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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은 강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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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도깨비 2022. 3. 17.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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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은 강으로 흐른다

- 청주의 골목 산책

 

 

골목은 산도産道

골목은 우리가 태어난 집들과 이어지는 탯줄과 같다. 집을 오가는 단순한 길에서 벗어나 집과 집을 이어주고 이웃과 사회를 이어주면서 거대한 강으로 흐르는 우리들의 삶 그 자체였다. 빠르게 도시가 변하면서 골목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아파트로 인한 통로와 계단, 엘리베이터로 끊기기도 하였지만 넓고 빠른 도로로 인하여 골목이라 말할 수 있는 곳이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작 토박이들은 청주의 골목을 중심으로 한 도시 풍경이 그리 많이 바뀐 것은 아니라고 여기지만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나 유년기나 성장기 한 켠을 보냈던 사람들은 몰라보게 바뀌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오래 청주에 산 사람들은 구도심이 되어버린 청주의 옛 본거지들을 중심으로 기억하고 외부에서 다시 들어오는 사람들은 눈과 들이었거나 산이었던 외곽을 중심으로 신도시가 되어버린 곳들을 먼저 보고 몰라보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영화위원회에서 청주를 영화의 촬영지로 홍보하면서 듣는 소리가 청주는 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이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장소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빠르게 변하여 80만을 넘는 인구수와 기하급수로 생기는 듯한 아파트 성벽으로 인한 속도감 때문에 아직도 살아있는 곳곳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청주가 구도심을 남기고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골목의 삶을 근간으로 한 이야기는 남아있다. 기억의 공간인 만큼 시간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기록이 필요하다. 영상 자료뿐이 아니라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골목에 살고 있는 사람과 기억의 공간으로 잊지 않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아나로그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단순한 골목의 이야기가 아닐 청주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만들어냈던 흔적을 끌어모아 자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구도심을 중심으로 하여 네 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다시 골목의 이야기를 찾아 떠났다. 이렇게 나눈 근거는 걷기 좋은 길, 천천히 걸으면서 본연의 청주를 볼 수 있는 슬로우 시티로서의 지점을 그려나가자는 것이다. 청주에 오면 누구나 청주길을 걸어보게 하면서 7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다룬 영화를 떠올려보는 것이다.

 

첫째, 연초제조창이 있었던 안덕벌 주변 골목을 시작으로 수암골을 지나 성안길로 접어드는 길을 걸어

둘째, 성안길을 걸어가며 철당간과 남석교라는 상징을 안고 육거리시장과 남주동을 잇는 구도심의 알짜배기 골목을 찾고,

셋째, 또 다른 구도심 중 정주 공간으로 안온한 삶을 보여주던 우암동과 내덕동 골목과

넷째, 무심천을 끼고 청주의 번영과 쇠락을 함께 간직하고 있는 제사공장과 시외버스터미널을 끼고 있었던 사직동 일원을 걷는 것이다.

 

1. 담배 냄새 나고 돼지똥 냄새 나던 길, 안덕벌

여기가 손두부 장사, 콩나물 장사해서 벌어먹고 살았어. 보도연맹으로 끌려가서 죽은 사람들이 많아 혼자 사는 아줌마들이 많았어. 출구 같은 곳이 없었던 시절이니까. 그러니 특별한 소득이 없으니. 제조창 다니는 사람이 제일 좋은 직업이고, 그 다음이 신흥제분이었으니까. 여기가 주로 순흥 안씨들이 많이 살았어.”

 

다 때가 있다

안덕벌에 유일한 목욕탕이었던 건물 창에 붙은 광고 문구처럼 안덕벌의 때는 언제였을까?

덕벌 터주대감인 이세우 어르신이 말하는 담배공장 시절이었을까? 문화제조창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국립미술관까지 들어선 지금일까? 안덕벌에 어울리는 때는 골목이 살아있던 때였을 것이다.

 

청주대학교에서 여기 넘어오는 데가 골목이 있었어. 바람막이라고 해서 법인정사라고 절이 있는 약수터 고개 말인데 산성 쪽에서 넘어오는 길이 있었지. 입구에 서낭당이 하나 있었고 장승이 있었어. 큰 버드나무 있는 데에 돌을 하날 세워 놓고 정월 보름이 되면 새끼줄을 꼬아 소나무 가지 꺾어서 꽂고 버드나무에 칭칭 감았지.”

