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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아옌데 장편소설 <바다의 긴 꽃잎>

독서일기

by 참도깨비 2022. 2. 24.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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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를 대표하는 소설가 이사벨 아옌데의 스무 번째 소설이다.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위니펙호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옌데가 베네수엘라 망명 중에 들은 빅토르 페이의 실화를 바탕으로 썼다고 한다. 프랑코 독재 정권으로 기억되는 스페인 내전을 시작으로 아옌데의 고국인 칠레를 무대로 펼쳐지는 대서사가 돋보인다. 그래서인지 마지막까지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이름도 빅토르이다. 제목으로 쓴 ‘바다의 긴 꽃잎’은 칠레의 국민 시인으로 알려진 파블로 네루다의 시 「언젠가 칠레」의 한 구절인 “하얗고 새까만 거품을 허리띠를 두르고, 바다와 포도주와 눈[雪]으로 이뤄진 기다란 꽃잎”에서 따온 것이다. 작가가 처음 붙인 제목은 '항해'였는데, 네루다의 시에서 나온 것처럼 '허리띠를 두르고, 길게 이어진 연대'의 뜻으로 다시 정했다고 한다. 네루다와 칠레 이야기만 나오면 그의 시가 떠오르는데 소설의 한 축이기도 한 위니펙호를 통해 이민자들을 받아들인 그의 세계관과 닮아있다. 


소설의 시작은 1938년, 스페인 내전이 한창인 카탈루냐에서 의대생 자격으로 부상병들을 치료하며 지내는 장면이다. 빅토르 달마우는 심장이 멈춘 어린 병사의 목숨을 살려낸 만큼 헌신적이고 능력있는 주인공이다. 그런 그가 살려낸 어리 병사의 심장은 환란 속에서도 그를 버티게 한 상징이기도 하다. 열렬한 공화주의자이자 음대 교수인 아버지 마르셀과 시민군에게 글을 가르치는 어머니 카르메, 수양딸이자 음대생 로세르, 빅토르의 동생인 다혈질 싸움꾼  기옘이 연달아 나온다. 아버지 마르셀이 슬프게 예언했듯이 공화국은 패배하고 기옘마저 전투에서 사망한다. 이 가족에게 남은 것은 기옘의 아이를 가진 로세르와 어머니 카르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피난 뿐. 그 뒤의 운명은 소설 제목처럼 망망대해에 뜬 꽃잎과도 같다. 고국인 스페인을 떠나 머나먼 피란의 길을 떠나는 과정은 전쟁과 파시즘이 만들어낸 인류의 역사 그대로이다. 독재국가로 가는 역사를 외면한 서구 제국주의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빅토르는 내전 중에 죽은 동생 기옘의 아이를 가진 로세르와 위장 부부가 되어 칠레로 망명하고 결국 칠레의 자신의 뿌리로 여기며 살게 되기까지 슬프면서도 위대한 여정이 피의 역사임을 현재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숨막히게 전개되는 이야기의 장마다 파블로 네루다와 칠레 민중이 만들어낸 시를 할애하고 있다. 스페인 내전부터 피노체트 군부 쿠데타까지 폭력의 광란의 시대를 살아낸 주인공들의 배후에 파블로 네루다 시인이 있었던 것이다. 소설을 나누는 장마다 네루다의 시가 나오는 것은 그의 삶 자체가 국적과 인종을 초월한 반파시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일찍 삶을 마친 빅토르의 아버지 마르셀이 작곡해서 시민군에게 부르게 했다는 「죽은 민병대원 어머니들에게 바치는 노래」도 네루다의 시다. 외교관 신분이었던 네루다가 이 시를 공화파 집회에서 낭송했다가 보직 해임을 당한 일이나 스페인 내전의 아픔을 널리 알리기 위해 『내 마음속 스페인』이라는 시집을 출간해 위로했던 것 또한 소설 속 주인공들의 대서사로 이어진 것이다.

