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눈물은 나와 한 몸이 되어있다
-옥천 청성초등학교 학생 시를 중심으로
‘바다는 누가 울은 눈물인가’
옥천이 낳은 정지용 시인의 <바다>란 동시다. 기름진 냇물(沃川)이 흐르는 탓에 생선국수가 맛있고, 이름난 시인들도 태어난 곳이다.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미래의 시인과 만나는 것 같아서 설렌다. 청성면은 청산면과 맞닿아 있어서 이정표에서도 오누이처럼 정겹다.
청성초등학교 4, 5, 6학년들과 한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또래 시를 읽어주고 각자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시 한 편 써보고 나누었다. 시를 잘 쓰는 1, 2학년들을 만나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오히려 저학년 아이들의 시에 자극 받으라고 다독이면서 분위기를 띄우고 시작했다.
우르르 쾅쾅 우르르 쾅쾅
구름이 화가 났다. 사람들이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려 화가 났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구름이 울기까지 한다.
구름이 울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우산을 펼친다.
이젠 구름이 엄청 화가 났다. 번쩍번쩍
하늘에선 하얀 빛이 난다.
이용대(4학년) <화가 난 구름>
중학년을 지나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시에 대한 고정관념 같은 것이 생기는데, 대부분은 시에 대한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 어렵고 지루하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데는 시의 값어치가 몇 푼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시는 어렵다. 쉽게 쓰면 되는 것이라는 말 자체부터가 어렵다. 자기 마음이나 앞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할지 잘 모르고 불안한 것처럼 어떤 말을 써야 할지 도통 난감하다.
그래서 하나하나 풀어나가야 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나온 다양한 형식과 주제의 시를 본보기로 읽으면서 이제 자신도 할 말이 충분히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용대가 쓴 시는 본보기 시를 잘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이야기로 끌어냈기 때문에 잘 썼다고 할 수 있다.
비가 내린다.
비는
구름이 우는 것이다.
구름이 울면 내가
위로해 준다.
위로해 주면
구름은 눈물을 그친다.
눈물을 그치면
눈물 때문에 새싹이 돋아난다.
그 새싹은
무지개이다.
이혜인(괴산 백봉초 2학년), <비>
아이들에게 먼저 읽어준 ‘구름의 눈물’을 ‘화가 난 구름’으로 잘 부려 썼다고 할까. 훌륭하게 빌려 썼다. 어쩌면 기후위기라 부르는 말도 사람들이 불러낸 것이듯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면 구름이 화가 날 만하기에 ‘화가 난 구름’이 나온 것이다. 앞의 본보기 시가 층층 올라가면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라면 <화가 난 구름>은 용대가 보고 배워서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여 써낸 순발력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조금 아쉽다면 고치고 다듬을 시간이 있었더라면 ‘우르르 쾅쾅 우르르 쾅쾅’을 흔한 흉내말이 아닌 진짜 화가 난 구름과 대기가 합쳐서 내는 더 괴이쩍하고 무서운 소리로 바꾸었으면 하는 것이지만 여기까지 쓴 것만 해도 잘 했다. 뒤이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구름이 우는 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우산을 쓰니 구름은 더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번개와 함께 벼락을 내리는 것이 아닌가. 시는 이렇게 아는 것을 당연하게 말하는데 있지 않고 말을 잘 부려 쓰는데 있다.
여름은 덥다.
지구가 더울 때
우리도 덥다.
윤준호(4학년), <여름>
그에 비해서 준호는 짧은 것이 미덕이라는 듯 몇 번을 고쳐 쓰다가 가장 싫어하는 계절인 ‘여름’에 대해서 썼다. ‘지구가 더워지면 우리도 덥다’는 말을 시시각각으로 전해져 오는 지구촌 소식에 빗대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 것을 바탕으로 잘 부려 쓸 수도 있었다. 그러기에는 더 이상 끌어가지 못한 아쉬움을 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본보기가 되는 이야기들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질문과 대답을 찾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빠가 봉숭아 꽃을 때린다.
꽃의 눈물을 손톱에 올린다.
봉숭아 눈물 위에 이불을 덮어준다.