 

그 시절을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그림을 잡힐 것이다. 실제로 변한 것이라면 버드나무를 신주 삼아 제를 올리던 그 믿음이 변한 것이다.

내덕초등학교 앞이 그 시절의 광장이자 정류장이라고 치면 바로 앞 문구사 건물이었던 곳에 새로 들어선 융성이발소 옆에 장승고지라 부르던 큰 버드나무가 있었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수구막이라는 부르는. 지킬 , 입 구 자,

 

내덕초등학교 앞 장승고지 자리

 

조그만한 마차 하나 다닐 정도 되는 길이 되는 도랑이 있었던 시절 이발소 건물 바로 앞에 장승고지라고 해서 큰 버드나무에 돌을 하나 세워놨었다. 동네 사람들이 수구막이라고 부르는. 지킬 수, 입 구, 단순하면서도 간절한 믿음 그 자체였. 장승고지가 있던 자리는 이어 학교가 들어서고 안덕벌 버스 종점이 되었던 것도 마을 사람들의 염원이었던 셈이다.

 

“77년도인가에 버스가 들어왔지. 여기가 복개되기 전에는 도랑이었으니까 교육 상황마저 열악할 때니까. 아카시아나무 같은 걸 다른 데에서 가져와서 걸쳐놓고 다니던 시절이야. 지주들을 찾아다니며 내덕초등학교 유치위원장 위촉을 받아서 운동장을 닦고 학부형들 불러가지고 세숫대야에 돌을 나르고 고른 거야. 버스공동관리위원회에다 물어봤더니, 주차장 확보를 하면 차를 보내준다고 해서 말이야.”

 

내덕초등학교 앞 안덕벌 버스 종점 자리

우여곡절이 많았던 사업이었다. 안덕벌은 또 다른 섬이나 다름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안덕벌 간다 하면 택시마저 가기 꺼려하는 곳이었으니. 비 올 때 택시 타고 안덕벌 간다고 하면 세차비도 안 나오니 내덕칠거리쯤에 내려주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들머리에서 안덕벌 안쪽까지 포장을 하는 일은 큰 사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그때의 골목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콩나물에 이어 소득원이었던 것은 소, 돼지였던 시절에는 축사가 낀 집들이 많았다. 말이 축사지 한두 마리 키우며 비 오는 날에는 소, 돼지 똥을 도랑에 들이붓는 시절이었다.

 

도랑에 관을 묻고 포장하기 전에 안덕벌에서 시내로 나가는 길은 콩나물과 소, 돼지를 팔러 나가는 길이었다. 청주대학교 예술대학으로 넘어가 도서관 쪽을 따라 중문을 거쳐 동암파출소를 지나는 길.

 

안덕벌 대성이용원

 

 

그때는 육거리시장보다 주로 남주동시장을 다녔지. 둑방 너머 주차장으로 쓰는 데가 가축시장이었어. 안덕벌 사람들이 주로 장 보는 데야. 나물을 캐다가 팔거나 콩나물 길러서 팔고 소, 돼지를 팔러 가는 사람도 있었지. 대부분 장사꾼들한테 팔았지만.”

 

담배공장

안덕벌을 대표하는 담배공장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아직도 다 정리되지 않은 서민의 역사이기도 하다. 어르신들 말로 청주 시내에서 제일 큰 회사였으니 말이다.

 

주로 여기 사람들이 많이 다녔지. 담배공장이 있으니 냄새도 많이 나고 까치담배를 사다가 파는 사람들도 많았지. 신문지 같은 걸로 곽을 만들어서 팔았어. 요즘으로 치면 마약같이 밀매하는 거지. 어디에 가면 까치담배가 있다는 걸 알아가지고. 요즘에는 그런게 없지만, 겨울만 되면 술 내기다 해서 화투들 치고 윷도 치고 했지.”

 

안덕벌 바깥덕벌

이쯤해서 바깥 사람이라면 왜 안덕벌이 있고 내덕동이 있었을까 궁금할 것이다. 내덕동의 가 안쪽이니 내덕동 일대까지 모두 이르는 말이지 않은가.

