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쓰는 아이
- <헨쇼 선생님께> 비벌리 클리어리 글/이승민 그림/선우미정 옮김/보림
이 책은 처음에 산하출판사에서 냈던 '편지 쓰는 아이'였다. 저작권이 없이 그냥 번역해서 내던 책이라 다시 고쳐 써서 낸 책이라는데 이번에는 양장본에 꽤 정성을 들였다는 느낌이 든다. 두 제목이 큰 제목이 되든 작은 제목이 되든 잘 어울리는 듯하다.
다른 책과 달리 편지와 일기 형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이라 읽기에 편하고 새로운 느낌을 준다. 작가들이 유명해지면 으레 내게 마련인 편지글 모음과는 다른 뭔가 자극을 주는 것이 새롭다. 리 보츠라는 아이가 작가 헨쇼 선생님에게 투정어리게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하는 지 물어보면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사실 리 보츠란 아이가 트럭을 몰고 어디든 떠돌아다니는 아빠와 이혼한 엄마와 살고 있고, 전학 온 학교에서 친구 없이 도시락을 잃어버리는 가운데 쓰기 시작한 내용이라 사연 많은 아이가 역시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끌어간다는 당연한 글 구조가 깊이 다가왔다.
이혼을 다루고 있는 다른 작품들을 많이 읽어보면서 이제 이런 내용이 다른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현실에 마주하게 된다. 이혼이 부부간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날을 힘겨워하며 살아야 할 어린이의 입으로 들려주는 뼈아픈 이야기라는 것을.. 그것이 이제 심심찮게 우리 둘레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그러나 이런 작품에서 다뤄주지 않으면 그 누구의 입으로도 이야기할 수 없는 억압의 현실이 있다. 당사자 스스로 입을 열어 하지 않으면 그 깊게 다친 속을 모르듯이 이제 함께 나서서 어루만져 주고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경험으로 당사자들의 마음을 눅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자각마저 든다.
그런 현실 앞에서 당당하게 편지를 통해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리 보츠와 성실하게 답장을 보내주고 이야기를 걸어주는 헨쇼 선생님이 부럽다. 아니 콧끝이 찡하다. 리 보츠도 처음에는 숙제로 내준 글쓰기를 위해, 아니 좋은 작가가 되려면 한없이 멀기만 한 자신의 글재주만을 탓하면서 시작한 편지지만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으며 앞길을 헤쳐나가고자 하는 해방구로 받아들였던 같다. 이것마저 하지 못하면 멀리 떠도는 아빠와 혼자 독립해 나가려고 애쓰는 엄마 사이에서 숨이 막혀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늘 찡그린 얼굴로 다니는 학교에서 친구를 얻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고, 나중에는 자신의 현실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부풀려서 빗나가는 길을 걸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헨쇼 선생님이 리 보츠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주 현명했다. 자기 소개부터 시작해서 지금 사는 곳, 생김새, 가족 이야기, 지금의 마음 상태에 대해서 물어보고 이야기하게 한 것은 지금 뿌리 박힌 곳에서 시작하게 하려는 노련한 글쓰기의 첫삽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다른 동화작가와 만나 점심을 하면서 리 보츠가 써낸 아빠 트럭을 타고 다닌 이야기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려는 자세야말로 자신의 현실을 바로 보게 하고 좀더 당당한 이야기로 끌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니까.
아빠를 멀리 떠나보내고 아빠가 달리고 있을 길을 지도에서 찾으며 막막한 현실을 보고 있는 리 보츠. 아빠의 따뜻한 전화를 기다리고, 자기를 멀리 데려다줄 트럭을 기다리며, 잃어버린 산적이란 개를 기다리며, 또 아빠와 엄마가 다시 합칠 날을 기다리며 외롭게 자기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아니 편지와 일기로 써가는 것이 나에게 커다란 질책을 하고 있는 느낌이다. 편지를 써본지 언제냐는 사실보다도 애정어린 눈길로 한 대상과 저렇듯 끊임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는지, 그러고서 글을 쓰려고 하는지, 한 어린이, 주인공을 내세우며 그의 아픔과 상처를 보이지 않은 힘으로 현실 위에 다시 드러낼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어느덧 편지와 일기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고 물꼬를 트는 리 보츠를 보면서 작가의 길이 살갑게 느껴지면서도 무한한 책임감을 가져다 준다.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 (0) | 2021.09.06 |
---|---|
수전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 (0) | 2021.09.06 |
폭격과 학살의 역사 <노근리, 그 해 여름> (0) | 2021.09.06 |
아이들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 <전교 모범생> (0) | 2021.09.06 |
죽음을 함께한다는 것은 (0) | 2021.09.03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