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시집 읽기 모임-어쩌다 시에 꽂혀서-에서 피재현 시인의 시집 <원더우먼 윤채선>을 읽었다.
그냥 읽기만 하는 데도 짠하고 솔찬해서 함께 웃고 울먹했으나 결국 웃으면서 끝이 났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하면 어느 집 독자이거나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아니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집안 이야기를 왜 밖에다 하느냐고 볼멘 소리를 할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앞에서는 퉁퉁거리고 화를 내면서 끝내 미안함을 감추고 사는 독자들은 피재현의 독특한 화법에 격하게 공감할 만한 시집이다.
반성 많이 하면서 읽게 될 것이다. 속이 타는 어머니, 아버지 이야기는 곧이곧대로 하기보다
삶을 살아내게 하고 나중에 나이 들어 돌아보면 짠하고 솔찬한 무엇이 가슴에 걸리는 그것대로 웃으면서 하는 것이
시의 미덕이지 않을까.
그래서 피재현 시인이 어디 큰 문학상을 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면식 없는 피재현 시인은 한사코 손사래를 치겠지만
내가 상이라도 주고 싶은 시집이다.
세상에는 사모곡 사부곡 많이도 있지만
이렇게 짠하고 솔찬하게 할 수 있기는 쉽지 않다.
함께 시집 읽는 분들에게 풀꽃문학상 비슷한 상이라도 주자고 할 정도였다.
덜컥 치매가 올까 노심초사하며 하루하루 연장하며 버럭버럭 목소리가 높아지는
나로서는 <원더우먼 윤채선> 시집이 통째로 내린 십전대보탕 같다.
가족의 완성은 끝내 아버지, 어머니로 집결되고 결자해지되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면
고통스럽더라도 웃으며 <원더우먼 윤채선>을 읽는다면 좋을 것 같다.
중간중간 '더 이상 쓸쓸함에 길들여지고 싶지 않아/그 쓸쓸함을 견딜 정도로 내가 뻔뻔해진다면/그건 가장 쓸쓸한 날이겠지'(<난 좀 일찍 죽었으면 해>) 같은 시인의 쓸개 같은 심사들도 빛나는 시집이어서 여기 몇 편 소개한다.
타작 끝난 남의 콩밭에 콩 주우러 갔다가
전동차 열쇠를 잃어버린 엄마는 해가 뉘엿뉘엿해지자
그 먼 들길을 걸어와서는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날 밝자마자 하는 수 없이 아들 불러 놓고
참고서 산다고 사기 쳐 유흥비 뜯어 가던
같잖은 아들놈 앞에 속수무책 죄지은 아이가 되어 앉았는데
나는 두 마지기 넘는 콩밭 콩깍지 사이를
이 잡듯이 뒤지다가 그만 화가 나서
일정 때 순사처럼 엄마를 몰아붙인다
엄마는 열쇠 찾으러 간 콩밭에서 또 열심히 콩을 주워
몸빼 주머니 한가득 쑤셔 넣고는
뒤뚱거리며 절뚝거리며 돌아다니고
나는 목도 아프고 점심 약속도 있어 그만 포기하고
열쇠 집에 전화를 걸었다
출장 열쇠는 콩알만 한 열쇠 하나 깎아 주고는
팔만 원을 내놓으라 하고
엄마는 어제 낙수 콩 두 되 주워 만 원을 벌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한 이만 원 깎아 달라고 흥정을 시작하고
나는 자꾸 출렁거리는 엄마의 몸빼 주머니가
눈에 거슬러 그만 또 버럭 화를 낸다
재수가 드럽게 없다야 그 돈 내가 낼게 니는 걱정 마라
걱정 마라 걱정 마라 재수가 드럽게 없다야
나는 또 누가 돈이 없어 그러냐 버럭 화를 낸다
먼 산 적벽 바라보며 화를 삭여 보는데
엄마는 그사이에도 자꾸 콩을 주워 주머니에 넣는다
피재현, <나는 또 화가 난다> 전문
오늘 내가 안 가면 엄마는 환장할 것이다
날 이런 데 버려 놓고 와 보지도 않는다고
나는 고만 죽을란다고 내 죽으면 다 편할 일이니
