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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암

책 속 한 문장, 또는 장소

by 참도깨비 2021. 9. 7.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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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세암 ”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서울의 달동네들이 그렇듯 수동도 한국전쟁과 해방을 겪으면서 몰려든 사람들이 얼기설기 집을 짓고 살던 곳. 지금은 주거환경개선지구가 되어 새 길이 나고 공원에 주차장까지 갖춘 곳이 되었지만 여전히 게딱지같은 집들과 그 사이로 난 골목들이 실금실금 오줌 누는 소리처럼 떠있는 곳
수동.

수암골 벽화 중에서(글씨 이희영)

 


오세암은
대학시절, 글을 쓰던 후배들이 자취하며 살던 달방이다
'ㅁ'자 집 마당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어달리기로 꽃이 피고
진짜 예불이라도 드리는 듯 새벽이 아름답던
만날 라면 아니면 막걸리로 배를 채우던 오세암
난 그들을 먹여 살릴 셈으로 딸딸이에 김치며 쌀,
어쩌다 몸보신이라도 하라고 삼계탕거리를 싣고
꼭 신도마냥 오르막길을 오르던,
암자 아닌 암자였던 오세암

대학시절 수동에는 자취하는 학생들이 많이 살았다. 다른 데보다 훨씬 싼 맛에 허름한 방이나마 꿰차고 살았다. 한 집을 통째로 빌려서 자취하는 후배들이 오세암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살던 집이 있었다. 언덕 아래 집들에서는 맛 볼 수 없는 우암산의 신선한 공기와 새벽녘 산꼭대기에서 외쳐대는 '야호' 소리에 잠을 깨던 곳.
그곳 수암골목에서 공공미술프로젝트의 하나로 수암골 아카이브가 열리고 있대서 찾아갔다. 충북민족예술제를 겸해서 추억의 골목길 투어를 하는 것이다. 민예총 식구들이 모두 달려들어 문패도 만들어주고 금이 간 벽에 그림을 그려주는 일인 셈이다.
그런데 오세암 자리를 찾으려고 하니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주거환경개선을 위해 허리쯤을 뚝 잘라내어 길을 만들고 공원을 만든 탓이다. 우회도로가 지나는 길 아래쪽 집들은 거의 그대로인데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한참을 탈탈거리며 올라가서 닿던 오세암 자리는 온데간데없어서 그때의 달동네가 맞나 싶다.

 


수암골이라고 부르는 골목길, 느티나무 아래 노천까페가 있는 삼충상회 앞에 할머니들이 졸로리 앉아 계신다. 한참 문패를 만들고 있는 서예위원회 희영씨를 신기한 듯 바라보신다.

수암골 어르신

 


"쩌어기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여?"
텔레비전에서 비슷한 걸 보셨는지 여기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여기 청주 사람들이에요.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예술하는 사람들이에요"
그제서야 '청주 사람들이라고오' 하며 고개를 끄덕이신다.
사진기를 들이대자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 다들 좋으시댄다.
"잘 나오게 찍어"
"잘 나오면 나 한 장 뽑아줘"
"에이, 사진을 뭣다 쓰게"
"잘 나오면 가지고 있지 뭐"
수줍게 웃으시는 모습이 시골 처녀들 같다.
"네, 나오면 꼭 보내드릴게요"
"집이 어딘지 알고 보내줘"
"요 아래 집이니께 꼭 보내줘"
"네, 삼충상회에 맡겨둘게요"
대뜸 약속하고 나서 진짜 약속을 지킬지 불안해지긴 했지만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야 사진을 뽑기보다는 죄다 컴퓨터에 몰아넣고 지내지만 어르신들이야 사진으로 뽑아서 사진첩에 꼭꼭 끼워놓고 펼쳐보는 낙으로 지내시니 어쩔 수 있으랴.


삼충상회 할머니는 오래전에 술취한 사람이 간판을 깬 뒤로 간판을 안 달고 장사했는데 이번에 멋들어진 나무간판을 달아주니 엄청나게 좋으시단다. 마침 카메라 건전지가 떨어져서 들어갔더니 건전지는 없고 담배나 음료수에 막걸리 몇 가지만 팔아도 그럴듯한 간판만은 새집처럼 좋으신 모양이다.