하루가 지나서 봉숭아 눈물은
나와 한몸이 되어 있다.
장은영(5학년), <봉숭아>
봉숭아 꽃물 들였던 일을 떠올리며 썼다는 은영이는 눈빛으로만 감응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가장 말을 많이 하고 참견하던 아이다. 역시 ‘눈물’을 떠올린 것은 그때는 몰랐지만 ‘구름’이 울어서 비가 내린다는 본보기 시에서 퍼뜩 지난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시를 읽으면 이렇게 자신만의 새로운 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봉숭아’라는 소재를 가지고 많이 쓰지만 대부분 그것을 물들이며 한 말이나 얽힌 이야기에서 찾기보다 ‘꽃물’과 ‘첫눈’을 떠올리며 ‘소원’을 쓰고 마는데 은영이는 바탕이 되는 일에서 잘 찾아냈다. 아빠가 돌돌 찧어주던 봉숭아 꽃물이 ‘눈물’이라고 하니 그것 위에 이불을 덮어준다는 말로 이어진 것이다. 봉숭아 잎이나 비닐로 묶던 것이 ‘이불을 덮어준’ 것이고 ‘눈물은 나와 한 몸’이 된 것이다. 앞서 혜인이 동생의 말처럼 ‘무지개’ 라는 아름다운 말의 발견으로 이어진 셈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감을 얻으면서 시는 자라나는 새싹인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도 시의 씨앗이 들어있었던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는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은이라는 이름을 종종 듣는다.
내 이름은 은서인데…
은이는 우리 언니인데…
우리 언나는 반대로 은서라는 이름을 종종 듣는다.
언니가 졸업해도 은이라는 이름으로 가끔 듣는다.
은이, 은서 이름은 비슷하지도 않은데…
왜? 헷갈리는지 궁금하고
또 궁금하다.
이은서(5학년), <헷갈리는 이름>
은서는 맨 뒷다리에서 앉아 책상 깊숙이 앉아 백지인 채로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다가 끝내 재미있는 일을 떠올렸다. 헛갈리는 궁금증에 대해서, 형제자매 사이에는 아주 흔한 일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도 ‘은서’라는 이름 대신 ‘은이’라는 언니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은근히 화가 날 법도 한 일을 썼다.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네, 하고 달려가면 네 아범!”하는 노래 대목이 떠오른다. 어른들은 왜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뭉뚱그려서 말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법하다. 5학년이 되어서까지도 은서와 은이라는 이름을 구별하지 못하고 부르는 건 아직 1학년 때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약간은 억울한 일이기도 해서 잘 갖다 썼다. 이 시에 유독 다른 친구들이 공감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우리 오빠와 내 동생은 완전한 이중인격이다.
우리 오빠는 매일 날 때린다. 심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세게 때린다. 왜 때리냐 물어보면
“너가 깝쳐서”라든지 “걍”이라고 한다.
이유 없이 왜 때리냐고 물으면 무시한다.
하지만 밖에선 착한 척, 친절한 척을 한다.
그럴 때마다 오빠가 못마땅하다.
그래도 오빠는 용돈도 주고 선물도 준다.
이런 부분에선 오빠가 좋다.
우리 동생은 오빠와 다르게 이중인격과
완전체이다. 한마디로 심각한 이중인격이란 거다.
집에서는 내가 한 대 때리면 소리 지르고 엄청 아픈 척한다.
피해망상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소명(5학년), <이중인격>
이런 시는 화합 차원에서 냉장고에 붙일 만하다. 또 다른 싸움을 부르겠지만 자신의 싫고 나쁜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대답을 듣고 다시 그것에 대한 대응을 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시가 그렇다는 것이다. 읽힐 것을 염두에 두고 쓰는 것만은 아니지만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말해주고 반박할 수 없거나 사과를 얻어내는 어떤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를 가만히 읽어보면 오빠와 동생 사이에 낀 듯한 소명이의 억울함과 가족간 위계와 같은 뿌리 깊은 감정들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빠가 자신을 깝쳐서 싫고 그냥 나부대는 것 자체가 싫은 것이라고 말했듯이 또 다른 ‘동생’에게도 그 기준을 그대로 들이대며 이중인격의 완전체라거나 피해망상까지 들먹일 만큼 감정 문제임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모님의 두둔이나 편애 비슷한 감정이 들어가면 더 시끄럽게 돌아가는 셋의 관계가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가족회의를 통해 정식 안건으로 토론해 보는 것도 좋다. 모두 이 시를 썼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고, 서로의 관계에 대해서 솔직하고 공정한 평가를 할 수 있는 일이면 좋다.
