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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의 재발견, 사물과의 교감 시, 프랑시스 퐁주의 <비누>

독서일기

by 참도깨비 2021. 10. 26.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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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시스 퐁주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1920년대 초반 풍자시를 발표하며 등장했으며 공산주의에 이끌렸으나 곧 빠져나왔을 만큼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시인이었다. 주로 사물과 언어를 통한 사회 비판이라는 길을 선택했다.  첫 시집 《사물의 편》(1942)이 대표적이다. 그의 시관은 한마디로 '대상놀이objeu'라 할 수 있다.  "시인과 예술가들이 제공하는 기쁨을 보자. 그러니까 이 기쁨은 일반적으로 그들이 유용성을 감추고 은폐할 줄 안다는 사실과 그들이 교사나 도덕가로 변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자기 자신의 감동, 놀라움, 경탄을, 또 전대미문의 것, 치명적인 것, 일상적 현실 가운데 존재하는 비극적인 것에 대한 감정을 전달하는 데 만족하면 좋겠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현실을 바꾸자고 제안하는 대신 그저 바라보자고 제안했으면 좋다. 그것은 (분명히 인위적인) 평화, 안정, 고요함, 쾌적함, 균형의 조건 가운데서 이루어지면 좋겠다. 여러분이 동시에 즐기고 있는 그러한 감정들 말이다. 실은 놀이가 진짜로 중요해 보이는데, 이것은 자동으로 돌아가는 일상의 삶 한가운데에서 행해지는 한가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은 즉각적으로 이 활동으로 돌아갈 수 있다. 대수롭지 않은 놀이, 적어도 이른바 공짜 놀이가 중요해 보인다. 그런데 이 놀이의 극단적 형태가 시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것은 '삶' 자체를 재현하거나 모방하지 않는 순수하게 언어적인 놀이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소설, 역사, 드라마가 아니라 시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감정적이고 주관적인 시가 아니라 찬사의 시 혹은 편드는 시, 게다가 가장 잘 구조화된, 가장 자유로운, 가장 잘 옮겨진, 가능한 한 가장 '차가운' 시다. 여기 자연스러우면서 동시에 값진, 극도로 정교한, 그리고 이러한 사실 때문에 신비로운 한 극치가, 공짜 물건이 있다. '공짜'의 가치는 원하는 순간에만 나타날 것이다. 말하자면 경험한(극적인) 순간에만, 즉 진정한 '독서'의 순간에만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매우 소중한 도구를 소유하고 있다. 이 도구는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이지만 특정한 순간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유용한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요컨대, '표본' 도구 혹은 만능 도구를 소요하고 있다. 결국, 일종의 열쇠 혹은 만능 암호 해독판이다. 이제(잠신 동안 '숨'을 돌린 뒤에) 여러분이 앞의 긴 텍스트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주면 좋겠다. 그전에 다음 사항을 확실히 믿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이 우리에게 빚지고 있는(것처럼 보이는) 것이지만, 우리한테 부족할 수도 있는 것으로서 인간이 만든 가장 일상적이고 필수불가결한 것 중에는, 주르댕 씨가 산문을 지은 것처럼 우리가 별생각 어뵤이 평소에 사용하는 것들 중에는 -빵, 비누, 전기도 마찬가지이지만-단어들과 언어의 수사가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물건들의(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진정한 제작자는 작가이며 시인이라는 점이 명백해질 것이다. 우리의 정신을 차리게 해줄, 우리의 '자유'(여러분이 이 단어를 아낀다면)의 문을 여닫게 해줄 세계의 열쇠 혹은 암호 해독판을 벼려낼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자신에게, 온전히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p243~245)

 '비누'로 상징되는 하찮아 보이는 사물에 대한 사유가 곧 놀이라는 것이다. 보는 사람과 대상 사이에 벌어지는 즐거운 놀이라는 것이다. 《프로엠》(1948), 《물컵》(1949), 《표현의 광란》(1952), 《비누》(1967), 《풀밭의 제작》(1971), 《말의 무화과 어떻게 그리고 왜》(1977), 《테이블》(1982) 등의 작품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이미 행해진 도덕적이고 고전적인 작품은 훌륭한 것으로 감탄 그 자체이기에 자신만의 대상을 찾아 새로운 작업에 매진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퐁주는 메모에서 시작된 '비누'에 대한 글을 25년 동안 붙들고 다소 반복적으로 가상의 청취자(독자의 다른 말이기도 하나 퐁주만의 독특한 표현이어서 솔깃하다)에게 던지는 실험과도 같다. 

