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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빠가 이해를 못 해서 그런 거죠

도깨비 일기

by 참도깨비 2021. 9. 6.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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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밥상에도 때아닌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그 시작은 일곱살 먹은 한울이 때문이다. 점심에 할머니와 시장에서 좋아하는 닭백숙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는 한울이, 밥 한그릇이 벅차다며 덜어낸다고 하는 걸 그러라고 해놓고 난 다음부터 시작되었다.
밥숟갈에 우엉무침을 얹어주었더니 싫단다.

 

"이거 맛 없어요"
"골고루 먹어야지. 맛있는 것만 골라 먹으면 몸이 튼튼해지지 않지"
그래도 맛없는 건 못 먹겠다고 좋아하는 김치만 뒤적거린다.
"그렇게 편식하면 1학년 운동회 때 달리기 1등 못하지"
씩씩해지려면 골고루 먹어야한다는 뜻으로 한다는 말이 1등 하려면 골고루 먹어야 한다는 말로 어긋나버렸다.

 

"그럼, 저번에 1등은 한 것은 뭔데요?"
올해 운동회 달리기에서 1등 한 것을 커다란 자부심으로 여기는 한울이로서는 당연한 말이다.
그때 이후로 1등은 한울이에게 자랑거리여서 늘 팽이싸움이나 완력에서 질 수밖에 없는 앞집 친구 영우한테 이겼다는 또다른 자부심이 된 것이다.

 

자세하게 그때 현장을 중계해 보면 초고속카메라에나 잡히는 결이 있다. 다섯 명이 달리는 틈바구니에 가장 유력한 경쟁상대는 영우였고, 할머니 욕심에 영우한테 좀 살살 달리라고 한 모양인데 이제 와서 영우가 그런 말을 한울이한테 털어놓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때의 1등이 결승선에서 할머니의 열렬한 눈총에 주눅이 들어 마지막 한 뼘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지게 된 한울이에게 할머니는,

 

"어디 영우가 내가 그런다고 할 녀석이냐?"
하고 한울이의 1등에 한 치의 의심을 가질 만한 구석이 없다고 공언했고, 그 뒤로 다시 찾은 1등의 영광을 누리고 있던 것이었는데.
"그러니까 이제 1학년에 되면 다들 형아가 되었으니 더 열심히 먹고 힘을 기를 거 아냐. 그러니까 골고루 막고 튼튼해져야 한다는 말이지. 그러려면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먹어야지"
그 말에 한울이가 조금 마음이 움직였는지 꼬막도 먹고 우엉에 김치, 찌개에서 건진 대구살을 골고루 먹게 되었는데, 그걸 옆에서 "그러게 그러니까 힘이 없지" "아무리 빨라도 민첩성이 떨어지면 1등 못하지" 하는 식으로 훈수 아닌 훈수를 두던 한길이 형아에게도 불똥이 날아갔다.
"자 봐요. 이렇게 잘 달리는데"
변함없는 달리기 1등주의자 한울이 밥 먹다가 일어나 거실을 뛰면서 제2라운드로 넘어가면서 말이다.
"1학년이 되면 더 힘센 녀석들이 나오니까 더 연습하고 먹는 것도 잘 먹어야 해. 한길이 형 봐라. 4학년에는 1등 했는데 5학년이 되니까 더 센 아이들이 나와서 3등인가 했잖아"

 

그게 다 골고루 먹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찍어다 붙인다고 한 말이다. 그리고 한울이가 다시 확인하듯이 몇 등 했냐고 물었고, 한길이가 4등 했다 왜 어쩔래 하며 쏘아붙이면서 토론이 시작된 것이다.
"억울해요. 한울이는 그냥 직선으로 달리는데 우리는 둥그런 트랙을 달리는데 선생님이 라인을 지키라고 해서, 어, 어, 불공평해요"

 

100미터가 채 안되는 운동장이다보니 저학년까지는 그렇다치고 고학년부터는 트랙 중간에서 달려 굽은 곳을 달려 다시 직선으로 결승선까지 달리는 방식을 쓴다는 것 때문에 불만이 터진 것이다.
문제는 그 달리기 방식이 까다롭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텔레비전에서,에,에 하는 것처럼 하지 않으면 바깥선에 선 사람만 불리하잖아요"
200미터, 400미터 달리기에서 자기 라인을 벗어나면 안 되는 규칙 때문에 바깥부터 안쪽까지 조금씩 차이를 두고 달리는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건 자기 라인을 벗어나면 안 되는 트랙경기에서나 그런 것이지"
"그게 아니고요"

 

