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전국의 초등학생들과 함께 권태응어린이시인학교를 여는데 교장 선생님 이안 시인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거의 모든 시를 외워서 아이들의 눈빛을 사로잡는데 손가락에 끼는 고무밴드 하나로도 마음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 말놀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야말로 탄력 있는 말의 재미 그대로여서 말의 재미를 잘 아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집 1부의 대표시가 <아홉 살 시인 선언>인데, 이것도 시인의 영향이 크다. 시인를 만나 시인이 되기로 하고 선언에 이르는 아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어린들이 시의 맛을 알게 하기보다는 어리니까, 아직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 전이니까 감성을 싹틔워주기 위해,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여러 번 타본 경력을 이어가기 위해 쓰게 하는 것이 시라면 이런 그러나올 수 없다.
난 결심했어 시인이 되기로
선생님이 그러는데 시는 아름다운 거래
난 다른 게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이 되겠다는 거야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이
안 아름다울 순 없잖아?
시인에게는 연필과 수첩만 있으면 된대
그게 시인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무기라는 거야
그 둘만 가지고 세상과 맞서는 거지
아름답지 않니?
백 살까지 쓰고도 남을
연필과 수첩을 모아 두었어
나는 나를 아껴 쓸 거야
자면서도 읽고 쓰고 바라볼 테야
글씨는 작을수록 좋아
-<아홉 살 시인 선언>
이 시의 주석에는 아홉 살에 <연필과 수첩과 시인>이란 멋진 시를 쓴 고현주 어린이에게 바친다고 적혀 있다. 이것이 시인이 동시집을 들고 학교 현장과 어린이시인학교에서 달달 외운 시와 고무줄 같은 탄성 있는 말로 좋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말은 탄성과 회복력,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의 힘을 모두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주에 있는 책방 '잘 익은 언어들' 입간판에 여덟 살 민준기 어린이가 써 놓은 문장.
이 시만 봐도 아이들은 미래에서 온 존재이자 싹이지 않은가. 행갈이이를 잘못 했을 것 같지만 힘이불이 되어 있어서 시인에게 이렇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지 않은가. 하루에도 몇 십 명씩 어린 시인이 탄생하는 것을 보면 아름답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믿는 구석일 수밖에.
나를 믿는다면
말리진 않을게
하지만 그전에 알아 둘 게 있어
네가 한 손으로 들기엔
난 너무 무거워
한쪽은 뭉뚝하고
다른 쪽은 잔뜩 날이 서 있지
딴생각을 하다간
쿵!
발등을 다칠지도 몰라
그런데도 네가 나를 믿는다면
난 할 수 없이
구석이 될 수밖에
네가 외로울 때
찾아와 서성거리다가 가기 좋은
네가 믿는
구석이 될 수밖에
-<구석이 되고 싶은 믿는 도끼> 전문
요즘 시를 잘못 알고 쓰고 읽고 있는 아이들은 딴생각을 할 줄 모른다. 딴생각하면 큰일 나는 줄 안다. 믿는 구석, 아니 구석이란 말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림자, 틈. 구멍, 거미와 개미가 오르는 꽃과 나무의 달콤하고 시큼한 것을 모르면서 신기와 불쌍병에 걸려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기뻐의 비밀>에 빠져보게 하면 고무줄 하나 갖고 싶어 손을 드는 아이로 금방 변신하고 자신 안에 가둬둔 말의 재미를 하나 둘 꺼내들 것이다. "말 없는 사전의 혓바닥 같은/라일락 잎 하나를/잘 말려 둔 일//혀를 갖고도/사전은 말을 안 할 뿐"(<일 년 동안 국어사전이 한 일>)이라는 알쏭달쏭한 시의 비밀도 금방 알아차리고, 건너편에 있는 "만나는 것 하나하나 밑줄 그으며/온 말"을(<지렁이 말을 믿자>)까지 금세 눈치채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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