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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있든 그 자리에 시가 있다

독서일기

by 참도깨비 2022. 3. 11.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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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빌려옴

 

 시는 어렵다. 골치 아프다. 그들의 생각일 뿐이다. 이 시 좀 해석해줘요. 

 시를 공부하고 쓰는 사람이라 시 이야기를 하자 하면 흔히 듣는 소리다. 그러면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다가 포기하고, 시는 어렵다. 그대 마음처럼 어렵다. 속마음을 꺼내 말하기는 더 어렵다. 그것도 함축(학생 시절에 공부한 내용 중에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시에 대한 단어 중 하나다)해서 쓰는 것이니 어렵다고 한다. 남의 시를 읽는 것은 더 어렵다. 요즘 시는 더 어렵다고 한다. 

 사실이다. 시는 어렵다. 어려울 수밖에 없어서 읽고 또 읽으면서 알아가는 것이 시다. 시인들은 같은 것을 바라봐도 꼭 다르게 말하더라, 기가 찬 표현이라든지, 에둘러서, 근사하게, 뭘 감추고, 센치하게 써서 우리와는 다르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 딴 세상 이야기라고들 한다. 

 

 그렇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 아니 그렇게 시를 말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일까? 거꾸로 물어보면 덜컥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 무엇으로 어떻게 왜 살고 있는 것이지? 그래서 일단 시를 읽자고 말한다. 각자의 눈으로 읽어보고 왜 시가 이 모양인지, 제목을 잡고 왜 그런 내용으로 썼는지, 시를 쓸 때의 호흡을 읽으며 시인의 목소리를 들어보아야 한다고. 

 이 또한 어려운 말인지도 모른다. 글을 처음 배운 사람도 알아먹을 수 있도록 쉽게 쓰라는 말처럼 어려운 것이다. 모두가 쉽게 쓸 수는 없다. 쉽게 쓴 시는 곳곳에 많다. 울림이 없는 복사본 시처럼 흔하기에 우리는 다시 시라는 어려운 화두 안에 갇혀야 한다. 이것 또한 삶의 연장이기에 사는 동안 그것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여기 임실에서 태어나 완주에서 사는 시인이 있다. 농사 지으며 내로라 하는 시인들에게 용만이 형으로 불리는 시인 김용만. 그가 시집을 냈는데 그가 첫 장에 시인의 말에 이렇게 썼다.

 

텃논 모가 뿌리를 잘 내렸다.

저 가지런한 가난이

내가 꿈꾸는 시다.

 

 처음 시를 읽는 사람은 이것을 시인이 썼으니 덮어놓고 '뭔지 모르지만 근사하게 잘 썼다'고 말할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저 가지런한 가난'이라고 표현한 모 때문일까? 시를 그대로 이해하기보다는 그것을 쓰기 위해 무슨 표현법을 썼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간파해야만 국어 문제를 잘 풀 수 있도록 훈련되었던 사람들은 난독증에 빠지기 쉽다. 어떤 마음으로 썼을까, 하는 이심전심이 아니라 저것은 '시'이니까 근사한 무엇인가로 이루어진 광물질을 보듯 난감해 하는 것이 먼저다.

 

 모두가 도시에 살고 지긋지긋한 가난은 떠올리기도 싫어서 멀찍이 밀어놓고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대로 육박해서 느껴야 한다. 아무튼 김용만 시인에게 농사일과 시 쓰는 일은 텃논에 뿌리를 잘 내린 모이고 그것이 잘 자라주는 게 꿈일 뿐이다. 각자에게 모는 무엇이고 꿈꾸는 삶은 무엇인지 돌려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첫 장에 이런 시가 나온다.