세 쌍둥이 빨강, 노랑, 초록이 있다.
빨강이 빛을 내니 모든 차들이 빨강이에게
집중되었다.
15초가 지나니 노랑이가 3초를 빛내고 사라졌다.
초록이가 빛을 내니 차들이 신호등 밑으로 움직였다.
비록 빨강이, 초록이보다 빛을 내지 못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아름다운 빛을 내려 노력한다.
김세영(5학년), <신호등>
‘지우개’와 ‘연필’만큼 자주 중복되는 소재이다. 어릴 때부터 신호등 교육을 잘 받아서 그럴까. 그러나 세영이는 세 쌍둥이기도 한 빨강, 노랑, 초록을 소명이의 시처럼 형제자매 사이나 친구 사이에서 느끼는 감정으로 달리 말해서 새롭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당연히 오는 것 같지만 계절마다 느끼는 풍경과 감정은 섬세하게 다르듯 흔한 ‘신호등’에 빗대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차를 타고 큰 도시에 나갔을 때 보았을 황색불의 짧은 순간을 ‘아름다운 빛’으로까지 올려놓았다. 교통신호에 대한 상식은 덮어두고 약 3초간의 깜빡임으로 빗대어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역할과 능력치, 그 자체 그대로 보아주는 가치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 듯해서 좋다.
비 온 날 멍하게 빗방울 내리는 창문을 보며
안 좋은 기억이 뇌리를 스쳐가는데,
갑자기 등골에서부터 허벅지까지 기분 나쁜 축축한 서늘함이 스며드는데
순간에 이불을 푹 덮었더니
춥지만 뭔가가 포근해졌다.
연하음(6학년), <서늘함>
무엇을 생각한 것일까? 소름이 돋는 서늘함 그것일 뿐일까? ‘안 좋은 기억’이 이런 날 떠올랐기 때문인 것은 틀림없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읽는 사람이 ‘서늘함’의 정체를 떠올려보고, 무엇이 그렇게도 ‘등골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실감 나듯 나쁘고 축축한 것을 느끼게 했을까 하고 공감해 보면 될 것이다. 안 좋은 기억과 서늘함, 그리고 ‘뭔가’에 대해 꺼내놓고 해결 방법을 찾아가는 것 또한 함께 공감해보게 하는 시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가 살랑살랑 속닥거린다.
그러면서 나무들의 토크쇼가 열린다.
나는 그럴 때마다
새로운 소리를 듣는다.
나는 토크쇼를 기다리며 하루를 맞이한다.
박서연(6학년), <나무들의 속삭임>
학교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의 속삭임은 날마다 보고 듣는 것이지만 그것을 무슨 이야기로 끌어낼지는 좀 더 생각하고 상상해 보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어야 함을 느끼게 해주는 시다. ‘살랑살랑’ 자체가 토크쇼인 것인데, 늘 새롭다. 거기까지는 잘 잡아서 썼다. 가령 느티나무가 벚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사이에서 열리는 토크쇼라면 그들만의 이야기, 그것을 옮겨 적는 상상력과 사물과 풍경에 대한 감성이 있지 않겠는가. 아니면 하루하루 나무들의 모노드라마(혼자 이끌어가는 드라마)를 상상해 보는 것처럼 새로운 발견의 연속이었으면 좋겠다.
시를 자신의 삶 그 자체이고 그것을 둘러싼 이상하고 설명만으로 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다. 이렇게 한 편씩 써보면서 낯선 체험을 해가길 바란다. 봉숭아 눈물이 나와 한 몸이 되듯 ‘눈물’이 왜 짠지 생각하다가 ‘바다는 누가 울은 울음’이란 것을 찾아내는 시인의 고장, 옥천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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