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동시란 무엇일까?

자료실

by 참도깨비 2021. 9. 3. 09:16

본문

 동시란 무엇인가?                  


                                                         
'아이들 마음이 되어 노래하듯이 짧게 쓴 시'에 붙는 동시란 말에는 어딘지 아이들 삶과는 동떨어진 저 너머의 냄새가 난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내 속으로 낳을까?" 싶고,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란 말을 듣는 아이들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아이들이 아이들다운 본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동시마저 그냥 두지 않는다. 어쩌면 고구마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줄기만을 물병에 키우는 일과 같은 지도 모른다. 모든 게 어른들의 선택과 생각에 의해 움직이게 되어버린 세상에서 동시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많은 아이들이 어른이 쓴 동시의 틀에 맞추어 거짓말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동시를 써서 아이들에게 읽히고 아이들을 그 순수한(?) 세상으로 이끈다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싹을 키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요즘 아이들이 쓰는 동시 거의가 오염이 되어버렸다. 1학년 아이의 동시나 6학년 아이의 시가 비슷하다 못해 한 아이의 글처럼 되어버렸다. 노래의 참 맛을 느끼지 못하는 데다가 아무리 '노래하듯이' 쓰라 한다고 어깨가 들썩거리는 참다운 재미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오덕 선생님의 시 교육 목표를 생각하면 더 동떨어진 곳에 동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일상의 삶에서 비뚤어지고 오염된 마음을 순화시킨다. 혹은 사람의 정신을 더 높은 경지로 고양시킨다.
둘째, 시적인 직감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붙잡는다.
셋째, 참된 삶을 인식하고, 인간스런 삶의 태도를 갖는다.
넷째, 진정이 들어 있는 말, 진실이 꽉 찬 말, 정직한 말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그런 말을 쓴다.
다섯째,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갖는다.

무엇보다 사람, 인간됨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적 일과 놀이가 뒤섞인 삶에서 터져 나오던 노래들을 보면 굳이 교육 목표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아무리 간단한 것이라도 아이들 생활을 그대로 담고 있었고, 놀이 없이는 노래를 생각할 수 없었고, 노래 없이는 놀이를 생각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 놀다가 싸우며 "일러라 찔러라/너네 할아버지 제사 때/고기 한 점 줬나" 하고 욕소리를 해도 그것이 노래가 되었다. 말 그 자체가 노래가 되고 노래 자체가 놀이가 되었다. 하늘과 땅, 동물과 식물들이 어우러진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어 온갖 신경을 집중시켜 놀이로 만들고 노래로  만들 줄 알았던 것이다. 자신의 감각과 감정이 풍부한 만큼 창의성도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의 영역은 바로 그런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달팽이가 더듬이를 내밀면 달팽이가 자기와 춤을 추자는 뜻으로 받아들여 "영감 영감 장구쳐라/할맘 할맘 춤추어라"하고 노래하고, 잠자리가 날아오면 "잠잘아 잠잘아/새끼줄 줄게/잘 잡아라"하고 노래 부르면 잠자리를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발견은 길을 가면서도 이루어지고 잠을 자면서도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요즘 아이들이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하는 창작동요를 부르는 것과 옛 아이들이 "비야 비야 오지 마라/우리 누나 시집간다"하는 노래는 생활 정서면에서나 우리의 자연, 문화, 풍토, 사회구조를 놓고 볼 때에도 눈에 띄게 차이가 난다.
다시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동시의 영역으로 나와서 생각하면 동시란 어른인 시인 자신의 세계를 온몸으로 쓴 것이 아이들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시로 되는 것이 바람직하고 했다. 이러한 시가 되려면 살아있는 아이들의 세계, 현실에 대한 시인의 깊은 관심과 이해가 앞서야 하고, 시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시란 느낌이 들지 않고 치졸한 모방과 말재주를 가르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동시가 아이들을 위한 어른의 유희적인 취미물이 되고 있다. 젖을 빨거나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들이 독자가 될 수 없는데 거의 모든 동시가 그것을 부를 수도, 즐길 수도 없고, 시로 느낄 수도 없는 아기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은 그 아기들의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흥취를 위한 것이 되어버렸다. 한 마디로 아이들이 자라면서 보고 배우는 그 때 그 순간의 감동을 어린 아이의 상태가 되어 흉내를 낸다고 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은 곧 어른들의 문학관을 섣불리 모방하거나 그대로 답습해서는 안 된다는 말과 같다. "도저히 성인 작가로서는 그렇게 보고 느낄 수 없는 작품 세계, 그것은 아동 작가의 연령적인 센스에서만 파악될 수 있는 독특한 세계가 순수한 아동문학의 전제 조건" (백철) 이라고 한 말을 곱씹어 보면 알 수 있다. 아이들만이 파악할 수 있는 세계를 어떻게 해서 성인작가들이 창조하는 문학에서 본받을 수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아이들의 시와 어른들의 문학작품은 어디까지나 구별되어야 한다. 서로에게 집착하다 보면 오히려 위험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시란 아이들만을 위한 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아이들 세계에 공감을 가지는 모든 어른들이 함께 읽게 되는 것이어햐 한다.    