 

안덕벌 고개

 

여기가 일제때 사주면 내덕정()이야. 청주대학교 중문 쪽으로는 외덕정, 그러니까 바깥덕벌이야. 여기가 안덕벌. 우리는 우암동이라고 안 부르고 바깥덕벌이라고 불렀어. 안덕벌 안쪽에 정부에서 집을 지어줘서 동네가 하나 용사터가 있었고, 청주대학교 북문 위쪽으로 해서 문화산업단지 쪽에 참나무가 많아서 참나무배기라고도 불렀지. 청주대학교 위쪽으로 우암산에 정초면 올라가서 고사를 지내던 선달바위가 있었지.”

 

어르신의 기억을 타고 골목을 걷다 보니 안덕벌은 새 둥지처럼 들어앉은 섬이자 구구절절 삶의 애환이 말없이 도사린 곳이었다. 우암동과 내덕동이라 부르는 작은 강으로 질금질금 내려가던 이야기의 원천. 더 많은 이야기는 골목을 만들었던 분들이 살아 계실 때 안덕벌 골목사 같은 것으로 집대성되어야 할 것이다.

 

2. 시내 간다고 했을 때의 그 시내, 성안길과 육거리시장

지금은 없어졌지만 성안길이 시작되는 지하상가를 건너 일선당 서점에서 약속을 잡고 사람을 만나던 시절이 있었다. 으레 책을 보는 시늉을 하며 기다리다가 성안길을 걸어 들어가 용두사지 철당간 자리 옆에 있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동강백화점에서 돈까스를 썰던. 극장과 극장 사이 난 줄 따라 영화 필름통이 옮겨가는 걸 바라보며 다음 영화를 기다리던 시절. 시내 간다고 때 빼고 광내던 시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옛날 일이다. 명절이면 육거리시장까지 내려가 어머니가 사주시는 옷에 설레던 시절.

 

영화감독이 된다면 이런 대사로 시작하는 영화를 찍고 싶었다. 남석교를 지나 용두사에 오른 아가씨와 하인.

아씨, 밤바람이 찹니다요, 그냥 돌아가심이…….”

아니야, 넌 저 바람 속에서 들리지 않니? 난 벌써 용두사 당간에 부는 바람이 보여. 바람에 우뚝 서서 구름 밖으로 흘러가는 하늘이. 구리 돛대에 나부끼는 부처님의 웃음까지도. 낮 동안 금빛 모래 반짝이는 무심천을 흘러 강으로 바다로 가는 불법의 진리를 말이야.”

남석교를 건너 용두사에 염불을 드리러 온 스토리라인으로 시작하는 성안의 이야기. 육거리시장 아래 잠든 남석교를 복원하고 철당간을 지줏대 삼아 컴퓨터그래픽으로 지워낸 건물과 다시 입힌 성안의 옛집들을 복원하며 기대한 공간이 생기고, 병든 아가씨의 염원대로 용두사 당간에 부는 바람이 보일 것 같다.

 

청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재조사할 적에 신궁전 떡집아래 석교를 발견했대요. 이것이 만약 문화재로 지정된다면 상인들이 반대를 하고 안 돼요. 다리 위에 유리를 씌우자는 말도 있었으나 장사가 어려워지니까.”

남석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돌다리였으나 땅에 묻힌 기억일 뿐이다. 살기 위해 덮은 것을 다시 헤집어 문화재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돌다리가 자연스레 사람들이 밟고 건너는 다리라면 모를까 유리를 씌워 보여주는 것보다는 기억 속에 묻힌 것이 나은 것일까.

 

남주동시장 솥가게

 

육거리시장은 남주동시장에 비해 늦게 형성된 시장이다. 원래 시장이라고 하면 제일교회 앞길이었다. 이소아과 골목까지 이어진 곳이었다. 서문동과 남주동 약전골목을 잇는 교통 요지로 들어선 것이 90년대이다.

