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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고전 <바람이 불 때에>

독서일기

by 참도깨비 2022. 3. 2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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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브릭스 그림책 <바람이 불 때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 인류가 전쟁과 평화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때, 레이먼드 브릭스의 그림책을 다시 읽었다. 얼마 전 지역의 예술단체가 전쟁반대를 외치며 거리 공연을 할 때, 우크라이나에서 온 여성의 눈물이 겹쳐 떠올랐다. 러시아 국적으로 귀화한 고려인들도 우크라이나에 가족을 두고 있는 경우도 많아 함께 눈물을 흘리며 공연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과 인터뷰 약속을 잡기도 했다. 이번 작가지 특집으로 <작가, 전쟁위기의 시대를 마주하다>로 그들의 생생한 역사와 지금의 심정을 인터뷰 글로 싣고 작가들이 어떤 작품으로 이 시대를 말한 것인지 다뤄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레이먼드 브릭스는 <눈 사람 아저씨>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그림책 작가다. 하늘 위를 걷는다는 제목으로 크리스마스 때마다 울려퍼지는 노래와 애니메이션을 기억하는 고전파(그림책으로 아이들과 공부하고 즐기던 세대)들에게는 낯익은 작가다. 존 버닝햄과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이지만 두 사람의 그림책 경향을 아주 다르다. 존 버닝햄이 꿈을 꾸듯 환상의 동심 세계와 재미를 주는 것에 비해 레이먼드 브릭스는 노동당원이거나 보수주의자의 중간, 아니면 불퉁스런 덕후의 느낌을 주는 세계에 가깝다. <작은 사람>이나 <괴물딱지 곰팡씨>처럼 약간은 기괴하면서도 소외된 주인공을 통해서 불편한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 때에>에 나오는 전형적인 영국인으로 보이는 제임스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세계정세와 전쟁에 대처하는 한 국가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걱정 많은 사람들은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도 있다고, 러시아가 옛 강성대국을 꿈꾸며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고, 중국이 중화를 꿈꾸며 대만을 침공할 것이고,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결국 세계대전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전쟁이 핵무기를 꺼내고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제임스 부부는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미사일이나 핵무기가 떨어졌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지침서에 따라 시골집에 대피소를 마련한다. 2차 대전을 겪은 세대이지만 독일과 러시아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세계정세에 따라 회담을 통해 연합하고 적국화하던 시절을 떠올린다. 방공호를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등화관제를 하고 사이렌에 피난민들을 겪었던 그때를 떠올리면서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쓴다. 그들의 만화 같은 말풍선에 담긴 대화를 보면 지나치게 말이 많은 불안 증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지만 그 또한 막상 전쟁이 닥치면 속수무책이고 되돌릴 수 없는 재앙이 된다는 것에 대한 암시를 주기 위해 깔아놓은 작가의 메시지, 마치 미국을 대표한다는 심슨 가족을 보는 듯한 아이러니라고 할까. 정치가 국민을 위해 있다는 말의 허위를 지금 현재 목도하듯이 작가라면 그것을 제대로 짚어주어야 함을 레이먼드 브릭스에게서 재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불안을 잠식하듯이 중간에 "그 사이에 먼 평원에서는....." 글로 시작하는 양면의 그림(폭격기 대열과 잠수함, 그리고 흰 여백으로 보이는 폭발의 순간, 그 뒤에 바로 닥친 집안 대피소에 보이는 두 사람의 발)은 나쁜 권력이 향하는 지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핵폭발 이후의 이야기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두 눈으로 보고 있는 먼 곳의 아픔들이 백 배, 천 배로 커지고 제임스 부부처럼 마지막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떠돌아 다니는 육백의 혼령들...." 그리고 "제기랄"밖에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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