 

초가실 맑은 햇살 마당에 가득하다

 

저 햇살 몇 삽 담아

요양병원 어머니에게 가야겠다

 

병실 가득 눈부시게 깔아놓고

참깨 털고

고추 널고

호박 곱게 썰어 하얗게 널어야겠다

 

귀가 어두운 어머니와 바위에 앉아

해 지는 강물을 오래 바라봐야겠다

 

꼬들꼬들 호박고지 마르는 동안

 

김용만, <호박고지 마르는 동안> 전문

 

 마음이란 것이 이렇다. 무엇으로 포장할 필요가 없는 마음 그대로이다. 시를 읽는 사람도 단번에 느낄 수 있는 마음 그 자체다. 제발 '근사하게'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누구와 대화를 하면서 솔직한 마음이 아니라 무엇인가 포장하면서 에둘러 말하면, 번지르르하게 칠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라고 할 때를 떠올려보라. 아파트 단지 화단에 누군가 말려놓은 호박고지를 바라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시인의 마음을. 요양원에 어머니를 모신 시인의 마음이 그렇다. 우리가 식구를 생각하는 마음과 다를 게 없다. 살아계실 때 못 해 준 것이 있으면 진즉에 그렇게 해드렸어야 하는데, 그 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회한들이자 솔직하게 털어놓는 마음이다. 그것을 어떻게 잘 표현할까 하고 생각하고 배운 대로 쓰다 보면 시가 아니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못해 준 회한으로 바로 이야기해야 할 것들을 묻어두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어머니와 '해 지는 강물을 오래 바라'보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도 그간의 복잡한 심사가 자연스럽게 시를 울리는 불쏘시개가 된 것이다. 아파트 화단에 호박고지를 말려놓은 혼자 사는 할머니도 그런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해보면 거기에 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집 두꺼비가 죽었다

아무리 느려도

도로 건널 때는

좀 서둘러라

신신당부했는데

아이고 속 터져

차에 치여 죽었다

오늘 인간인 내가

종일 미웠다

나는 아니라고들 하지 말라

 

김용만, <두꺼비>

 

 하루에도 몇 번이고 로드킬 당한 길 위를 오고 가는 도시 사람들은 차 안에서 보고 느끼는 게 다일 수 있다. 소름 끼친다거나 얼마나 불쌍한가, 말 한 마디 던지는 게 전부일 수 있다. 그러나 두꺼비 같은 뭇 생명들과 더불어 사는 시인은 '종내' '인간인 내가/종일 미웠다'고 표현할 만큼 마음으로 쓸 수밖에 없다. 꽃이 아름답고 예쁘다는 표현을 복사하기 앞서 신심으로 바라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듯 시인은 시를 읽고 있는 사람에게 당부한다. "나는 아니라고들 하지 말라"고. 미웠다고만 끝나지 않고 우리들이 만든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음을 둘러보고 느끼라고 일갈하는 것이다. 시가 이런 자리에 있는 것이다. 시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다른 게 아니다. <두꺼비> 다음에 나오는 <지들 봄이나 잘 챙기지>가 다시 강조해서 말해주고 있다.

 

산중의 봄은 빗소리로 온다

산 넘어 자박자박 온다

 

위봉산성 내리막길

불빛 따라 언뜻언뜻 뛰던

개구리, 두꺼비는

찻길 무사히 건넜을까

 

나는 돌아와 누웠는데

길 건너다 깔린

저 작은 목숨들

새벽에야 생각나네

 

인간들은 왜 자꾸 남의 봄을 빼앗나

지들 봄이나 잘 챙기지

 

김용만, <지들 봄이나 잘 챙기지> 

 

 우리는 흔히 시에 붙은 것 중에 '힐링'을 말한다. 지금 마음이 혼란스러운데 시로 위로받고 용기를 얻는다고들 한다. '힐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정확히 알기 쉽지 않다. 잠깐의 화학적인 기쁨일까? 그것이 아니라는 건 그 말을 쓰는 사람들도 알고는 있을 것이다. 인기리에 팔린다는 어느 시인의 '힐링 시집'에 나오는 시를 여기저기로 퍼나르는 인터넷 세상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힐링은 넘쳐나는 말에 지나지 않다. 무엇보다 제대로 듣고 읽는 것부터 해야 맞는 것이 아닐까. 

