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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시인의 말 재미 시집 <기뻐의 비밀>

독서일기

by 참도깨비 2022. 4. 25.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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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전국의 초등학생들과 함께 권태응어린이시인학교를 여는데 교장 선생님 이안 시인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거의 모든 시를 외워서 아이들의 눈빛을 사로잡는데 손가락에 끼는 고무밴드 하나로도 마음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 말놀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야말로 탄력 있는 말의 재미 그대로여서 말의 재미를 잘 아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뻐 안에는 이뻐가 들어 있다/ 잘 봐/ 왼손으로 ‘기’, 오른손으로 ‘뻐’를 잡고/ 쭈욱 늘리는 거야/ 고무줄처럼 말이야/ 기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뻐/ 어때, 진짜지?

-「기뻐의 비밀」부분
이 시를 읽어주면서 두 손가락으로 고무밴드를 늘였다 줄였다 하는데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그 고무줄이 말을 하는 마술을 가진 것처럼 무척이나 가지고 싶어 한다. 시가 말에서 나오듯이 요리조리 놀려먹든 아껴먹든 잘 다루고 쓰면 멋진 시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기뻐 안에 이뻐가 들어있기에 누군가 좋은 말을 해주면 날아오를듯 하고 어깨가 저절로 으쓱해지는 것이듯이. 말에 갇혀 있다면 절대 만날 수 없는 친구와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이안 시인의 재미주의 동시라고 해도 좋다.
사실 아이들은 시인보다 먼저 말의 재미를 아는 법인데, 어른들의 세계에 갇혀버린 구슬이어서 재미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놀아주려는 마음이 굴뚝 같은 어른을 만나면 머리 꼭대기까지 오르려는 재미주의자들 본성을 드러낸다. 고무줄 하나의 기뻐의 비밀이 담겨 있음은 풀놀이나 꽃놀이, 벌레 놀이, 어둠 놀이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어쩌면 그림자처럼 늘 자신을 따라다니면서 속삭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랑 같이 있어 줄게
나만은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아
-<그림자 약속> 전문
이번 동시집에는 그림자가 많이 등장하는데, 시인과 어린 독자들의 다른 모습 같다. 시가 그렇다. 늘 곁을 떠나지 않는 그림자처럼 기쁘거나 슬프거나 화가 날 때도 말 상대가 되어주고 용기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줄 하나 빠뜨려서 '거미로 살고 있지만/실은 나 개미야'(<거미>)에 나오듯 '줄도 못 치는 거미라고/정말 개미처럼 하고 다닌다고/놀리는 게 말이'이 안 되는 존재임을 시인은 알고 있다.

그래서 시집 1부의 대표시가 <아홉 살 시인 선언>인데, 이것도 시인의 영향이 크다. 시인를 만나 시인이 되기로 하고 선언에 이르는 아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어린들이 시의 맛을 알게 하기보다는 어리니까, 아직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 전이니까 감성을 싹틔워주기 위해,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여러 번 타본 경력을 이어가기 위해 쓰게 하는 것이 시라면 이런 그러나올 수 없다.

 

난 결심했어 시인이 되기로

선생님이 그러는데 시는 아름다운 거래

난 다른 게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이 되겠다는 거야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이

안 아름다울 순 없잖아?

시인에게는 연필과 수첩만 있으면 된대

그게 시인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무기라는 거야

그 둘만 가지고 세상과 맞서는 거지

아름답지 않니?

백 살까지 쓰고도 남을

연필과 수첩을 모아 두었어

나는 나를 아껴 쓸 거야

자면서도 읽고 쓰고 바라볼 테야

글씨는 작을수록 좋아

 

-<아홉 살 시인 선언>

 

이 시의 주석에는 아홉 살에 <연필과 수첩과 시인>이란 멋진 시를 쓴 고현주 어린이에게 바친다고 적혀 있다. 이것이 시인이 동시집을 들고 학교 현장과 어린이시인학교에서 달달 외운 시와 고무줄 같은 탄성 있는 말로 좋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말은 탄성과 회복력,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의 힘을 모두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감자
난 속이 꺼멓게
썩어 가면서도 웃는구나?
물었더니,

나는 썩으면서 싹을 내거든
그래서 웃으면서 썩는 거야
대답해서 깜짝 놀랐다

-「반 가른 감자가 웃는 얼굴 모양을 하고 있어서」 전문
'썩'에서 하나만 바꾸니 '싹'이 되고, 그 의미는 전혀 다른 말이 된다. 썩어야 싹이 나오는 감자가 된다는 발상은 상상 이전에 말에 갇혀 있던 재미의 물꼬를 튼 것일 뿐이다. 마치 세상 모든 만물의 이치가 그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알려고 가까이 다가가면 그만큼 다가오는 세계인 것이 시 쓰기의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책 한 권
읽으면
힘이불
끈솟아요!*
 
오늘은 책 읽다가
얼굴에 덮고
자야지

*전주에 있는 책방 '잘 익은 언어들' 입간판에 여덟 살 민준기 어린이가 써 놓은 문장.

 

이 시만 봐도 아이들은 미래에서 온 존재이자 싹이지 않은가. 행갈이이를 잘못 했을 것 같지만 힘이불이 되어 있어서 시인에게 이렇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지 않은가. 하루에도 몇 십 명씩 어린 시인이 탄생하는 것을 보면 아름답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믿는 구석일 수밖에.

 

나를 믿는다면

말리진 않을게

하지만 그전에 알아 둘 게 있어

 

네가 한 손으로 들기엔

난 너무 무거워

한쪽은 뭉뚝하고

다른 쪽은 잔뜩 날이 서 있지

 

딴생각을 하다간

쿵!

발등을 다칠지도 몰라

 

그런데도 네가 나를 믿는다면

난 할 수 없이

구석이 될 수밖에

 

네가 외로울 때

찾아와 서성거리다가 가기 좋은

 

네가 믿는

구석이 될 수밖에

 

-<구석이 되고 싶은 믿는 도끼> 전문

 

요즘 시를 잘못 알고 쓰고 읽고 있는 아이들은 딴생각을 할 줄 모른다. 딴생각하면 큰일 나는 줄 안다. 믿는 구석, 아니 구석이란 말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림자, 틈. 구멍, 거미와 개미가 오르는 꽃과 나무의 달콤하고 시큼한 것을 모르면서 신기와 불쌍병에 걸려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기뻐의 비밀>에 빠져보게 하면 고무줄 하나 갖고 싶어 손을 드는 아이로 금방 변신하고 자신 안에 가둬둔 말의 재미를 하나 둘 꺼내들 것이다. "말 없는 사전의 혓바닥 같은/라일락 잎 하나를/잘 말려 둔 일//혀를 갖고도/사전은 말을 안 할 뿐"(<일 년 동안 국어사전이 한 일>)이라는 알쏭달쏭한 시의 비밀도 금방 알아차리고, 건너편에 있는 "만나는 것 하나하나 밑줄 그으며/온 말"을(<지렁이 말을 믿자>)까지 금세 눈치채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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