비누는 조약돌처럼 단단한 침묵이자 수다쟁이다. 물과 만나 거품을 만들고 둥근 형태로 사라지는 과정을 '지적 세척'이라고 부르는데 그 과정이 말의 연습이자 언어적인 감각의 기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에는 비누와 견줄 만한 것이 없다. 그렇게 소박하면서도 멋진 돌은 없다./비누의 인격에는 진실로 매력적인 뭔가가 있다. 그의 태도는 흉내낼 수 없다./그것은 완벽한 조심성으로 시작된다./비누는 다소 은밀한 향을 풍기면서도 완벽한 자체를 보여준다. 그러다가 우리가 자기에게 관심을 두자마자, 물론 붙같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얼마나 대단한 격정을 보이는지! 얼마나 헌신적이고 미친듯한 열정인지! 얼마나 관대한지! 거의 고갈되지 않는, 상상할 수도 없는 수다인지!"에서 보듯 사소해 보이는 사물에서 기쁨이라는 거품이 생겨나고 결국은 깨끗해지는 손과 비누를 바라보고 있는, 그것이 시가 되는 자연스런 변화를 느끼게 만든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백한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의 정신의 놀이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사소하고, 게다가 가장 하찮은 명성을 지닌 것들을 대상으로 할 때 가장 순조롭게 실행된다는 점을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특별한 의견들을 특별한 형태로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 혹은 특별한 견해를 특별한 형태로 출간하는 것은 합당하고 유용하며 심지어 필요해 보인다. 결국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과 견해는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의미심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은 사물들로 이동하여 그것들을 표현하는데, 사물에 대한 표현은 우리 자신의 생각과 견해와 조금도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점을 내가 인식한 순간부터 첫째, 나는 그것에 더 이상 자만할 필요가 없고, 자책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하나의 사실이며 행복이다. 나는 이 사실을 그 자체로 제시하며, 나 자신을 그러한 사람으로 자처한다. 둘째, 어떤 주제들이 동시에 내게 주어진다. 말하자면 비평가들이 쓰고 싶어하는 그런 주제들이 내게 주어진다. 그것들 중에 비누를 가장 먼저 예로 들 수 있다. 나는 내가 거기서 발견하는 것 이상을 찾지 않으며,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의도도, 부가적 야망도 없다. 특히 철학의 치유와 같은 야망도 없다. 나의 집에는 여유와 질서가 있고 빛이 난다. 거기서 모든 것은 질서, 아름다움, 질서, 사치, 조용함 그리고 쾌락일 뿐, 그러니까 부르조아지조차도, 그리고 내가 정돈할 수 있는 것, 쾌적하게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안락하게 할 수 있는 것, 윤낼 수 있는 것, 빛나게 할 수 있는 것, 그러니까 미소와 쾌락의 빛에 개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제시한다면 후회할 것이다. 독자여, 여러분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하찮은 주제를 손으로 잡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끝없이 거품을 내기 때문이다. 아니, 끝없이는 아니다. 확실히 비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비누가 자신에 대해 말한 모든 것. 아, 바흐나 모차르트가 나를 위해 그것을 음악으로 만들만큼 오래 살지 못했다니! 우리가 그들을 대신할 것이다. 끝없이? 그렇지 않다. 물론 비누에 대해서는 확실히 할 말이 많다, 바로 비누가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자신에 대해서 말한 것이 그것이다. 다행히도, 끝이 바로 거기다. 비누는 사라지고, 물은 그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탁해져 있고, 비눗방울은 터진다. 저자의 손은 주름져 있지만 아주 깨끗하다. 좋다. 내 의도에 완벽히 부합하는 것이 여기 있다. 그 정도면 내게 충분하다. 그리고 이미 충분할 것다. 당신은 내용과 형식의 일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비비는 행위 그 자체를 보자면, 그것은 단순한 잡기의 반복과 배가가 아닐까? 예를 들어 애무가 완전한 효과를 내서 마침내 특정한 신경의 변화에 이르게 하기 위해 반복되고 지속되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약간의 경련 혹은 오르가슴이다. 그것이 뭐든지 어떤 것의 성취의 조건이 되는 자기 고유의 기호의 생산 -- 그렇다! 그렇다!(외적인 것이든 이전의 것이든) 특정 이념에 따른 옮겨적기가 아니라 진실로 오르가슴으로, 한 존재의 오르가슴 같은 것으로, 말하자면 이미 그 자체로 관습적인 어떤 구조의 오르가슴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 아주 기쁘게 헌신해야 하는, 한마디로 자기 자신을 의미해야 하는 구조의 오르가슴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제 비누로 돌아가보자. 우리의 손을 무언가를 가지고 비비는 데로 그리고, 이를테면 수단을 이용하는 비비는 데로 돌아가보자. 이것은 더 이상(박수 치는 것 또는 비밀리에 손을 비비는 것같이) 결과로서, 혹은 획득된 결과의 표시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달성해야 할 결과를 얻기 위해 수행된다. 이 경우 청소 또는 표백을 위해 수행된다. 최대한의 결과물을 산출하도록 하기 위해, 또 최대한의 호의(예를 들어 연속적 침의 선물)를 얻기 위해 이 수단에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놀이이며 특별한 언어적 훈련이다. 이것이 '시'이다. 이것이 '도덕' 그 자체이다. 이 사색의 시점에서 '함께'라는 개념을, 그러니까 이 단어 자체를 과감하게 취해야 한다. 그것은 그러니까 비누가 사회 속으로 들어가는 것, 비누가 다른 것(존재 혹은 사물)과, 결국 다른 대상과 동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동행 덕분에 누구라도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고, 또 자신의 정체성을 비본질적인 자기로부터 떼어낼 수 있으며, 정체성의 때를 제거할 수 있고, 정체성의 그을음을 제거할 수 있지 않을까? 자기를 의미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대상기쁨 속에서 자기를 영원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우리들의 천국은, 요컨대, 타인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 이 책의 낙원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독자여, 여러분의 독서가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일 수 있겠는가?(여러분의 독서는 이 마지막 줄에서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여기에 둥글게 말린 책이 있다. 던져진 우리의 팽이, 궤도에 올려진 우리의 비누가 여기 있다. (그리고 발사를 위해 불이 붙은 모든 단들이나 연속적인 장들은 계획대로 망각될 진부한 표현의 장소인 대기권으로 이미 떨어졌을 수 있다.) - 이 책의 운명은 오로지 책의 기호들과 기호들의 실현매체와 같은 물리적 속성에만 종속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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