수면제 탁 털어 넣고 죽어불란다고
온 병실 귀먹은 할만구한테도 다 들리게 소릴칠 것이다
그럼 한 할망구가 나서서 여보소 김천댁,
아들도 먹고 살아야지 어예 맨날 들따보니껴
나랑 민화투나 한 판 하시더
하면서 엄마를 달랠 것이다
어떤 할망구는 고만 혼자 놀아도 되겠구만 또 저런다
지청구를 할 것이다 이런 참에 내가 나타나면
엄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바쁜데 뭘라꼬 왔노,
고만 가라, 가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허리며 다리며 아픈 곳을 주워섬기며
에구구구 죽는소리를 할 것이다
그럼 내가 바쁘다고 엄마 보러 안 오나? 하면서
짐짓 효자인 척 엄마 위세를 좀 세워 준 다음
어깨를 주무르며 내일부터는 내가 정말 바빠서
한 며칠 못 온다, 혼자 좀 있어라 하면
엄마는 또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외로 꼬고
괜찮다 일 봐러 돈 벌어야 먹고살지
일 봐라 할 것이다 나는 내일 저녁 무렵에나
몰래 와서 엄마가 뭐 하고 노시나 빼꼼히 들여다봐야겠다
고만고만할 것 같으면 그냥 돌아가야겠다
엄마가 너무 시무룩하여 엄마 없는 아이처럼 가여우면
‘짠’하고 나타나 병실에 복숭아 통조림 한 통씩 돌리고
엄마 위세나 세워 줘야겠다
그러면 엄마는 또 달짝지근한 복숭아 향에 취해
한 며칠 덜 아프게 살아질 것이다
피재현, <밀당> 전문
고작 사촌 동서의 병문안에 그렇게 울어 버리면 어떡해 그럼 나는 뭐가 돼 가뜩이나 입 싼 아지매가 돌아가 온 집안에 대고 엄마가 병원에 갇혀 외로움에 몸서리치고 있더라 소문을 낼 텐데 나는 꼼짝없이 불효자가 되어
엄마 그러지 마! 옛날에 유명한 서양 어른이 사람은 군중 속에서도 고독하다고 그랬어 그래도 병원이 사람 구경하기는 낫지 않아! 엄마 혼자 집에 있으면 또 밤에 무섭다고 그럴 거잖아 살구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도 뒷산 짐승들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니 아부지 살아 있을 때는 들리지도 않더니 왜 그렇게 무서운지 모르겠다 그럴 거잖아
조금만 더 지내 보고 기름값도 비싼데 겨울은 여기서 나고 그래도 집에 가고 싶으면 내가 데려다줄게 많이 무서우면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살자 며느리 눈치 좀 보면 어때 서로서로 눈치 보며 그렇게 사는 거지
엄마 나도 엄마 보러 병원 오는 길이 쓸쓸하고 엄마 두고 돌아가는 길은 아프기도 해 어째야 하나 맨날 생각해도 생각은 안 나고 그나마 엄마가 병원에 있으면 안심은 되지 어디 굴러떨어졌나 집에 불은 안 냈나 별의별 생각 안 해도 되고
답답한 엄마 마음 잘 알지만 그러지 마 그깟 사촌동서 앞에서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울어 버리면 나는 뭐가 되냐고 처음 문병 오면서 제일 싼 박카스 한 통 들고 와서는 만 원짜리 한 장도 안 쥐여 주고 가는 동서 앞에서 그렇게 서럽게 울어 버리면 우리 자존심을 뭐가 되냐고
자 연습해 보자 엄마 응 또 누가 병문안이랍시고 오면 자네 왔는가 우리 아들이 집이 춥다고 겨울은 이 병원에서 나자고 그러네 돈도 없을 텐데 아들이 고생이지 뭐 여긴 호텔처럼 따뜻하네 밥도 잘 나오고 목욕도 시켜주고 이런 데가 다 있었네 나 살찐 것 좀 보게 하하하 그리고 일단 봄이 오면 다시 생각하자 엄마 응?
피재현, <겨울은 여기서 나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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