얘,
새를 어떻게 접는지
가르쳐 주지 않으련

내 그림자로
새를 접어
하늘 높이 날고 싶어

  - ○○○ <날고 싶은 나무>

발 시려운
나무들이
겨우내
땅강아지가 뜬
털양말을 신고 있구나

   - ○○○ <겨울나무>

위의 시들을 보면서 아이들의 말로 썼지만 어른의 세계가 되고 있거나 아이들이 알 수 없는 말재주만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아이의 세계와 말을 빌어 자기를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정신세계? 이런 시는 도피, 퇴행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대부분의 어른 동시들이 다루고 있는 것이 아이들의 유희 세계를 다루고 있다. 다음이 자연풍경이고, 작가 자신의 관념 세계가 되고 있다. 관념 세계에 파묻혀 있는 동시인 중에는 역사의 껍질이나 유적에 별난 관심이 많거나 목가적인 농촌을 그리는 취미에 빠져있거나, 또는 "빛"이라든가, "나무"라든가 하는 것에 어떤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캐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아이들의 세계와 어울릴 수 없는 어른들의 정신보다는 진정으로 동시의 세계를 넓히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것은 아이들의 세계에 머물기보다는 아이들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놓는 것이다. 혹은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시인의 세계에서 다시 질서를 세우고 의미를 붙여놓은 세계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가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쉬운 말로 쓰고, 지나친 생략이나 비약적 표현을 피해야 하고, 지나친 은유법을 쓰지 않으며, 실감나지 않는 공허한 말을 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동시를 쓰는 시인은 아이들인 척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주 아이들이 되어버린 상테에서는 시가 될 수 없다. 여기에 동시의 어려움이 있다. 자칫하면 어린이의 흉내에 그치고, 아니면 어른의 넋두리로 되고 만다. 실제로 50년대까지의 동요가 아이들의 유희 세계였고, 60년대 이후에는 자신의 취미로 머물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어린아이가 된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세계관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와 반대로 시인이 아동을 이해하고 아동의 세계를 깊이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는 시인이 아이들에게 주기 위해 쓰는 시다. 아이들이 쓰는 시는 제대로 된 아이들의 영역으로 대접받는 아이들 '시'로 자리잡아야 한다. 동시는 먼저 시가 되어야 하고 그 위에 다시 동시로 되어야 한다. 동시의 세계는 현실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눈과 마음으로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세계여야 할 것이지, 결코 시인의 머리에서 짜낸 관념과 공상, 장난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럼 여기서 1,2학년때부터 동시를 달달 외우고 교과서에 나온 동시들을 모든 동시의 표본이라고 배운 4학년 아이들의 동시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자.
       
내 마음에 동시는 나비들이 날아다니듯 예쁘고 순수한 것으로 남아있다. 학교에서 동시를 쓸 때마다 이런 생각을 먼저 하고 쓴다. 그러다 보니 내 생활이나 다른 사람들 이야기처럼 범위를 넓혀서 쓰기보다는 '나비, 꽃, 벌, 무지개, 강아지, 착한 사람들' 같은 내용으로 쓰게 된다. '꽃이 있어 나비가 펄럭펄럭 날아온다' 하거나, '예쁜 나비와 벌들이 날아와 무지개를 만든다'는 식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이어지다 보면 금방 쓸거리가 없어진다. 그때는 다시 '나비가 꽃으로 펄럭펄럭 날아간다'는 식으로 바꿔서 쓰게 된다. 같은 분위기의 시가 계속 반복이 된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배운 '자기 마음을 순수하게 나타난다'는 말을 동시를 지을 때 그대로 써먹는다. 그런데 내 마음이 항상 순수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다 쓰기엔 문제가 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써보고 싶은 걸 못 쓰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친구 관계나 가족관계, 생활문제들에 대해 써보고 싶지만 그걸 쓰면 시가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박소희>    

                       *************************                  

동시 소리만 나오면 머리가 아프다. 지금까지 많이 쓰긴 했지만 다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같은 말도 다른 말로 바꿔서 쓰다보니 비슷한 시가 나오게 된다. 지금은 동시에 대해서 선생님도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쓸 기회는 물론 생각할 겨를도 없다. 쓰기 책에서 동시를 쓰라는 쪽이 나오면 전에 썼던 것을 말만 바꿔서 다시 쓰게 된다.
3학년 때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하자면 동시란 앞에는 반복해서 쓰면 되고 자주 쓰다 보면 된다고 했기 때문에 잘 몰랐다. 그리고 시를 써서 내면 장원, 준장원,  , 수로 표시해줄 뿐 딱 배웠다고 할만한 게 없다. 그래서 동시란 소리만 들으면 '아우' 하는 소리만 나온다. 또 꽃이나 나무를 봤을 때도 '저걸 시로 쓰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 마음놓고 못 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먼저 시를 쓰라고 하는 시간에 쫒겨서 쓰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다보니 자세히 보고 마음 속에 느낄 힘이 없다. 머릿속에 써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미리 준비해놓은 꾸밈말들만 베끼게 된다.
이런 걸 다 죽여야만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어지은>