이야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빅토르와 기옘 형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억압받는 현실에 주체적으로 맞서는 로세르와 전쟁터에서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친 어머니 카르메, 그들을 만나게 도와준 간호사 엘리자베트, 칠레를 파멸시킨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집안의 딸로 태어나 철이 없고 감정적이었던 오펠리라가 주체적인 예술가로 거듭 나기까지 등이 이사벨 아옌데가 소설에서 가치를 드러내는 여성성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빅토르는 로세르를 죽을 때까지 지켜주고 죽고 나서야 더 열렬한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며 나머지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새로운 항해이며, 그렇게 그는 끝까지 갈 생각이었다'라는 마지막 문구로 대서사를 마무리하는 것도 '바다의 긴 꽃잎'에 잘 어울린다. 네루다의 시가 나오는 3부 마지막 장에 "그렇지만,/이곳에 내 꿈의 뿌리가 있다./이것이 우리가 사랑한 단단한 빛이다."(<귀환>)에 말했듯이 아옌데 소설의 뿌리인 칠레 민중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칠레의 변화를 이끌어낸 네루다와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미완의 혁명에 더해 자신의 운명보다는 억압과 왜곡된 현실 앞에 당당하게 맞섰던 여성들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옌데의 소설 전작(<영혼의 집>,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 3부작과 네루다의 시집을 찾아 읽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소설 속 명문장 몇 곳을 추려본다.                                                                                                              "상처 부위가 열린 채, 가슴 한복판에 그림을 그려 넣은 듯 깨끗했다. 총알이 심장을 박살 내지 않고도 어떻게 갈비뼈와 흉골 일부를 으스러뜨렸는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빅토르 달마우는 스페인 내전 중 거의 삼 년 동안 인턴으로 있으면서, 모든 것을 봐 왔고 타인의 고통에는 면역이 되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심장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점차 느려지며 간헐적으로 들리는 마지막 심장박동 소리를 넋 놓고 들었다. 심장이 완전히 멈춰 서고, 어린 병사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달마두는 이제는 전혀 요동치지 않는, 시뻘겋게 움푹 파여 들어간 곳을 바라보며 잠시 가만히 있었다. 전투와 마른 피딱지로 더럽혀져 심장을 드러낸 채 돗자리에 누워 있는, 채 수염도 나지 않은 열다섯이나 열여섯 살쭘 되어 보이는 그 아이는 전쟁에 대한 모든 기억 중 가장 강렬하고도 반복적인 기억으로 각인되었다. 빅토르 달마우는 자기가 왜 오른손 손가락 세 개를 그 끔찍한 상처 부위로 집어넣어 장기를 휘감은 후 매우 냉정하고도 침착하게 여러 번 리드미컬하게 압박했는지 절대 설명할 수가 없었다. 기억조차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어쩌면 삼십 초일 수도, 어쩌면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손가락들 사이에서 심장이 되살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처음에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작은 떨림은 곧 힘차고 규칙적으로 느껴졌다."(15쪽~16쪽, 빅토르 달마우가 내전 중인 현장에서 소년 병사를 살려내는 장면)                                                                                                                                                                                                                                                                                         "기옘은 물과 전기와 변소의 부족에 대해, 돌덩어리와 쓰레기와 먼지와 깨진 유리로 가득한 복도들에 대해 말했다. "한가한 시간에는 우리가 가르치면서 배우기도 했어.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젊은이들을 가르치느라 행복하셨을 거야. 학교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많아." 하지만 쥐와 이. 쓰레기, 오줌과 피, 들것 운반병이 도착할 때까지 피를 흘리며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부상당한 동지들, 굶주림, 딱딱한 강낭콩과 차가운 커피가 담긴 식판, 총알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맞서는 몇몇 동지들의 무모한 용기, 이와 상반된 동지들, 특히 막 도착한 어린 동지들로 이뤄진 비베론 부대 아이들의 두려움에 관해서는 로세르에게 말하지 않았다. 