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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봐도 자랑스러워요

도깨비 일기

by 참도깨비 2021. 9. 6.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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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양귀비

"내가 왜 거기에 가야 해요?"
 오랜만에 꺼내는 이 이야기는 하마터면 너무 짧게 끝날 뻔했다.
"으이구. 그래, 그럼 집에 있어." 하고 말했으면 책 표지를 펼치기도 전에 끝나버렸을 이야기다.
몇 번을 설득하고 기다려준 덕분에 몇 장은 나가다가 끝났을 지도 모른다.

 

때는 바야흐로 쉬는 토요일 점심 무렵. 중딩 한길이는 친구들과 농구 하러 간다고 일찍 점심 차려 먹고 가고 한울이와 둘만 남았다. 아내는 연일 야근에 출근하고 어머니는 계모임에서 제주도 가시고 없기에 둘이 점심을 해결해야 하는 날이다. 마침 점심때 아는 이 결혼식이 있어서 부조도 하고 점심도 먹으면 됐다 싶어서 한울이에게 의견을 물었다.
"내가 왜 거기에 가야 해요?"
이제 어딜 함께가는 걸 싫어하는 한울이바저 냉랭하게 자기 의견을 내놓는다. 문제의 첫 대목이다.
"혼자서 점심 먹으려면 그러니까 결혼식 가서 네가 좋아하는 뷔페에서 먹으면 되잖아."
"싫어요. 뷔페는 맛 없을 게 뻔해요."
어디까지나 안 가기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다는 걸 알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설득을 계속했다.
"거긴 새로 생긴 곳이라 아주 맛 있을 거야."
"누구 결혼식인데요?"
"아는 사람이라니까. 꼭 가야 하거든."
"그러니까 내가 왜 가야 하냐니까요."
다시 도돌이표를 그려야 할 것 같아 슬슬 짜증이 나려고 했지만 참았다.
아무튼 그렇게 설득해서 함께 길을 나섰다. 아내가 차를 갖고 출근했기에 버스를 타려다가 시간이 촉박해서 택시를 타고 결혼식장에 갔다.
"인사 해."
"인사 해."
아는 이 결혼식이라 결혼하는 당사자나 하객들에게 고개를 연신 수그려야 하니 이 녀석도 뻘쭘한 모양이다.
아무튼 기나긴 결혼식을 잘 버텨내고 식당으로 가서 먹고 싶을 것을 잘 골라서 배부르게 먹었으니 여기까지는 시시한 객담으로 들어주시길.

결혼식장을 나오니 바람에 가로수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다. 결혼식의 주례를 보신 교수님이 가을 날씨를 즐길 겸 가까운 집까지 걸어가시겠다고 하셔서 반대 방향으로 버스를 타려니 한울이가 하는 말이 가관이다.
"우리 집까지 걸어갈까요?"
건너편 버스 정류장으로 가려던 마음이 쑥 들어간다. 아니 데이트 신청을 받은 것처럼 설렌다. 요즘 무릎 상태가 좋지 않아 차마 걸어가자는 말은 못했는데 까칠한 이 녀석이 그렇게 말해주니 신이 났다.
"그래, 좋지."
손을 잡고 육거리 시장 쪽으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집까지는 거의 10킬로가 넘을 텐데, 알고는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가다가 배고프면 사 먹고요."
"그럼, 당연하지. 군것질도 하고 구경도 하면서."

 

육거리 시장으로 접어든다. 손을 꼭 잡고 걸으니 낙엽들마저 단풍 박수를 쳐주는 것 같다. 그림책 주인공이 되어 누군가 그림책을 펼쳐주는 것만 같다. 이런 기분 정말 오랜만이다. 중딩 한길이가 네다섯 무렵 함께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던 때 기분이다. 무작정 걸어서 하늘 끝까지 갈 것 같은.
장날인지 시장 에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다.
"여기가 할아버지 직장이나 다름 없어."
"알아요."  
얼마 전 할아버지 직업란에 '장삿꾼'이라고 적어놓았던 생각마저 들어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호떡도 있고 떡볶이도 있네. 먹을래?"
"아직 배 부르니까 천천히 가다가 먹어요."
아케이드 아래로 길게 줄지어 선 좌판과 가게들 물건을 구경하며 걷는다.
"야, 산달래다."
보루박스을 잘라 산달레라고 써놓은 손글씨마저 힘이 넘쳐난다.
"집에 우산이 오래 됐는데 우산이나 살까요?"
"쓸만 한 것 같은데?"
"그게 어디 쓸만 해요. 다 고장 났더구만. 그리고 미키 마우스 우산이 말이 돼요?"
그냥 한 귀로 흘려보내며 들어준다. 아직 쓸만 하다는 걸 알기에.
"그건 나중에 엄마랑 같이 사고."
"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네요."

