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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살아나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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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도깨비 2021. 9. 3.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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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백봉초등학교 놀이터에서 

이야기로 살아나는 아이들

존 버닝햄의 『사계절』(시공주니어)이란 그림책이나 아메리칸 인디언의 서사시 『히어와서의 노래』(보림)를 보고 있으면 처음부터 시인이란 직업이 없었어도 저 땅과 하늘 사이에 넘쳐나던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하다. 세상 모든 사람이 시인이 되지 않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신비하고도 위대한 풍광들이 우리 둘레를 꽉 채우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태어나서 살고 죽는 그 긴 강물 소리 같은 흐름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빛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되물어 보면서.


우리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그림책을 보고 있노라면 어금니에 힘이 가고 나도 모르게 아랫턱이 얼얼해짐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저토록 아이들 속에 숨쉬는 꿈과 노래를 섬광처럼 옮겨놓을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삶은 아이들에게 쏠린 달무리 같기도 하고, 영원히 저 아이들다운 심성을 놓치고 아쉬워하고 돌아가고 싶은지 모든 말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둥글둥글한 아이들의 웃음이란.


"이끼와 골풀로 포근하게 자리를 깔고/순록의 힘줄로 단단하게 얽어 맨/참피나무 요람을 흔들었네"/"쉿 벌거숭이 곰이 듣겠다."/칭얼대는 아이를 달랬네/"에와-이와! 우리 꼬마 부엉이!/오두막을 밝히는 게 누구지/커다란 눈으로 오두막을 밝히는 게? 에와-이와! 우리 부엉이!"/노래 부르며 아이를 재웠네.(에와-이와는 아이를 달랠 때 쓰는 인디언 말로 자장 자장이라는 뜻) - 히어와서의 노래 중에서 -


시대와 삶의 둥지를 떠나 밥짓는 훈기처럼 떠돌았던 사람들의 심성이란 우리가 일찍이 가르치고 불러주어야 했던 시였음을 깨닫게 된다. 또 한약봉지 속 감초처럼 달착지근, 솔솔 퍼져드는 이야기 속에서 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좋은 그림책과 동화들은 바로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걸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꿀과 벌들의 관계처럼 이야기 집에 살았던 우리들이 빼앗겨버린 이야기들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묻고 있는 것이다.


아기를 재우면서 아는 자장가가 없어서 "잘자라 우리 아기 앞뜰과 뒷동산에…" 하다 보면 어느새 "자장자장 우리 아기"만 되풀이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턱턱 막히는 답답함. 할 수 없이 『자장 자장 엄마 품에』(한림)를 꺼내들고 가락을 탄다. 헤아리기 힘든 별무리를 보듯 풀려 나오는 말들의 보고가 자장가에 담겨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꽃들이 이어달리기를 하며 수놓는 뜰이며 봉창을 적시는 어둠과 바람의 따뜻함. 거꾸로 우리가 말을 갓 배우는 아이 같은 느낌이 들며 숙연해진다.


나비잠을 자는 아기를 한참 내려다보며 "요런 게 어디서 왔을꼬, 쭉쭉 커라 (다리를 만져주면서) 또 어디로 갈꼬?" 혼잣말을 해본다.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잠결에 헤죽거리며 웃는다. 저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쪽 풍경들을 이야기로 끌어 모으고 있지 않을까? 가끔 옹알이로 마음 속의 그림을 보여주고자 하겠지만 꼭 돌고래의 음파처럼 알아듣기 힘든 깊은 바다의 소리 같기도 하다.