 

남주동은 어물전이었어요. 교통이 불편하니까 차흠 서문시장과 육거리쪽으로 올라온 거죠. 그쪽에는 목물전, 솥전, 우전, 청과물 시장에 대장간까지 있었죠.”(신영식 구술)

육거리시장을 비껴서 남주동 시장의 흔적이 있는 골목쪽으로 오니 조금이나마 번성했던 시절을 찾을 수 있다. 창고로 쓰였을 오래된 건물부터 솥전을 명맥을 잇는 철물점으로부터 저 멀리 안덕벌에서 걸어 걸어 오던 사람들을 보는 것 같다.

 

 

솥전은 살림살이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니 번창했을 시절 가게마다 높이 쌓아놓았을 가마솥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릴 적에는 이곳까지 와서 보석같이 알록달록하고 반짝이는 것들을 주웠던 기억이 있다. 조금만 더 가면 가축시장이 있어 냄새 나고 무서운 곳이었으나 한편으로 신비한 것들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 시장이었던 것 같다.

 

육거리시장으로 나오니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석교동, 남주동, 남문로를 아우르는 전국에서 손에 꼽히는 재래시장의 역사가 보였다. 처음에는 육거리시장 쪽으로 몰리는 노점상들을 리어카로 실어 남주동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면 다시 장사하러 육거리시장으로 몰려오기를 반복하면서 결국에는 간선도로까지 들어찬 5일장이 되었다. 가설 창고까지 지어 장사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길이 장삿길에 묻혀버린 꼴이다. 교통 체증을 일으킨다고 단속을 하던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은 육거리시장을 대표하는 풍경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육거리시장의 옛모습은 어땠을까? 제일교회 사거리 쪽에는 헌병대 특무대가 있던 자리로 어르신들은 드센 자리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드라마와 영화에서 기억하던 일본 헌병대가 들어선 자리였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공교롭게도 지금의 우성축산물 자리가 석교동 파출소였고 그곳이 헌병대 자리였다니 괜히 하는 말이 아닌 듯하다. 아무나 못 사는 자리라고 해서 길흉화복에 따라 후대 사람들의 명운을 좌우한다고 믿는 것일까? 육거리시장 건너 고려예식장 뒤에 기마대 보신탕이라는 이름도 헌병대 기마대 흔적이라고 치면 맞는 말 같다.

육거리시장 안에도 골목은 있다. 성안길이 시작되는 북문로 1가보다 남문로 1가가 번성했던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면 육거리시장은 헌병대가 말해주듯 권세 있는 사람들의 집이 몰려있던 골목이라고 할 수 있다. 충북철물 자리가 임광토건으로 임광수 씨 생가이고 조산소를 한 곳이 충청대 학장을 지낸 김도영 씨의 생가였으니 그들을 배출한 석교국민학교는 명문인 셈이다. 그리고 웃 가게가 시작되는 명동의류 자리가 초대 충북도지사를 지낸 이명구 씨 생가이고 그의 아들이 명동의류 자리에서 신명이비인후과를 했고 흔히 그가 나온 학교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청주약국에서 조금 올라가면 소금장사로 유명했던 박성배 씨의 건물이 나오고, 그 자리는 MBC 자리이기도 하다. 그 당시 내륙에서 염전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면 알 만한 대목이다.

그리고 박재국 씨가 운영하던 건영화물이 있었다. 박재국 씨의 처남들이 정치과를 하던 자리가 올포유옷 가게 자리다. 그러니 육거리시장이 있는 석교동 일대는 청주에서 난다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재계 사람들, 정치하는 사람들이 모여 마작을 즐기며 한 세월 보내던 곳에 육거리시장이었던 것이다.

 

여기 터주대감들이 청주의 명사였지요. ‘구름손자리는 국영기업체 감사로 나갔던 분 집이고 맑은 거울옆에 동명약국, 레슬러 이왕표의 형이 하던 자리를 인수 받아 하는 반씨 닭집, 청원군 의장하던 분이 하던 석다방 건물. 처음 육거리시장 이름이 아니라 석교동 시장으로만 부르던 시절이에요.”(신영식 구술)

 

시장은 돈을 버는 곳이자 봉사하는 곳

시장 사람들은 개성이 강하다. 재래시장이라고 해서 인심 좋고 화목한 전형인 것처럼 방송에서 포장하지만 억척같이 살아온 만만치 않은 굴곡의 삶을 살아낸 사람들이다. 육거리시장 번영회로 조직이 되어 나날이 커지기 전과 후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르다. 오랜 이야기 단골인 석교닭집 김인숙 씨는 이렇게 말한다.