 

다 어디서 쏟아져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 사이로 걷는 기분이 좋다. 사람들이 많으니 메이커가 없는 옷들마저 흥정해서 사고 싶다. 역시 시장에는 사람들로 북적여야 사고파는 맛이 나는 법이다. 그냥 지나치며 눈으로 들었다 놓은 생선들이 다음 사람들 눈에 다시 걸리고 누군가는 검은 봉다리에 넣어 가지고 가게 되어 있으니.
"저기서 우리 뭐라도 살까요? 빼빼로도 사야 하고."
1000원샾이라고 부르는 체인점이다.
"와, 여기 되게 넓어요."
1,2,3층까지 없는 물건이 없을 만큼 빽빽하다. 이 녀석이 사고 싶은 건 빼빼로다. 내일이 11월 11일 빼빼로데이란다.
"누구한테 선물 하려고?"
"아니요. 내가 나한테 선물 하려고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지만 은근슬쩍 넘어가기로 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빠, 저 말은 다 거짓말이에요."
"뭐가?"
"저기봐요. 2층에 올라가면 더 많은 물건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해놓고는..."

 

층마다 1층 위에 2층, 2층 위에 3층에 더 많은 물건이 있으니 보고 가라고 해놓았으니 이 녀석 눈에 딱 걸릴 만하다. 게다가 3층에는 다시 1층에 가면 더 많은 물건이 있으니 즐거운 쇼핑을 하라고 써있으니 웃기는 상술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물건이 많으니까 구경 잘 하라고 사라는 거지 뭐."
"학교 앞에 있는 마트도 되게 싼데, 여기는 더 싼 것 같아요."
빼빼로를 원하는 만큼 샀겠다 덤으로 지우개에 샤프심까지 샀으니 사설이 길어진다.
"그렇지. 여기 회사는 일본 회산데 중국 같이 값싸게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곳에서 주문을 해서 가져오니까."
"그런데 중국 물건을 별로 좋지 않아요. 금방 고장나고."
한동안 유행 했던 "국산이 다 그렇지." 란 말 같다.
"요즘은 안 그래. 물건 안 좋으면 얼마 안 가 망하니까 되도록 값싸고 좋은 물건을 갖다 놓을 수밖에 없어."
그리 오래 쓸 만한 물건은 아니지만 가격 대비 질이 좋아진 것만은 사실이라고 설명하려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래도 이 녀석과 온갖 잡동사니 구경하며 이야기하자니 즐겁기만 하다.
시장 골목을 지나 성안길 번화가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더 많다. 거대한 물줄기 같다.
"여기서 좀 쉬어갈까요?"
다리가 아프고 허리마저 뻐근하다.
"뭘 좀 먹을래?"

 

어묵 한 꼬치에 국물을 먹고 쉬어가기로 했다. 눈에 걸리는 것마다 이야기거리다. 사람들에 물건에 새로 생긴 건물들, 광고 전단을 돌리는 홍보맨들로 뒤범벅이 된 거리 자체가 살아있다. 보고만 있어도 배부르다.
몇 군데 가게를 더 들러보고 성안길을 빠져나와 재래시장이 있는 골목을 탔다.
"여기하고 저기는 완전히 달라요. 다른 데 온 것 같아요."
간판이며 건물, 사람들까지 홀쭉하게 빠져 버린 풍선 같다고나 할까. 이 녀석도 그런 걸 느끼는 모양이다. 한참을 걸어 서점에 들렀다. 어릴 때는 자주 가던 곳이라 반갑게 맞아주는데 뻘쭘하게 앉아있다. 주인과 차를 마시는 동안 살 책을 골라보라고 했더니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더니 이야기가 무르익으니 그제서야 책을 둘러본다. 이집트학이란 꽤 비싼 그림책을 사주고 한울이가 갓난아기였을 때 살았던 골목을 지나 하염없이 걸었다.
"내가 왜 걸어가자고 했을까, 그래도 내가 자랑스러워요."
다른 때 같았으면 몇 번은 주저 앉고 포기했을 텐데 오늘은 자기가 한 말도 있고 해서 참는 눈치다.
"얼마나 걸었을까요? 4키로?"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있기에 어떻게든 완주하고 싶은 생각에 손을 꼭 붙들고 쉬엄쉬엄 걸었다. 이것 저것 참견해가면서 그동안의 데면데면했던 시간들을 충분히 보상받은 기분이다. 나도 자랑스러울 만큼. 다리 아프고 허리마저 끊어질 것 같았지만 집에 다 와서도 다시 뒤돌아 하늘끝까지 갈 수 있을 만큼.  

 

2012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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