이쯤에서 욕심을 내어 이 아기가 커서 축구공을 다룰 만한 나이가 됐을 때를 생각해 본다. 품안의 자식이라고 A급 태풍처럼 옆구리를 긁고 빗나갈 때가 되면? 결혼하고 바쁘다는 핑계에 부쩍 말수가 줄어든 부부 사이처럼 원치 않는 원성만 늘어간다면? 정말 이야기가 없다. 신문 한쪽에서 울궈낸 유머 시리즈를 기억해냈다가 이야기하는 정도로 몇 문장도 만들기 힘들다고 한다. 옛이야기에 이야기 못하는 사람이 도둑 쫓았다는 이야기처럼 "조기 조기 저 눈깔" 할 지도 모른다.    
실제로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어른들은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쳇바퀴로 말하면 하루를 보내며 서로 얼마를 달렸을까? 쉼없이 자기 혼자만의 지루하고도 쓸쓸한 길을 걸었을 것이다. 『난 곰인 채로 있고 싶은데』(비룡소)처럼 진정한 자기로 돌아가기 위한 우스꽝스럽고도 먼 길을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여러 개의 학원에 갇힌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부모의 성화에 교육열(?)에 마음을 다 빼앗긴 몸으로 아무런 불평 불만없이 안전 운행하는 곰들.


그래서 '속 시원히!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란 말의 참뜻이 통하지 않는 아이들. 사회 곳곳에 계몽성 말투만이 한 방향으로 화살처럼 겨눠져 있는, 건드리면 금방 폭발할 듯 도사리고 있는 덫들.


이제 아이들도 책 속에서 더 이상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책이란 펼치고 덮는 행위부터가 자유로운 삶의 연장인 것을, 책을 만나면 오그라들고 주눅들고 마구마구 집어삼켜야 할 음식 마냥 여기는, 그래서 자꾸만 이야기를 걸어오는 책 속의 주인공들한테서 멀어진다. 마음이 여리고도 괴짜인 아이에게 한 마디도 말의 못을 박고 돌아서는 것처럼. 게임과 만화와 텔레비전이 만든 미로와도 같은 길에서 만나 원없이 부딪히다 돌아오는 친구(?)처럼.


진정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야 할까. 자식농사로 치면 저 땅의 곡식과 과일들 마냥 빛나고 튼실해야 할텐데. 요즘같이 속도경쟁 시대에서 책은 자칫 재래식 무기 같기도 하다. 아니면 연장 들고 일어서는 의병(?) 자기들을 잃어버린 쭉정이의 삶. 사람 관계 속에 흐르는 이야기의 생명력이 없어지면서 최첨단 전자제품이나 보석 같은 것을 다투는 몰가치한 사회가 되고 말 것인지. 참 어른들의 대안 없는 생각들이라니. 『바다 건너 저 쪽』(보림)도 안 봤나?


어린이문학이라 일컫는 동화의 세계는 지금 혼돈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어른들과 아이들에게 사람의 길을 일러주고자 한다. 빛이 없는 세계. 까막 나라(말과 글에서부터 작은 생물에 이르기까지 어둠에 휩싸인)에서 온 삽사리가 가져다 준 영롱한 빛을 만날 수 있고,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켜주던 백두거인(『백두산 이야기』)의 웅혼한 기상을 만날 수 있다. 일찍이 자연과 얼크러지며 질긴 뿌리를 내려왔던 조상들의 삶을 옭아매려는 것들과 싸워 이긴 이야기 보따리(『우리 옛이야기 백 가지』(현암사),『옛이야기 보따리 열 권』(보리))를 만날 수 있다. 또 먼 이역 땅에서 더부살이하던 우리 아이의 슬프고도 아련한 『폭죽소리』(길벗어린이)를 들을 수 있는 곳. 저 땅 밑에서건 세월의 때가 잔뜩 묻은 땅 위에서건 조상들이 살고 비벼온 터전 위의 것들을 만날 수 있는 박물관(『내가 처음 가 본 박물관』(길벗어린이),『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창작과 비평사),『엄마, 아빠와 함께 떠나는 이색 박물관 여행』(두산동아),『차차차 부자의 고궁 답사기』(미래 M&B))에 들를 수 있는 곳.


이렇게 우리 것에서 입은 색과 빛의 옷을 입고 나가면 리네아를 따라 『모네의 정원에서』하루종일 보낼 수 있고,『꼬마 정원』을 만들고 『신기한 식물일기』(이상, 미래사)를 쓰고 싶어질 것이다.