 

시장이 마트랑 다른 것이 뭐나면, 마트는 오너가 하나라 괜찮지만 시장은 진짜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일해 나가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내 사업을 하려면 큰일부터 하고 돈 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회장 자리도 내려놓고 봉사해야만 하는 곳이에요. 여기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여자들이 나서면 꼴값한다고 말하던 시절 부녀회를 끼면 된다고 할 만큼 봉사했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여자 입심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어요. 남자들은 똑똑해서 말을 정확하게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만큼 설득력이 있으니까 가능한 거예요.”

육거리시장은 부녀회를 비롯하여 상인 조직의 봉사 정신 아래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시장이 그렇듯 간신히 명맥만 잇는 곳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장사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상인 조직으로서 봉사해야만 거대한 시장이 활성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김인숙 씨는 아직도 상인이 돌만 벌면 된다는 생각보다는 봉사할 정신이 앞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육거리시장 전체가 하나의 골목이나 다름없다. 전집 골목, 떡집 골목, 옷 가게 골목으로 다시 나누어지며 사람들을 맞는 곳이다. 미용실마저 가까운 시골 할머니들을 끌어 모으는 골목이다. 시장에 오면 사람 냄새가 나서 열일 제치고 버스 갈아타고 시장에 오는 것이다.

육거리시장은 새벽을 불러일으키는 골목이기도 했다. 청주 근교 사람들이 도깨비 시장에 모여들어 반짝 하고 아침을 부르면 농방 골목이라고도 부르던 가구 골목이 깨어나고 육거리시장이 또 다른 농사 짓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사람 죽으란 법 없더라고. 맨 처음 수박 농사 지으면서 고추농사 짓고, 밤증에 올갱이 잡으러 다녔어. 그거 재미를 붙여갖고 얼음이 안 깨진 데는 미끄러져 엎으러질까봐 엉금엉금 기어서 들어가서, 눈보라 치고 비오는 대도 잡았지. 밤에 잡고 낮에 잡고, 한 이틀 잡아서 육거리시장 오면 과일인지 뭐 살구 그런 거 갖다놓고 파는 할머니들이 많아. 거기 옆에 끼어서 파는데 그 할머니들 과일보다 내 올갱이가 더 쉽게 나가데. 그렇게 얼른 다 팔아갖구서는 집엘 왔네.”(신동수 구술)

멀리 미원에서 올갱이 잡아 먹여 살렸던 어르신도 육거리시장 골목의 산증인이다. 처음 시장에 나올 때는 오래된 장사처럼 여물지도 못해서 시장으로 무조건 들어와선 뭐 사란 소리도 못 하고 댕기지도 못 허구 앉았는데, 거기 내 자리라 카며 저리 가라 카고, 비키라 하고 막 그라네. , 그래서 조금 더 올라가서 앉아서 팔고, 사라 소리도 못 햐던 사람들도 장사의 신이 되었던 곳, 시장이라는 골목.

 

3. 우암과 내덕의 골목

내덕의 다른 말은 안터벌이다. ‘안터이 합쳐진 이름이니 우암산 자락 아래 청주의 전형적인 모습이 너른 평지에 걸친 마을이다. 내덕과 우암 사이에 덕벌이 있었다. 무심천 동쪽에 구도심이 걸쳐 있어서 정주 공간이라고 해야 맞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우암초등학교와 주성초등학교에 다니던 학생 수를 헤아려 보면 이곳이 전형적인 주택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자잘한 골목도 많았다.

 

우암초등학교에 다니다가 주성초등학교로 전학 갔어요. 우암에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주성으로 갔어요. 중간놀이 시간에 모이면 촘촘하게 아이들로 꽉 찼으니까요. 그래서 우암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많아서 개편이 되었어요. 그래서 한참 걸어서 갔던 기억이 나요.”(우부순 구술)

주성초등학교도 한 반에 6,70명씩 8반에 2부제 수업을 할 만큼 아이들이 많았으니 우암동과 내덕동이야말로 미로와 같은 골목지도를 그릴만 하다.