 첫 행에 나온 것부터 마음을 다잡고 읽을 준비를 해야 한다. 시를 썼을 그 장소를 떠올려보고 그 사람의 마음이 되어보는 것만으로도 잘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박세현 시인의 '빗소리듣기 모임'이라는 시도 있으니 참조하면 될 것이다. '산 넘어 자박자박' 오는 빗소리를 들으며 길 위에 위태로운 생명들을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하고 떠올려보면 앞선 시에서 말했듯이 "인간들은 왜 자꾸" 자기들 봄을 즐기려고, 힐링한다면서 같이 누려야 할 몫의 봄마저 빼앗으며 위안을 얻고 정작 그 위안의 말에 잠겨 헤어나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아, 착각에 빠졌구나, 하는 신기루와 망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품고 있는 마음과 겉으로 내 보인 말이 다르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이중인격이라든지 죽을 때까지 속을 모를 검은 무엇으라고 표현하고는 한다. 시는 그런 격차 사이에서 들락날락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기도 하다. 김용만 시인의 다음 시를 보면,

 

아내와 아내 지인들이

이박 삼일 놀다 갔다

 

여자들은 좋겠다

 

밤새 수다 떨고

아침에 또 떤다

술 없이도 지치지도 않는다

 

안 싸우고

잘 논다고

밥해줬다

 

쑥국도 끓여줬다

 

김용만, <여자들은 좋겠다>

 

 오래 산 부부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숱한 싸움과 신신한 삶에서 유들유들해진 것이라기보다 서로를 바라보며 저절로 익은 사람의 마음 그대로다. 지난 대선에서 젠더 의식도 없는 정치인이 갈라치기해서 더는 사랑 없이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까, 하고 자책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 시가 어떻게 읽힐까? 저 '수다'에 시인도 끼어있고 지인들의 남편들 이야기도 들어있을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술 없이도 지치치도 않'고 '안 싸우고/잘 논' 여자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보라. 원래 무뚝뚝해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면에는 이런 뜻이 담겨있는지 모래집 훑듯 지금 꺼내서 확인해보라. 그러면 시가 주는 묘미와 진정 '나'를 표현하고 나누려는 뜻을 이해하고, 더 이상 시 앞에서 해석을 해주어야만 한다는 변명 대신 기꺼이 시로 육박해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새들은 날기 위해

쉴 참마다 머리를 산 쪽에 둔다

 

가벼워지기 위해

뇌의 크기를 줄이고

뼛속까지 비운다

쉽게 떠나기 위해

움켜질 손마저 없앴다

 

새들은 쉴 참마다

깃털을 고르고

날면서도 똥을 싼다

 

자유로이 떠나기 위해

 

깃털 하나만큼 더 가벼워지기 위해

 

오늘은 먼 길 떠나려나

이른 아침부터

뒷산에다 울음마저 버린다

 

김용만, <새들은 날기 위해 울음마저 버린다>

 

 이 시집의 표제작이다. 시집 제목으로 쓴 시에는 그 시집을 통틀어 말해주는 내용이 들어있다. 요즘 시집 제목들은 이렇게 한 문장으로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시 중간 행에서 뽑는 경우도 있다. 시집 장정과 함께 단박에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새들은 날기 위해 울음마저 버린다'는 시가 가져야 할 미덕을 그대로 말해준다. 시라면 자유로워지기 위해 울음마저 버려야 한다는 말로도 읽힌다. 방하착放下着. 모든 아집과 고뇌마저 내려놓으라는 선사의 말씀이지만 누구나 혼란스러운 삶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는 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렵다는 것 또한 안다. 우리가 새를 만나면 자유롭게 나는 날개를 부러워하고 노래하지만 정작 그것을 가지기 위해 새가 하는 진화에 대해 제대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자유에는 왜 피가 묻어있는지 공중에 나는 새를 통해 알았다는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여기서도 새의 가벼움에 대해 자유와 날개, 그 안에 감춘 뜻을 보여주는 시다. 아니 일을 하다 쉴 참에 새를 바라보니 마음에 그대로 다가오는 새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다. '깃털 하나만큼 더 가벼워지기' 위해 깃털을 고르고 날면서도 똥을 싸고 기어이 울음마저 버려야 한다는 것이 방하착이고 시가 가져야 할 미덕임을 말하고 있다. 가벼워지는 것은 어디론지 날아갈 수 있고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고집과 과거, 미련, 고민이어도 좋다. 그것들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정작 해야 할 생각과 변화로의 실천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시는 그래서 어렵다.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 새처럼 정작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만 가벼워질 수 있다. 시인이 걷는 자리에 시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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