"근데 노래자랑은 언제 하는겨?"
지팡이를 짚고 사진 찍으면 꼭 보내달라고 하시던 할머니가 노래자랑에 꼭 나가시고 싶으신 모양이다. 어제도 했는데 오늘도 하느냐고 물으시는데 자세한 내막을 몰라서 '하겠지요' 하고 대답했더니,
"노래자랑 가면 뭘 주는겨?"
"뭔 바가지라도 주겠지요"
바가지란 말에도 싱숭생숭해지신 할머니 얼굴이 꽃처럼 환하다. 점심참이어서 밥 드시러 가시는지 골목으로 몰려가시면서도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이홍원 화백의 호랭이

 



"그런데 저건 뭐여?"
"호랑이잖아요"
골목이 시작되는 담벼락에 이홍원 화백의 그림 '꽃을 사랑한 호랭이'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다.
"어째 호랑이 같지 않어"
"아니에요. 꽃을 사랑한 호랑이라고 연작으로 그리는 그림이에요"
"에이, 호랑이라면 무서운 데가 있어야지"
"할머니, 저게 이홍원이라고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에까지 알려진 화가 작품이에요. 저 그림 하나가 얼만데요"
할머니들의 첫 관전평이 나오자 옆에 서있던 이광진 연출가(자신은 스스로 십장이라고 말하시지만)가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난 사람인 줄 알았네"
"그러니까 여기서 보니깐 호랑이 같네"
"꽃을 사랑한 호랑이니까 무섭지 않고 사람 같잖아요?"
사람도 사람 나름이지만 어렸을 적에 호랑이 한번쯤은 만나봤을 법한 할머니들의 호랑이 감상에 둘러대다 보니 진짜 사람 같아 보인다.
"저 호랑이가 그림 그리는 화가와 똑 닮았어요. 술을 좋아하니까 코가 벌겋잖아요"
역시 공공미술프로젝트 십장(?)다운 말이다 싶게 할머니들에게 차근차근 말해주는 솜씨가 예술가답다. 참고로 이곳 사람들에게 친해지려고 벌써 어느 생일집에 가서 국밥 한 그릇을 배불리 먹고 왔노라고 말하니 과연 골목골목 미술십장답다고 할 수 있다.

 


할머니들을 따라 다른 골목길로 접어드니 성심 누나(처음으로 불러본다)가 거칠거칠한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광진 형님(그새 호칭을 바꾸기로 했다)이 더 많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해서 샐쭉해졌지만.

삼충상회 앞 공터에서 붓글씨 쓰는 희영씨가 열심히 작업한 문패들이 새집처럼 들어서있다. 아침부터 목공소를 돌아다니며 대패질하고 잘라와서 붓글 씨로 이름을 쓰고 덧칠까지 했으니 문패만으로도 황혼의 두 내외가 나란히 새집에 든 느낌이 든다. 혼자 사시는 분은 왠지 쓸쓸해보이지만 명필다운 한획 한획이 술 한 잔 건네듯 따뜻하기만 하다. 어떤 분은 한자로 부탁해서 해달기도 했다.

수암골에서 이광진 연출가와 이희영 서예가

 


골목 약도가 그려진 갈림길에서 노래자랑 할머니가 동네 할아버지에게 뭔가 부탁을 하신다. 길을 올라갈수록 빈집인 줄 알았던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외갓집 가는 길마냥 내다보신다.

 

조금 올라가니 양철대문에 수탉과 병아리가 그려져있다. 참 삼충상회 앞에서 어떤 할머니가 호랑이보다 닭 그림이 좋다고 하시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무서운 호랑이보다는 구구구구 키우시던 닭이 더 살뜰하게 보이셨겠지 싶다. 그런데 암탉은 어디 갔지? 문패를 보니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 집이다. 암탉 같던 할머니와 사별을 하셨을까?

 

금방이라도 고개를 홱 돌려서 쪼을 것 같은 닭을 뒤로 하고 골목길을 틀어서 올라가니 연꽃이 피었다. 바람이 부는 게다. 치마폭이 날리듯 뒤집힌 연잎이 아리게 다가온다. 어느새 연못이 되어버린 듯하다.

 


맞은편 담벼락에서 노래 잘 하게 생기신 할머니와 손녀뻘 되는 여자 아이가 희끗하게 연꽃을 바라보고 있다. 시원시원하게 펼쳐진 연잎 사이로 핀 연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인기척이 느껴진다.

 
 

 


삭막해 보이는 철조망 아래에 회칠을 한 듯한 담벼락도 멋드러지게 보인다.

 
자세히 보니 낙서 그림 같은 거북이도 있고 물고기에 고양이도 들어와있다. 사뭇 비장해 보이면서도 애쓴 흔적이 고스란히 보인다.

 

이번에는 민화에 나오는 문자도가 그려진 골목이 나온다. '효'자인가? 읍내 장날에 가면 가죽필로 쓱쓱 써주던 그림 같지만 흰 벽에서는 두루말이로 배접한 그림 한 폭 그대로다. 그 옆 골목으로 시큼한 냄새가 난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아니 그림이 이끌어주지 않았더라면 사는 모습 보여주기 싫고 애써 들추기 싫어 돌아섰을텐데.
"하필이면 젓국 낼 때 온대요"
김치라도 담글 양인지 할머니들이 마늘을 까고 그래도 젊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젓국이 들었던 항아리를 부시면서 묻지도 않은 말을 하신다.
먼저 말을 걸어주니 좋다.
"이러다 소문 청주 시내에 다 소문나겠네"
"소문나면 좋지요. 사람들이 오가고"
공공미술프로젝트를 한다고 골목골목에 그림이 뜨니 방송국에서 다녀가고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다니니 젓국 냄새까지 소문날 것처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공공미술이라고 해도 사는 데는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시큰둥할 수도 있겠지 싶어 사람들 이야기만 쏙 빼버리고 싶다. 구경거리와 사는 데는 미술이 들어갈 자리가 있을까 모르겠다.