 

안덕벌에서 시내로 가는 길로 꼽았던 청주대학교 부지도 내덕동에 속한다. 그런데 청주대학교 바로 앞은 우암동이다. 행정지명으로 갈라져 있지만 우암과 내덕은 한몸이나 마찬가지다. 우암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있어서 청주대학교 앞 골목 일대는 미나리꽝이었다고 한다. 미나리꽝 앞으로는 비석거리가 있는 안덕벌과 바깥덕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셈이다. 어느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 이름인 수안들도 청주농고와 동부경찰서 일대를 말하는 들이었던 것처럼 모여 살기 좋은 골목이었다. 무엇보다 기차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곳이어서 정주 조건으로서 최상인 곳이었을 것이다. 1968, 청주시청 옆에 있던 청주역이 우암동으로 옮겼을 때는 향군로와 청주역을 근간으로 문화주택이라고 할 수 있는 반듯한 주택들이 들어섰기에 청주 근교에서 이사 온 세대들 또한 많았다.

 

북부시장 위쪽 우암동 골목

 

육거리시장이 청주 근교와 청주를 아우르는 시장이었다면 북부시장은 내덕과 우암동을 아우르는 시장이었다.

북부시장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고/움푹한 바닥엔 무엇이든 잘 고인다/수백 마리 닭을 튀겨낸 기름은 진흙처럼 끈적하고/쥐가 밟고 지나간 라아드 깡통의 지방 덩어리는/다시 만두를 튀겨냈으며/시장 건물 2층에 5원씩 내고 볼일 보는 공중화장실에서는/물컹한 냄새가 지상으로 쉼 없이 내리고 있었다”(우부순 시, <북부시장> 부분)는 시절은 근교의 시골에서 이사 와 이곳의 인구수를 늘여놓던 때이다. 시골에서 이사 와서 할 수 있는 것 시장 좌판에서 무어이라도 파는 것이다.

 

밤만 되면 골목에서 숨바꼭질하고 놀았어요. 철길 따라 걸어서 서커스단 구경을 가기도 하고 팔결다리까지도 갔어요. 문화방송 자리에 청주역이 있었으니까요. 아빠가 공무원인 친구 집에 갔던 적이 있는데 걔네 아빠가 아이스크림을 사왔던 줄 생각은 안 하고 빨리 집에 가라고 해서 그냥 왔던 적도 있어요. 청기와집이라고 조금 잘 사는 할아버지가 수발드는 아주머니와 살던 집도 있었고. 이렇게 걸어볼 생각을 못 했어요. 골목길은 더 넓어진 것 같아요. 타일 붙인 집들이 많았고, 호님이네 집, 점빵집이 있었어요. 흙길이었으니까 밤에 모여서 구덩이를 파기도 했어요. 구덩이를 파서 곤죽이 되도록 흙을 섞고 연탄재를 살짝 얹어서 담 뒤에 숨어서 누가 빠지나 지켜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가 빠졌는데 하필이면 같이 일이 꾸몄던 아이 엄마였던 기억도 있어요.”(우부순 구술)

 

에덴교회를 끼고 돌아 놀이터를 지나 옛날에는 이발소였던 건물이 전형적인 옛날 건물이이었다.

지금은 이삿짐센터가 들어섰고, 세입자로 보이는 분도 이발소였다는 것만 알려줄 뿐이다. 골목을 떠난 사람들 기억에 그날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이 붙어 있는 타일 무늬가 정겹게 느껴진다고 할까. 놀이터 옆 이발소 건물을 지나면 다른 곳과 다르게 청주역까지 곧게 지른 골목이었다.

 

우암동 골목에 있는 굿집

 

문화방송 자리에 역이 있어서 텔레비전 보러 가기도 했어요. 역전에 커다란 텔레비전 두 개가 있어서 오빠와 함께 텔레비전 보러 갔다가 붙잡혀 오기도 하고. 거기까지 가는 길은 반듯하니 길쭉하게 이어졌어요. 또 기찻길이 지나는 공터에 땅을 파서 요새처럼 해놓고 들어가 있는 것만으로 좋아서 해가 지도록 놀았던 기억도 나요. 무심천에도 자주 갔었는데 청주역을 지나 무심천을 가로지르는 철교가 있었던 그 아래에는 거지들이 살아서 불우이웃돕기 차원에서 돈을 모아 전달한 적도 있어요.”

