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천리호 자전거 ”
흔들리는 두 다리만으로도 그것은 움직인다
아침도 변변히 못 챙긴 가비여운 몸
높다란 짐의 중량만으로도 나아간다
신새벽 고개를 넘어 읍내학교로 달리는
공복의 아이들 가녀린 휘파람만으로도
그것은 내닫는다
질주하는 은륜의 행렬이
날렵하게 강변도로를 빠져나가거나
맵시있게 뽑혀져 나온 계집애들이
쓸데없이 빙빙 광장을 도는 데선
들을 수 없는 그 묵직한 울림
산울림이나 들녘의 외치는 소리로
내 어린 기억의 반환점을 돌아오는
삼천리호 자전거
배가 고파도 속이 쓰려도
가슴 아파도 기운 없어도
그것은 움직인다
나아간다
무섭게 내닫는다
윤제림 시집 <<삼천리호 자전거>>(문학동네)에서
그러나 더 이상 3000리호 자전거는 없다. 둑방길에서 만난 자전거 앞 바퀴 위에는 자랑스럽게도 '3000'이란 숫자가 그랜저 승용차 보닛 위에 있는 앰블렘만큼 당당하게 서있건만 옛날의 그 삼천리호 자전거 구경하기가 어렵다. 아니 삼천리호 자전거는 있어도 옛날의 삼천리가 아니라 중국에서 만들어진 자전거일 뿐이다.
자전거 앞 바퀴에 펑크가 났는지 어제 빵빵하게 바람을 넣었는데 쭈글거려서 집 옆에 있는 광명자전거상회에 들렀다.
"요새 자전거는 다 중국산이고 허접한 것들이라 고장이 잘 나는데, 손님들이 다 싼 걸 바라니 나야 어쩔 수 있나"
오늘 따라 자전거포에는 사람들이 병원 대합실마냥 북적이는데 늘 하는 이야기가 중국산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마침 자전거 브레이크가 고장나서 고치는 중이었는데 부품값이 순국산이 더 비싸니 어쩌니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젊은 대학생 둘도 체인이 고장난 자전거를 끌고 들어와서 안은 더 복잡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야 손님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되지만 다들 싼 것만 찾으니까 그렇지"
주인 아저씨는 연신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삼천리호 자전거 하면 알아줬는데"
자전거를 고치러 온 아저씨가 삼천리호 자전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으로 공장을 옮기더니 옛날처럼 좋은 자전거 만든다는 자존심도 없고 중국산이나 다름 없다니까"
"맞아요, 브레끼는 반도 브레끼였지"
"그러니 이거 봐요. 라이닝이 이렇게 닳도록 탔으니 제대로 갔겠어요? 이것도 중국산은 싸고 국산은 3천원 비싼데 오래 타려면 국산으로 해야..."
그래서 역시 반도 브레끼로 갈게 된 아저씨, 다 합쳐서 만원이 넘어가니 고물 버리고 새 것 사도 낫다는 말을 한다.
"에유, 이렇게 조금만 고치면 괜찮은데 뭘 또 사요?"
사실 맞는 말이었다. 좋은 부품으로 고쳐만 주면 잘 타는 걸 싼 것 좋아하다가 몇 년 못 타고 고장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니까. 무엇보다 이래야 자전거포도 먹고 사는 것이니까 말이다.
브레이크 하나만 가는 데도 공력이 많이 들어간다. 주인 아저씨의 기름 손금이 도드라져 보인다. 꼼꼼하게 여기 저거 살펴보며 문단속을 하듯 자전거를 다루는 솜씨가 기술자다워 보였다.
젊은 대학생 둘이 체인 벗겨진 자전거를 들먹인다.
"힘 좋다고 막 굴러대니까 기어가 망가지지. 죄다 풀어서 다시 조립해야겠네. 바쁘지 않으면 내일 찾아가고"
금방 고쳐 갈 셈으로 왔다가 난감한지 한 녀석이 맹랑한 소리를 한다.
"드라이버로 이렇게 풀고 고치면 안 돼요?"
자기라도 드라이버만 주면 해체했다가 조립할 수 있는 것처럼 간단하게 말한다.
"빌려주라면 빌려주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지. 죄다 풀어서 다시 조립해야 한다니까"
주인 아저씨는 어이가 없는지, "그렇게 잘 알면 직접 하든지" 하고 작은 소리로 툴툴거린다.
