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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직업이 뭐예요?

도깨비 일기

by 참도깨비 2021. 9. 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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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3학년이 된 한울이가 가족조사서를 들고 왔다.
어릴 적에 "집에 텔레비전 있는 사람 손 들어!" "자가용 있는 사람?" 하며 어린 마음을 벌집 쑤셔놓듯 하고 지나갔던 문건을 보니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이 더 많았던 시절 촌구석에서 가물에 콩나듯 텔레비전에 단독주택란에 표시를 할 정도면 원기소 냄새 나는 것만 같았다.  


그런 이야기를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어디보자, 하고 살펴보려는데 벌써 깨알같이 써버렸다. 주소며 전화번호, 가족관계를 다 적고나서 하는 말이 아주 간단하다.
"엄마 직업은 뭐죠?"
"엄마야 공무원이지."
2학년 때인가는 구체적으로 적으라고 해서 황당했지만 이 정도는 봐줄 만하다.
"그럼 할아버지는요?"
나는 빼놓고 할아버지로 건너 뛰기에 들여다보니 엄마부터 죽 적어내려가서 할아버지, 할머니에서 끝이 났다. 순서랄 것도 없지만 왠지 자기 친밀도 순으로 해놓은 것 같다.
"할아버지는 시장에서 장사하시잖아."
"봉지 장사?"
내일모레가 여든인데 오토바이를 타고 비닐봉지 장사하는 거야 한울이도 아는 것이지만 새삼 직업이라고 하니 헛갈리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뭐라고 썼는데?"
그동안 참도깨비어린도서관장이라고 썼더랬는데 칸이 좁기도 한데다 퍼주는 작은도서관 관장이 무슨 직업에나 속하는지 자못 자책하며 보는데 이 녀석봐라.
"시인"

 

순간 감동 반 부끄러움 반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빼도박도 못하고 시인이 직업이 되어버렸다는게 기쁜 일인지 어쩐지 낯설기만 했다. 아무튼 아들이 시인이라니 시인인 거지 뭐, 하며 고맙게 받아들이고 나니 이번에는 할아버지 직업란에 연필을 뱅뱅 돌리며 재차 묻는다.
"야, 그렇다고 봉다리장사라고 쓰면 어떡하냐?"
진짜 봉다리장사라고 써놓아서 기가 막혔다. 다행히 연필로 써서 지우개로 지우라고 했다. 그냥 안 써도 되는데 굳이 쓰겠다고 하니 말릴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대로 지켜보기로 했다.
"다 썼다."
형이야 당연히 학생이라고 썼고, 응응 어디 보자, 하고 보는데 뒤로 넘어지는 줄 알았다.
할아버지 직업란에는 글쎄,
"장사꾼"

 

이렇게 쓰여있지 않은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장사꾼이 뭐냐?"
갑자기 어머니가 갓 시집와서 보따리 장사할 무렵 이야기가 떠올랐다. 장사꾼이란 말에서 군냄새 비슷한 것이 물신 풍겨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100프로 벌꿀도 아닌 일종의 가짜꿀을 팔러다니실 때를 떠올리며 그때는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가짜꿀도 팔았다시며 장사꾼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했던 것 때문이다.
이 녀석은 장사꾼을 장사꾼이라 했는데 뭐가 이상하느냐는 듯 쳐다보고만 있다.
"야, 할아버지 보시면 서운해 하시니까 얼른 바꿔."
"뭐라고요?"
"좋은 말 있잖아."
"네?"
"상업!"

 

말해놓고도 웃음이 나왔다. 저만 했을 때 나도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버지 직업란에 상업이라고 썼지. 상업이란 말,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상업인 것인가. 고등학교 때 배웠던 그 상업인가?
그냥 장사가 나을까? 고민해봐도 어울리지 않는다.
상업이라고 고쳐 쓰고 나니 집에서 쉬셔야 할 나이에 상업,아니 거리의 사람들에게는 장사꾼 소리를 들어가며 고단한 삶을 사시는 아버지에게 한없이 죄송스럽기만 하다.
이 녀석은 이런 마음을 알까?
그런 것 같지 않다. 시인이라고 맬롱맬롱하게 써놓았듯이 오히려 장사꾼이 맞는데, 하며 왼고개를 틀며 가족조사서를 정리하고 있다.
이 녀석 꿈은 슈퍼를 하는 것이란다. 꿈이라기에 한 수 놓을까 하다가 에휴, 하고 쩜쩜쩜 하고 말았다.  

 

2012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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