르지?>
드라큘라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어 병에 담아둔 소리를 밤에 다시 듣는다니, 어이가 없지만 잠잠 생각해 보면 어릴 적 무서운 밤, 혼자였던 밤에 듣고 싶었던 '나를 부르는 소리'이자 말이었던 것이다. 유령과 드라큘라는 얼마나 많이도 찾아왔던지, 함께 놀 사람을 부르며 골목과 밤을 떠도는 어린 개미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찾아온 시다.
이야기가 없는 시대, 서사의 위기 (0) | 2023.10.20 |
---|---|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에세이 <작은 미덕들> 읽는 법 (1) | 2023.10.17 |
소설가 김남일과 함께가는 근대문학 산책 (0) | 2023.09.05 |
정답만을 요구하는 세상에 필요한 그림책 (0) | 2023.08.14 |
이야기를 품은 나무 이야기 <나무를 대신해 말하기> (0) | 2023.07.28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