연장과 공구들을 둘러보았다. 기름때가 묻어 다 그 색깔이 그 색깔로 보이면서도 단단하고 야무진 빛으로 다듬어진 야성이 돋보인다. 어디 앞에서 주름 잡는다고 드라이버라고? 참 재미있는 녀석들이네,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광명자전거상회는 나같이 자전거 타는 사람에게는
오아시스다
오다 가다 바람에 빠지고 구멍이 나는 인생에
바퀴 같다는 한 윤회에 기름칠하는 대목장이다
광명자전거상회 아저씨는 애국자다
중국산 자전거가 싼 맛에 많이 팔리지만
싼 것 갖다놓아봤자 몇 달 안 가 고장날 걸 뭐하러 가져다 놓느냐고
아무래도 오래 타려면 제대로 만든 것 가져다 놓는다는
아직까지 제대로 팔아본 것 없이 구멍이나 떼워주고
체인이나 타이어 갈아주는 일로도 버티는
기름때 절은 바닥에 나뒹구는 부속들마저 당당해 보인다
그 옆에 엉거주춤 앉아 구멍 떼우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
물대야에 순대 같은 튜브를 돌려가며 구멍 찾는 일이며
사포로 갈고 고무풀 발라 구멍을 떼우는 일이
섬에 살 적에 섬에 들어온 튀밥 장수한테 댓병 소주에 불콰해진 아저씨가
장작불 위에 돌아가는 기계를 만지작거리며
아저씨 조수로 삼아 달라고 멀리 멀리 뻥이요! 하며 튀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한
그 실없는 이야기까지 달콤하게 떠오른다
오질나게 새던 마음까지 때워지는 것 같고
쏜살같이 지나가는 차도 옆에서 국민체조하듯
펌프질하고 있으면 저녁 공기가 금쪽같고 금싸라기 같아
배불러 온다
나사 하나 바큇살 하나도
제 살 찾고 제 몸 찾는 것처럼 살아있는 것 같다
전에 썼던 시를 씹어보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는 시간. 저물녘이 다 되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이럴 줄 알고 느긋하게 시간 비우고서 왔는 걸요"
사이 사이에 끼어드는 사람들이 많아서 짜증이 났기는 했지만 널널하게 왔으니 참을만 했으니 괜한 소리는 아니었다. 동네 사는 아저씨인지 "요새 자전거는 받침대가 이상한 데 달려서 어디 제대로 서 있기는 하나" 하면서 앞에 먼저 고쳐가는 아저씨 자전거에 있는 받침대 같은 걸 달 수 있냐고 해서 오래 걸리긴 했다. 그것도 간단한게 아니어서 지금 나와있는 것으로는 안 되니까 받침대를 달 수 있는 자리에 다른 걸 용접하든지 해야 한다고 친절하게 가르쳐주느라 더 오래 걸렸지만 주인 아저씨의 조수나 되는 것처럼 참견해 가면서 참았다.
아니 또 있구나, 어떤 아주머니가 바람 넣으러 왔기에 내가 넣어주었지. 그것도 옛날 펌프로 국민체조하듯이 푸슝푸슝 넣어주었더랬다.
"옛날에는 자전거 빌려주는 것만 해도 장사가 잘 되었지"
뭔 사진사라도 되는양 구석구석을 찍는게 멋쩍어서 장사 잘 되냐는 말은 옛날 이야기로 돌려서 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삼천리호 자전거 이야기가 또 나왔고 중국산이며 부품 이야기가 나왔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어제 여기서 빵빵하게 넣었는데 아침에 보니까 다 빠져있네요. 펑크가 난 것 같아요"
"어디 한 번 봐야지요"
오래된 펑크 전용 상자가 눈에 익었다. 자잘한 부품들이 들어있는 의자겸용 공구함 앞에 선 자전거가 의사 앞에 앉은 아이처럼 보였다.
먼저 주브, 아니 튜브를 꺼내 바람을 빵빵하게 집어넣었다. 순대 같다.
그리고 물대야에 담궈가면서 물거품이 올라오나 안 오나를 살핀다.
사실 난 이게 재미있어서 주인 아저씨 말대로 빵꾸 떼우러 올 때가 가끔 있다. 자전거로 잘 쏘다니다 보니 못이나 이런 저런 것에 찔려서 펑크가 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학교 때 기술 시간이 떠올라서 그렇다.
그때 기술시간에 확실하게 배운 게 바로 자전거 빵꾸 떼우는 일이었다. 연장으로 바람 빠진 타이어 뱃구럭 사이를 돌려서 주부, 아니 튜브를 꺼내서 바람을 넣고 물대야에 넣고 돌렸지. 그리고 실빵꾸난 곳에서 뽀로록 하고 거품이 올라오면 잘 닦아 말리고 사포질을 하고 주브 조각을 알맞게 잘라 역시 사포질을 하고 돼지표 본드를 살살 발라 구멍을 떼우던 일이 곰실곰실 떠올라 꼭 튀밥 장수 옆에서 호롱호롱 풀무를 돌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연 소모가 되는 것 같은데"
펑크가 난 게 아니란다. 어디에서도 물방구가 나오지 않았다. 인심좋은 순대마냥 빵빵하기만 하다.
"그냥 주브를 새로 가는 게 낫겠는데?"
어디에서 빠지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단다.
"새로 가는 게 조금 더 먹히지만 요새 누가 그렇게 떼우나, 그 돈으로 갈고 말지"
역시 주인 아저씨답다. 바람은 분명 빠지는 것인데 어디에도 흔적은 없으니 아예 새 것으로 바꾸자는 말씀. 끝까지 돼지표 본드를 발라 구멍을 떼우는 걸 보자고 왔는데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어디 뾰족하게 짚이는 데가 없는데 아프다니 어쩔 수 있나 싶을 때처럼 새 것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요즘에는 사포로 갈고 자시고 없이 반창고처럼 나온 고무딱지를 붙이고 마는 것이니 재미가 없긴 했다.
그래서 새 것으로 갈았다. 아저씨는 요즘 타이어 타령도 했다. 제대로 삼천리호를 만들 때처럼 질기고 좋은 타이어가 아니라 얼마 쓰지 못하는 것 뿐이라고.
그러니 삼천리호가 대단하기는 대단했다는 결론으로 끝나버렸다. 내 자전거에도 삼천리 자전거란 딱지가 붙어있지만, 그래서 순국산(아니 기어는 일본산이지만)이라 비싸게 주고 산 것이라 삼천리 자전거에 대한 자부심이 있지만. 옛날 자전거에 붙어있던 '3000'이란 엠블램이 20세기 폭스사 로고로 시작되는 영화 같았다고나 할까.
새 것으로 갈고 나오니 진짜 빵빵했다. 이대로 자전거 여행을 떠나도 될만큼 놀놀해졌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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