평소에 자기 색깔을 가지고도 멋진 그림을 그리지 못했던 아이들의 든든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 『몽실 언니』(창작과 비평사)의 등에 업혀 『짱구네 고추밭 소동』(웅진)을 구경하고, 『똘배가 보고 온 달나라』(창작과 비평사)이야기를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분도)한테서 다시 듣고 나면,  말 많은 밉상이다가 똑똑해 보이는 생쥐에게 정이 가고 멀리 영국에서 온 『찔레꽃 울타리』(마루벌)에 모여 사는 들쥐 가족들을 기꺼이 맞아들이게 되리라. 또 『너하고 안 놀아』(창작과 비평사)하고 당당하게 말할 줄 아는 노마와 똘똘이, 영이, 기동이까지 함께 놀이에 빠져 놀다 보면 『구리와 구라랑 놀자』(한림)하고 불러서 '빵 만들고, 헤엄치다' 보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리 없을 것이다.


이 땅의 어른들은 하루 빨리 아이 책을 읽으면 아이 마음이 보이고, 아이들 말과 목소리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말을 믿어야 한다. 설령 아이들이 『나무늘보야 헤엄쳐』(마루벌)에 나오는 나무늘보처럼 당신들의 호된 꾸지람에도 느려터졌다고 하지 말고 『우리 할아버지』(비룡소)처럼 대화에 힘써야 한다. 『노아의 방주를 탄 동물들』(사계절)을 헤아리는 식견으로 아이들과 『비오는 날의 소풍』(시공주니어)을 떠날 수 있어야 하고, 아이들이란 『엄마가 알을 낳았대』(보림)처럼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가는 것을 눈뜨고 못보며 『말썽꾸러기를 위한 바른 생활 그림책』(보림)같이 엉뚱하고도 재미있는 교과서를 원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때론『눈사람 아저씨』(마루벌)의 침묵을 배울 줄 알고 아주 오랫동안(길어봐야 몇 년?)『괴물들이 사는 나라』(시공사)로 항해해 갈 수 있으며 『엉뚱이 소피의 못말리는 패션』(비룡소)에서의 변덕을 눈감아 줄 수 있어야 한다. 또 말 못하는 것들이란 세상에 없다는 철학을 이미 깨우친 아이들의 버릇쯤은 도리언 의사처럼 (『우정의 거미줄』(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온 샬롯트란 거미가 들려준, 자기 사촌 이야기를 들은 펀이라는 여자 아이의 말을 터무니없다고 가로막다가 결국 의사 선생님을 찾게 되는데 그 때 하는 말이다.) "동물들이 말하는 소리를 나는 들어 본 적이 없지만 그건 아무런 증거가 되진 못하지요. 어쩌면 어떤 동물들이 나에게 예의바르게 말을 걸어왔는데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못 들었는지도 모르지요.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훨씬 더 주의를 집중할 수 있습니다. 펀이 주커만 농장의 동물들이 말을 한다고 이야기한다면, 나로서는 그 애를 믿고 싶습니다. 아마도 사람이 말을 덜하면 동물들이 더 많은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지껄여대는 수다쟁이들이니까… 그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는 대체로 이렇습니다," 하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지켜봐 주는 것도 도량 깊은 일일 것이다.


자, 지금부터 아이들을 『세상에서 가장 큰 아이』(비룡소)로 키우고 싶다면 『부엉이와 보름달』(시공사)을 보러 나가세요. 『아빠, 책 읽어주세요』(한국프뢰벨)란 말에 기꺼이 무릎을 가까이 하시고, 아이들의 『숲 속에서』(시공주니어)『영혼의 새』(비룡소)를 만나 아이들에게 들려주세요. 그러면 아이들은 당근처럼(?)『아빠가 되고 싶어요』(사계절)하고 곰곰히 생각할 것이다. 장 샤를처럼 『거저먹기 외국어』(비룡소)를 배울 수 있도록 알찬 생각이 톡톡 튀는 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 하시고, 힘들어 할 때는 『사자왕 형제의 모험』(창작과 비평사)을 다녀오게 하거나 『악어클럽』(창작과 비평사)에 들어 갈 수 있도록 하세요. 아이들은 도토리처럼 수천 수만의 도토리를 지닌 채 큰 나무로 가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아름드리)을 영원히 기억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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