                       *******************************

3학년 때 '아침자습'이란 제목으로 동시를 쓰고 나서 지금까지 써보지 못했다. 쓸 기회는 많았는데 일부러 쓰지 않았다. '동시' 하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재미가 없어서 한 번도 쓰지 않고 지나갔다. 어딜 가서도 보고 느낄 시간이 없고 관심있게 쳐다보면서 관찰하거나 느끼려고 한 적도 없는 것 같다. <유은지>

                       *******************************

 2학년 때 무궁화와 태극기에 대해서 동시를 쓴 적이 있다. 학교에서 동시를 몇 번 썼는데 내가 글을 만든다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집에 와서 많이 쓰게 되었다. 그 때 썼던 것이 지금까지 썼던 것보다 훨씬 많을 정도였다. 하루에 두 세편씩 썼으니까.
무궁화와 태극기는 내가 쓴 동시 중에서 제일 못 쓴 시라서 생각이 난다. "무궁화 무궁화 우리 나라 꽃" 하는 노래를 조금 바꾸고 덧붙여서 쓰니까 뒤죽박죽이 되버렸다. 읽어보면 노래 같지도 않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 다음에 썼던 것 중에서 가장 잘 썼다고 생각하는 것은 <날씨>라는 동시였는데, "겨울에는 여름잠을 자던 난로와 온풍기가 깨어나고/여름에는 겨울잠 자던 선풍기와 에어콘이 깨어난다"는 식으로 썼다. 처음에는 겨울잠을 자는 동물에 대해서 쓰려고 하다가 항상 동물들만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기계 같은 것도 쓰지 않는 동안은 잠을 자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 끝에 쓰게 되었다. 보통 학교에서 쓰듯이 주제에 맞춰서 쓴 것이 아니라서 내가 생각한 것을 마음껏 썼던 것 같다.
또 3학년 때 "우리 몸 속에는 감기란 세균이 살고 있어요/독감주사 독감주사 맞으면 세균이 다 죽어요" 하는 <감기>라는 친구 동시를 봤을 때 공부 시간에도 속으로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동시란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느낌을 마음에 담아서 쓰는 것이다.
그런데 클수록 사는 환경이 달라지고 학교에서 동시를 쓰는 시간이 별로 없다보니 멀어지는 것 같다. 까치가 전봇대에 집을 지을 때나 깡패를 만났을 때의 떨리는 속마음 같은 것을 그 때 그 때 글로 남기고 싶지만 엄마가 "학원 가라!", "숙제 해라!" 는 소리에 사라지고 말 때가 많다. 때론 귀찮아서 안 쓸 때가 있지만 앞으로는 틈틈이 수첩 같은 데에 적어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최웅>    

                      ********************************

점심을 먹고 교실에 오니까 선생님이 날 부르셨다.
"현주야, 내일까지 이 종이에다 오늘 낮에 쓴 동시를 써와." 하고 말씀하셨다.
종이에는 컴퓨터로 뽑은 그림과 함께 줄이 쳐져 있었다.
솔직히 그 시를 쓰면서도 내가 직접 느낀 것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짜맞춘 것이기 때문에 별로 만족하지 못했는데 그걸 옮겨오라고 하니까 부끄럽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
처음에 봄에 대해서 쓰라고 했을 때 짜맞춰야겠다는 생각 먼저 들었다.
"동시는 무조건 노래하는 듯이 부드럽고 한 연마다 행 수도 맞춰야 하고 글자 수도 맞춰야 한다. 그리고 줄글은 무조건 딱딱한 것이니까 잘 생각해서 쓰도록."
선생님은 "흰나비가 떠가는 꽃잎 위에 사뿐 앉았다/흰나비와 꽃잎은 즐거운 여행을 한다"는 식의 교과서 동시를 예시로 보여주시면서 그런 식으로 쓰라고 하셨다. 처음엔 잘 써보려고 했는데 그런 식으로 쓰라고 하니까 꾀가 생겨서 짜맞출 생각만 하게 되었다. 또 봄에 대해서 느낄 시간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써야 할 지 몰랐다.
그래서 "졸졸졸 시냇물 노래하며 흘러가고/아이들은 봄노래를 즐겁게 부른다"는 식으로 단숨에 써버렸다. 쓰고 보니 만족하지는 못했지만 빨리 써서 편했다.
처음부터 쓰고 싶은 것이 있었다. 증평집 텃밭에 심어놓은 배나무에 난 싹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배나무에 싹이 났네/아주 아주 예쁘네" 하는 식으로 교과서 동시와 비슷하게 나와버려서 짜맞춘거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문학교실에 가서 그 때의 생각을 잘 살려보니 꼭 노래하듯이 쓸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가 느낀 것을 그대로 나타내다보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정현주>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