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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비밀

책 속 한 문장, 또는 장소

by 참도깨비 2021. 9. 7.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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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의 비밀 ”


 호박잎이 호박씨를 단 채 올라왔다.
 호박잎 아니랄까봐 호박씨를 그대로 달고 나온 걸 보니 텔레비전 드라마마다 반전이랍시고 나오는 출생의 비밀 이야기가 떠올라 <출생의 비밀, 그루갈리 삶을 위한 씨뿌리기>(신경득 지음/살림터)에 나오는 머리말을 올려본다. '우리 이야기 문학의 아름다움이란 소제목으로 이효석의 소설을 재평가하면서 '그루갈이 삶을 위한 씨뿌리기'로 출생의 비밀을 파헤친 점에서 막장드라마까지 판을 치는 출생의 비밀에 대한 집착이 오늘만의 일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고 있기에 여기에 발췌해 싣는다.
 
 
 
 세상에 생명보다 아름다운 것이 있으랴. 생명이란 물과 같아 높은 곳과 낮은 곳을 가리지 않으며, 기름진 땅과 메마른 땅을 가리지 아니하며, 젖은 땅과 마른 땅을 가리지 아니하며, 씨앗이 떨어져 떡잎을 가르고 꽃을 피운 다음 드디어 열매를 맺는다. 대지에 떨어진 씨앗은 순환을 거듭한다.
 
 동해 용왕 막내따님은 버릇없는 말괄량이이라 용궁에서 쫓겨나 이승으로 귀향 온다. 퉁쇠에 갇힐 적에 어머니가 이승에 나가 생불왕이 되어 먹고살 방도를 마련해 주나 용왕이 서두르는 바람에 출산의 방법을 듣지 못하고 세상에 오게 된다. 임보로주 임박사 부인에게 아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나 열두 달이 넘도록 출산을 못 시킨 채 수양버드나무 아래서 통곡한다. 한편, 옥황상제가 명진국 따님아기를 불러 잉태와 출산의 방법을 알려 주니, 임보로주 임박사 부인 곁에 내려와 아기를 출산시킨다. 이후 동해 용왕 막내딸은 아기를 서천 꽃밭으로 데려가는 저승할망이 되고 명진국 따님아기는 삼승할망이 된다.
 
 이렇게 세상에 태어난 귀한 생명이 사람이 만든 굴레 때문에 축복을 받기도 하고 저주를 받기도 하며, 때로는 버려지기도 하고 거두어들이기도 한다. 세상에는 '후레자식'이란 말이 있는데, 이희승 <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배운 데 없이 제멋대로 자라서 버릇없는 놈"이라고 뜻을 새기고 있다.
 
 아버지를 모르거나 불분명한 경우를 '홀의 자식'이라 부른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과 부인 예씨 사이에서 출생한 유류 태자가 여기에 해당하며 백제 무왕도 같은 경우이다. 또한 재석과 당금애기 사이에서 출생한 삼형제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어머니가 재혼하지 않은 경우이다.
 
 남의 씨를 잉태한 채 시집을 가거나 이미 출생한 아이를 데리고 개가하는 경우 홍명희와 신채호는 '덤받이'라고 부른다. 자신도 '덤받이'였던 동명왕은 소서노와 결혼하나 그녀는 이미 부여 왕족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두었는데, 이들 역시 덤받이의 예이다. 규중처녀와 지렁이 사이에 태어난 견훤도 그러하다. 또한 <모밀꽃 필 무렵>의 동이도 여기에 해당한다.
 
 법적인 혼인관계가 아닌 남여 사이에서 출생한 아이를 서(庶)자, 얼자, 간(間)자, 별(別)자, 첩(妾)자, 추실자식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배달말을 논자는 '얼받이'라 부르기로 한다. 환인의 아들 환웅과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가 여기에 해당한다.
 
 신화 가운데 '하늘에서 내려온 아이'는 대개 '버려진 아이'들이다. 이들은 당대 귀족들이 양자로 삼아 양육하게 되는데 이는 오늘날 업둥이에 해당한다.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와 그이 부인 알영, 석탈해와 김알지,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이 여기에 해당한다.
 
 탄생의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니나 지나치게 많은 아들, 딸의 출생도 정치사회적 불구가 된다.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난 바리공주와 칠성님과 매화부인 사이에서 출생한 일곱 쌍둥이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출생의 비밀을 화소별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A. 하늘의 천신이 지신이나 수신에게 감응한다.
 B. 천신은 떠나고 지신이나 수신은 홀로 아기를 분만한다.
 C. 동이리로부터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놀림을 받는다.
 D. 어머니를 졸라 출생의 비밀을 알아 낸다.
 E. 그루갈이 삶을 위한 목표를 설정한다.
 F. 아버지를 만나 나라를 세우거나 신책을 맡는다.
 
 제 때 제 땅에 씨앗을 뿌려 떡잎을 가르고 자라나 꽃을 피우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 축복받는 삶을 제물갈이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생명이 이렇게 구름에 달 가듯이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때를 놓치거나 가뭄이나 홍수 때문에 문전옥답이 아닌 산야나 박토에 오곡 대신 구황작물로 멋대로 뿌려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인생을 그루갈이 삶이라 한다. 위의 화소 가운데 A,B,C,D는 모두 출생의 비밀을 지닌 채 세상에 태어난 인간들의 화소이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인간은 태양마차를 몰고 하늘을 가로지르다 불덩이가 된 파에톤처럼 한 사회로부터 소외되거나 파멸의 길을 걷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한국의 건국신화, 서사무다, 입말 이야기에는 이러한 주인공, 입말 이야기의 주역들은 오히려 이 화소처럼 그루갈이 사람을 선택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개척하기 위하여 건국이념을 설정하거나, 인류에 이바지하는 신책을 맡거나, 아버지를 찾아 멀고도 험한 여행 끝에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게 된다. (이하 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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