방영웅 소설가의 장편소설 분례기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는 곳인 듯싶다. 그런 철교가 철거되는 날은 근처 주민들의 큰 구경거리이기도 했다. 카운드다운과 함께 묵직한 시멘트 다리가 감쪽같이 폭파되어 사라지던 날은 마법과도 같은 일이었다.

청주역에 이서 문화방송이 옮겨올 때까지 우암동은 기찻길이 골목 아이들의 새로운 놀이거리였다. 철로 위에 대못을 놓아 납작하게 펴지면 그것으로 칼을 만들거나 동전을 납작하게 해서 목걸이를 만들기도 하면서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재미있게 놀았다고 한다.

 

우암동 골목길은 아직도 스치기만 해도 이야기를 쏟아낼 것처럼 보인다. 변한다고 꾸미기는 했으나 속을 들여다 보면 그대로이다. 재개발구역으로 묶였다가 풀린 것도 그런 것일까? 그곳만이 간직한 이야기를 풀어 최대한 골목을 유지한 채 새로운 정주 공간으로 바꾸라는 뜻만 같다.

 

4. 사직의 길

80년대 초반 무심천을 건너 공설운동장 앞 광장(지금은 주차장과 주차시스템으로 바뀌었지만)으로 테니스를 치러 다니던 적이 있다. 코트에 갈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테니스를 쳤다. 혼자 온 사람은 높은 옹벽에 치고 받기를 거듭했고 실력이 엇비슷한 사람들끼리 마주 보고 가상의 코트를 그려놓고 공을 주고 받았다. 공설운동장은 소년체육대회 때 마스게임을 하고 합창을 했던 곳이다. 뜨거운 여름날 달아오른 시멘트 스탠드에 서서 합창을 하다 쓰러지던 학생들도 있었다. 공설운동장으로 걸어오는 길이 사직의 길만 같았다. 새벽에 일어나 무심천 돌다리를 건너 사직1동사무소가 있는 길을 가로질러 청주의료원으로 오르는 가파른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막바지 오르막쯤에 사자 동상이 있었다. 시멘트로 만든 사자가 달동네를 굽어보며 지키고 있었다. 수동이 달동네라고 하지만 사직1동 체육관 가는 길만큼 가파르지는 않았을 만큼 사자의 갈기와 뒷다리가 실감나게 느껴졌다. 사자와의 인연은 훗날 골목을 쏘다니며 대문마다 달린 사자 문고리와 이어졌다.

 

청주의료원 언덕에서 바라본 사직1동

 

운천동 쪽 택지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였을 것이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사직동 어르신들은 사직1동 지역과 맞닿는 무심천 일대는 뽕밭이었다고 한다.

잠실이라고 했지. 없는 사람들은 뽕순 따다 삶아 먹고 그랬어요. 뽕나무 사이에는 거름을 하려고 자운영을 심고 그랬어요. 여름이면 우리 키보다 더 커요. 그러면 오돌개를 따먹으며 숨바꼭질하고 깡통 차기, 자치기하며 놀았어요. 빡빡머리산(평화아파트 옆) 꼭대기 산소에서 성냥개비 화토 치고, 까치담배 사서 피우고, 뽕밭 옆 참외밭에서 참외 따먹고 목욕하고 그랬어요.”(지청식 구술)

목욕탕이 없어서 밤이면 무심천에 나와서 단체로 멱을 감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 으레 똥물 이야기가 나온다. 똥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는. 지금의 무심천과 비교할 일이 아니다. 대학 시절에 신입생 환영회를 하면 마지막으로 나오는 곳이 무심천이었고 그때까지도 똥물이었으니 눈 질끈 감고 놀았던 셈이다. 그래서 사직동은 무심천과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골목골목의 오폐수가 무심천으로 흘러가고 그 물에 멱을 감던 시절이었으니. 그리고 뽕밭은 청주 제2의 회사라고 할 수 있는 제사공장과 한몸으로 엮이니 더할 나위 없다. 제사공장의 이름은 남한흥산. 담배공장처럼 청주의 몇 안 되는 회사였다. 겨우 초등학교 졸업하면 이발소로 가거나 양복점, 공장에 가듯이 제사공장에 취직하면 촉망받던 시절이었다. 제사공장 전무까지 지냈다는 이상훈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일하는 사람이 팔백 명이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오십 명 뽑는데 서울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천 명이 넘게 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제사공장에서 나오는 번데기도 엄청 났다고 한다.