어느 집은 자기네 벽에 아무 것도 그리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많이 살던 때야 낙서로 채워졌을지 모르겠지만 휑한 바람벽에 들어찬 그림들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화투라도 쳐야 기운이 나는 것처럼 보이신가 보다. 그래도 미술프로젝트로 들어선 그림들이 그 시절을 다시 불러들일 수는 없을 테지.
 

 


조금 전 젓국 담긴 항아리를 수돗물에 헹구던 집 아래 골목으로 피아노 건반이 깔려있다. 한번 내려갔다 올라오는데 조금은 멋쩍다. 애들 같으면 건반이라도 누를 양으로 이쪽 저쪽 건반으로 짝다리를 짚을텐데 가락을 뭉텅뭉텅 자르듯 내려갔다 올라오자니 그렇다는 말이다.

 


비탈진 곳이다 보니 시멘트로 들이부은 길들도 공중부양이라도 하듯 옆구리에 걸쳐서 휘돌아 간다. 사람 하나 지나갈 만한 좁은 길도 있고 지붕 옆을 걸어서 지나게 되어있는 길도 있다. 그런 길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빈 집이 많다. 아니면 멀리 출타중인지 자물쇠로 굳게 닫혀있다. 살문이 걸친 것으로 보아 제법 살만 하던 집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빈 집 사이로 시내 풍경이 왈칵 열어젖힌 문처럼 다가온다. 오세암에서 자취하던 후배들을 보러 오토바이에 김치며 쌀을 싣고 올라오던, 아니 어머니 몰래 퍼오느라 도둑고양이처럼 오르던 길이 휘리릭 하고 소리를 내며 감겨 올라오는 것만 같다.

 


비가 내린다. 거뭇거뭇하던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니 작업도 잠깐 그쳤겠지. 내쳐 오세암 자리를 떠올리며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오세암인 듯한 집은 보이지 않고 간간히 채 가져가지 못한 세간살이가 뒤엉킨 채 숨죽이고 있는 집들만 나온다.
아예 어느 빈 집은 사진 전시장이 되어버렸다.

'ㅁ'자집 오세암은 길과 함께 사라진 모양이다. 그때는 글께나 쓴다는 후배들이 모여 토론을 하고 선배들의 말 한 자락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진짜 예불이라도 드리듯이 했는데, 오세암 주지 노릇을 하던 후배들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 후배들이 냈던 원카피복사판 시집 '희망꽃'과 자필 시집 '들에 피는 꽃으로'를 들춰보는 기분이다. 다시 피지 않을 꽃.

 


다시 혜원정사가 있는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오세암은 없는 것이니 다시 내려와야겠지. 전혀 절 같지 않은 절(?)이지만 교회가 보이지 않은 달동네의 중심 같은 곳으로 내려와보니 일찍이 털 것은 털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비를 긋고 있는 민예총 식구들과 막걸리 한 잔을 걸쳤다. 꼭 사람처럼 병따개를 걸친 의자가 정겹게 보인다. 사이다가 좋아서 서로 병따개 쟁탈전을 벌이는 아들 녀석을 보는 것만 같다.
두 잔 마셨는데 불콰해진다. 십장이 사주는 막걸리 맛이 달착지근하다. 삼충상회 편지통 위에 달린 카셋트에 든 테이프를 돌리니 '흘러간 옛노래극장'이 나온다.
'화앙서어성 예에터에에~'
"아, 빈대떡 생각난다"
저만히 물감 도구들을 비설거지한 성심이 누나가 막걸리에 추임새를 맛깔나게 내지른다. 빈대떡 생각이 굴뚝 같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곧잘 막걸리를 마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위해 이보다 더한 가수가 없을 것만 같다. 옛노래극장 하나면 한세월 족히 흘러가고 넘나들겠지. 황혼의 부르스처럼. 살갑게 손주 맞듯이 반겨주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있으니 도통 안통하던 미술도 통하니.
"그래고 보니께 호랑이 같네. 사람 같고 말이야"
 

 

그게 백성들 사는 그림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두 잔 술에 헹, 하고 비틀어져서 저 배추포기들처럼 눌러앉아 있고만 싶다. 내려가고 싶지 않다. 삼충상회 앞 느티나무 아래가 오세암인 것만 같다. 이제 그때 오세암 식구들만 모이면, 그때처럼 열정있게 글을 쓰고 소통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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