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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독서일기

by 참도깨비 2021. 10. 1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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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오래 전에 읽고 줄거리조차 가물가물했을 때 다른 책의 문장에서 다시 읽어야겠다는 강렬한 욕구 때문에 읽게 되기도 한다. 어쩌면 읽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 책에 대한 누군가의 물음 때문에 읽는지도 모를, 대부분의 책은 그렇게 기억에서 지워지기도 하는 것인데,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다시 읽은 이야기를 이렇다.

 

앤 카슨의 시집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을 읽다가 호기심이 갑자기 일어나서 단숨에 읽은 <폭풍의 언덕>. 소설과도 같은 앤 카슨의 장시 <유리 에세이>는 마음이 소금밭인데 어머니 집에 가야 하는 상황에서 에밀리 브론테 전집을 갖고 가면서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기 곁을 떠난 남자 로우를 생각하며,

 

그녀는 북부 황야에 산다.

그녀는 혼자 산다.

그곳에서 봄은 칼날처럼 펼쳐진다.

나는 온종일 기차를 타고 가고, 책도 잔뜩 챙겼다

 

몇 권은 어머니를 위해, 몇 권은 나를 위해

'에밀리 브론테 전집'도 포함해서.

그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

 

또는 가장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나는 그 두려움에 맞서 볼 생각이다.

어머니를 찾아갈 때마다 나는

에밀리 브론테로 변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를 둘러싼 내 쓸쓸한 삶은 황야 같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진창을 걷는 내 볼품없는 몸뚱이는 변화의 기운을 띠고 있으나

그건 부엌문 안으로 들어가면 사라지고 만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에밀리, 어던 고깃덩어리니?

 

<그녀> 중에서

 

앤 카슨은 이렇게 분절된 장시 속에서 에밀리 브론테를 꺼내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음이 소금밭일 때 책을 읽는 건 역설인 듯하다. 앤 카슨은 어머니를 관찰하면서 에밀리 책을 읽는다.  <폭풍의 언덕>의 문장들은 '마치 우리가 유리의 대기 속으로 끌려내려가기라도 한 듯하다./이따금씩 유리 위로 말이 자취를 남기며 지나간다./집 뒤쪽 부지에 세금이 붙었어. 좋은 멜론은 아니구나,' (<셋> 부분) 이런 식으로 엇갈리는 대화 속에서 <폭풍의 언덕>이 읽히고 있는 것이다. 앤 카슨의 눈으로 나이 들어가는 몸으로 집안 일을 하는 어머니의 귀 어두워져가는 일상을 지켜보며 나도 <폭풍의 언덕>을 읽은 것이다.

 

에밀리 브론테는 서른 살에 요절한 작가이자 시인이다. <폭풍의 언덕>은 그가 남긴 한 권의 소설이다. 그야말로 황량하고 슬프고 위축된 삶을 살았다. '에밀리는 평생 친구를 사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우리에게 말해주는 그녀의 언니 사이에는/날것 그대로의 작은 영혼이 지나다니는/공간이 하나 있다./그것은 깊은 용골 아래를 쇠바다제비처럼 스치듯/눈에 보이지 않게 지나간다'(<와처> 부분)에 나오듯 소설 주인공들도 '폭풍의 언덕' 사이에서 고난의 삶을 살아간다. <폭풍의 언덕>은 소설로서의 결함을 가진 채 태어난 작품이라고 평가받는다. '나는 멜로드라마적인 사람이 아니다./하지만 샬럿 브론테가 <폭풍의 언덕>을 두고 말했듯/영혼은 "거친 작업장에서 깎아 만든" 것이다.'(위의 시)에 나오듯 거침없이 깎아 만든 그 시절의 영혼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제인 에어>로 알려진 그의 언니 샬럿 브론테마저 "에밀리는 이러한 존재들을 만들어낸 뒤에도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라고 샬럿은 (히스클리프와 언쇼와 캐서린을 두고) 말한다./글쎄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포로가 될 수 있다./샬럿이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무자비했다"라고 결론 내리는 동안/전갈이 가볍게 도약해 우리의 왼쪽 무릎 위에 착지했다.//무자비하기는 에밀리가 위더링하다고 칭한 하이츠도 마찬가지인데/왜냐하면 그곳은 "상쾌한 바람이 통하고"/"절벽 위로 복풍이 불어오기" 때문이다.'(위의 시)

 

북풍이 불어오는 거친 들과 산으로 휘어잡힌 곳에 사는 히스클리프와 언쇼, 캐서린 집안의 갈등은 마치 운명의 바퀴처럼 얽힐 수밖에 없고, 그런 인물들은 에밀리 브론테의 페르소나처럼 폭발적이다. 두 집안 사람, 특히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으로 대표되는 그들의 생존 방식은 철저히 서로를 이용하는 것이다. '땅 아래 있는 영원한 바위와도 같아-/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거야"./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나는 햇빛이 흐릿해지고//오후의 공기가 날카로워졌음을 알아차린다./나는 뒤돌아서서 다시 황야를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캐서린과 히스클리프 같은 사람들을, 열암에 생겨났다가//굳으면 그 자리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서로 만나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작은 구멍들처럼/서로 붙여놓았다 떼어놓는//그런 명령이란 무엇인가? 그건 대체 어떤 종류의 필요성인가?/내가 마지막으로 로우를 본 것은 9월의 어느 검은 밤이었다.'(위의 시) 

 

이렇게 앤 카슨은 소설을 읽으며 자신의 시를 쓰는 것이다. 이렇게도 시를 쓸 수 있다니 새롭기만 하다. 두 집안의 운명이 '육신과 정신 사이에 맷돌바위의 표면처럼 넓게 퍼져 있으며/그러한 필요성이 저절로 맷돌에 갈려 생겨나는 장소/영혼은 내가 그날 밤새도록 지켜봤던 무엇이다./로우는 내 곁에 머물렀다.'(위의 시)에 이어지듯 영혼이 부서지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이 연옥이기도 했으니, 앤 카슨은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혹독하게 살아낸 자신의 몸 속에서 꺼낸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에밀리의 시를 빌려 말하면, '천당과 지옥 모두의 중심인 밤'을 보내고 떠난 로우의 이야기 속에서 다시 소설 속 인물들을 보는 방식으로 시가 되다니.

 

요즘 영화를 말하는 방식에서 스포 유출이 금기이듯이 <폭풍의 언덕>의 이야기는 심하게 축약될 수밖에 없다. 앤 카슨의 시를 통해 <폭풍의 언덕>을 격하게 읽고 싶었고, <폭풍의 언덕>을 읽게 된다면 앤 카슨의 시집을 격하게 읽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책읽기와 글쓰기 또한 권장할 만하다. 앤 카슨의 시를 통해 에밀리 브론테를 다시 읽으며,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인 사랑, 에드거와 이사벨을 향한 히스클리프의 잔인한 복수'로 요약되는 작품에서 야만에 가까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던 사람을 알게 되었으니, 문학의 또다른 정령안에 휘어잡혔다가 풀려난 아찔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음이 소금밭일 때 더욱 더 권장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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