다행이 기옘은 비베론 부대의 코흘리개들을 동료로 맞이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슬퍼서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로세를 앞에서는 동료들이 저지른 집단 처형에 대해서도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둘씩 묶은 적군 포로들을 트럭에 싣고 공터로 데려가 아무 절차도 없이 처형한 뒤 커다란 웅덩이에 한꺼번에 파묻었다. 마드리드에서만 그런 식으로 이천 명 넘게 사망했다."(61~62쪽, 스페인 내전의 단면을 보여주면서 그 모순을 껴안고 일찍 죽은 기옘이 말하는 대목)                                                                                                                                                                                                                                       "빅토르와 로세르는 결혼해서 살아온 십팔 개월 동안 아주버니-제수로서, 또 동료로서 완벽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침대만 빼고 모든 것을 공유했다. 로세르는 기옘에 대한 추억 때문에, 빅토르는 복잡한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로세르는 사랑이란 단 한 번 오는 것인데, 자기 몫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한편 빅토르는 로세르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자신의 복잡한 속마음을 다스렸다. 그에게는 그녀가 가장 친한 친구였고, 그녀를 알아 갈수록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다. 가끔은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보이지 않는 선을 넘고 싶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키스하고 싶었지만, 동생을 배신하는 일이라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그것에 대해, 얼마나 오랫동안 상을 지속할지, 죽은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오랫동안 슬퍼해야 할지 얘기를 나눠야 했다. 거의 모든 것을 로세르가 결정하듯이 그날 또한 로세르가 결심하는 순간 찾아올 것이므로, 그때까지 그는 쓸데없는 기대를 안고, 복권 당첨을 바라듯 오펠리아 델 솔라르를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다. 그는 사춘기 소년 같은 강렬한 마음으로 첫눈에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다시 만나지 못하면서 그 사랑은 바로 전설이 되어 버렸다. 그는 쓸데없는 환상을 꿈꾸며 그녀의 얼굴, 그녀의 움직임, 그녀의 옷, 그녀의 목소리를 찬찬히 떠올렸다. 오펠리아는 잠시만 머뭇거려도 바로 사라져 버리는 흔들리는 신기루였다. 예전의 음유 시인처럼 그는 이론상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218~219쪽, 로세르는 빅토르의 동생 기옘의 아이를 낳고 칠레로 망명하는 가운데 빅토르와 위장부부가 되지만 평생을 지켜주며 뒤늦게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그 중간에 오펠리아가 있었지만 그야말로 잠깐 지나가는 신기루였다. 쉬이 이해하기 어려운 관계이지만 진정한 사랑이 소설의 중심축임을 확인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빅토르는 평생 고통과 죽음과 싸우며 살아서, 죽음의 문턱에 선 환자들을 뒤흔들어 놓는 격렬한 감정에 익숙했다. 자신의 운명을 부정하고, 그런 운명을 겪게 된 것에 화를 내며 미쳐 날뛰고, 삶을 연장하기 위해 운명과 신과 흥정하고, 절망에 빠졌다가 결국에는 최상의 경우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 체념하게 된다는 것을 그는 학교에서 배워서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로세르는 이전 단계들을 모두 건너뛰고, 처음부터 놀랄 정도로 차분하고 홀가분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줄임) 자신이 나이와 상관없이 불사신이라고 믿었던 몇 달 전의 열정과 에너지는 뼈마다 사이로 빠져나갔다. 자기 옆에 있던 여자도 몇 분 지나지 않아 늙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늘 봐 왔던 여자의 모습이고, 그녀가 없을 때면 떠올리던 모습이었다.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스물두 살의 젊은 여자였다. 사랑도 없이 자기와 결혼했다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자기를 사랑해 준 여자였다. 동반자였다. 그는 그녀와 함께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누렸다. 죽음이 임박해 오자 강렬한 사랑이 화상처럼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붙잡고 뒤흔들고 싶었다. 그녀에게 가지 말라고, 그 어느 때보다 더 사랑할 날이, 하루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할 날이 앞으로 몇 년은 더 남아 있다고, "제발, 제발, 로세르, 나를 떠나지 마."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장님이 아니고서는 혼령의 인내심으로 아내를 기다리며 정원까지 들어와 있는 죽음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416~4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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