성질 급한 한길이가 풀쩍 뛰며 나뒹굴어진다.
"천천히 말해. 그렇게 뒤로 넘어지면 100분 토론은 어떻게 하겠냐?"
"그게 아니고요. 내 말은 이렇게 트랙이 있잖아요. 그런데 똑같이 섰는데 어떻게 라인을 지켜요"
"알았어, 먼저 밥 먹고 이야기하자"
"밥 먹고는 시간 없어요. 그러니까"
답답했는지 한길이가 방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한다.
"그러니까 내 말은 1번, 2번, 3번 이렇게 달리는데  둥그런 구간을 돌다가 직선이 되는 구간까지 자기 라인을 지키라고 하잖아요"
종이까지 가져와서 진짜 운동장마냥 트랙을 그렸다.
"자, 봐. 이렇게 라인이 있을 거 아니야"
몇 개의 라인을 그려놓고 다시 설명을 했다.
"200미터나 400미터에서 이런 라인을 달리려면 바깥쪽이 불리하니까 대각선으로 달리는 게 맞는데 너네 운동회때는 처음에는 자기 라인에 섰더라도 출발하면 서로 안쪽 라인을 파고들어야만 하는 거잖아. 장거리 달리기 때도 그렇잖아"
"그게 아니고요. 아빠가 이해를 못하니까 그렇죠"

 

한길이가 또 뒤집어진다.
"그렇게 이해를 못한다고 그럴 때마다 뒤집어지면 어떻게 토론을 하겠냐, 천천히 설득해가면 풀어가야지"
"그게 아니고, 이렇게 굽어진 데를 달리다가 직선이 되는 곳에서도 라인을 지키라고 하니까 문제죠"
"그런 게 어디 있어. 쇼트트랙도 처음에 자기 라인에서 시작하지만 누가 빨리 안쪽 라인을 파고드냐에 따라 승부가 나잖아"
"아이고 그게 아니고요"
그러면서 한길이가 그림을 그린 데다 직선주로를 출발하여 굽은 주로를 달리고 다시 직선이 시작되는 지점까지도 라인을 지켜야 한다고 하니까 그렇죠"
그림을 그려가면서까지 이야기하는 한길이 말에 의하면 이상한 규칙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이었다.
"아니, 그때 운동회때 보니까 아닌 것 같던데"
"그게 아니라니까요. 선생님이 직선주로 시작될 때까지 지키라고 했다니까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선수들이 뛰는 트랙이 아니고 먼지 날리는 학교운동장에 뱅 둘러 라인을 그려놓은 것도 아닌데 직선주로가 시작되는 지점까지 라인을 지키라는 것은 문제가 있어보였다.
"그런게 어딨어. 그렇다면 선생님이 잘못이지"
현장검증을 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었다. 라인 바깥에서 달린 한길이로서는 굽은 주로에서 벌써 뒤떨어져버린 꼴인데, 이건 보나마나한 시합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니가 조목조목 이야기하지 않고 뒤로 뒤집어지니까 그런 거지"
"아빠가 못 알아들었잖아요"
"맞아요, 그건 아빠가 이해를 못해서 그런 거예요"
 한울이가 토론 사회자마냥 나서며 말하는 바람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저게 형 편을 드네"

 

태연하게 형의 손을 들어주듯 나서는 한울이 때문에 할머니까지 거들고 나섰다.
"아니에요. 그건 아빠가 이해를 못해서 그런 거라니까요"
맞다. 한길이가 처음부터 말하려는 것은 트랙경기장에만 라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운동장 트랙에도 뛸수록 뒤쳐지는 라인을 지키라는 규칙이었다. 나야 당연히 그려지지 않은 라인 때문에 그런 규칙은 없다고 말한 것이지만 한길이한테는 선생님이 정한 그런 규칙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라인을 지키다가 직선주로에서 아무리 따라잡으려고 해도 안 됐다는 그 말이었다.
그걸 냉철하게 재판하듯 말해준 한울이의 말에 적잖이 놀란 것이고 설익은 토론은 끝났다. 거기에 '운동을 안 해서 몸이 불어서 그렇지' 하고 섣부른 말을 해봐야 소용이 없는 일, 문제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 이상한 규칙 때문이었던 것이다. 성질 급한 한길이는 그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쇼트트랙이다 200미터다 해서 라인만 그려대는 내가 답답했던 것 때문에 이상한 토론이 되버린 것이었다.
"맞다니까요. 그건 아빠가 이해를 못 해서 그런 거라고요"
한울이의 말이 귀에 계속 쟁쟁거린다.

 

2009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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