 

사직1동 골목

 

 

뽕잎밖에 안 먹은 거니 깨끗했죠. 못 사는 사람들이 달라고 하면 한 됫박씩 퍼 줬는데……. 며칠씩 교대로 매일 와서 나중엔 감당을 못 하겠데요. 시내에서도 오고, 나중에는 표를 만들었어요. 장사하려고 사 가는 사람에 시청 직원도 달라지 도청에서도 달라지. 여기 번데기가 참 맛있었어요.”(이상훈 구술)

지금은 갈대와 유채꽃 등속들로 천변이 가득하지만 뽕나무 잎으로 물결쳤을 시절을 떠올려보면 애잔하다. “내 마음에 오래 살라고 안 하는 게 비결이라고 그래요. 오래 살라고 하면 대개 일찍 죽어요. 마음을 비우고 살아야 돼요. 그 대신 남한테 나쁜 짓 안 하고, 나쁜 사람은 아무리 겉으로 아니래두 사람이 양심이라는 게 있어요. 딴 사람은 다 속여도 자기가 자기는 못 속여요. 그런 것만 없으면 괜찮아요. (줄임) 공장에 다니던 사람들도 다 죽었어요. 죽을 때 기다리는 것 뿐이여. 의욕이 있어, 희망이 있어, 어떤 뭘 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 그래 죽은 거나 똑같지. 실컷 젊어서 많이 하셔.”(이상훈 구술) 하는 목소리가 골목마다 묻어나는 것 같다.

 

사직1동 골목에서 만난 자전거

사직1동 주민센터 앞길에는 오래된 백양세탁소가 있다. 아크릴 간판으로 만들어서 옛스러운데 어느 설치미술가가 사들여서 전시에 내놓기도 했다. 온양에서 세탁소를 하다가 교육도시라는 말을 듣고 온 전용례 씨의 기억에 따르면, 교육자나 공무원들이 많이 살던 동네였다고 한다. 충북대 학장에 교육감, 청주시장도 사직동 살던 시절이니 자리 하나는 잘 잡은 것이다. 그러나 지끔은 현재 제일루 낙후됐다구 그라는디 재개발한다구 그러는디 시끄러워 죽겠.”는 곳이 되어버렸다.

 

암튼 일이 그렇게 많았었지. 그때는 그짓말 아니라 밤 12시까지 하구, 한 시까지도 일을 해구 그랬응게. 가만히 있어도 일이 많은데 수거하러 다니지도 않았으니게. 여가 부촌이니께 전부 다 양복 같은 거였쥬. 다 공무원덜이니께. 여가 달라진 게 뭐냐면은 옛날에는 신사복을 많이 했는디 지끔은 할아버지 할머니들 잠바때기 이런 것만 있쥬.”(전용례 구술)

방앗간에서나 봄직한 피댓물 걸어서 모터로 돌리는 세탁 기계를 쓰던 시절 이야기다. 일이 없으면 다른 데로 갔겠지만 전용례 씨 말에 따르면 노다지가 따로 없는 동네였다. 정년퇴직 없이 아직도 세탁 일을 하며 노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것도 영화로운 사직동 시절 덕분이라고 여긴다.

재개발이 되니 안 되니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은 사직1동 골목의 혼잣말이기도 하다. 떠날 사람들은 오래 전에 떠나고 재개발을 바라며 낡은 집에서 사는 사람들만 담장 그대로 다닥다닥 대문을 달고 사는 곳. 빈 집도 많다. 운동장으로 가던 80년대 초반만 해도 사람들도 넘쳐나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의료원으로 오르는 골목마다 빈집 대문에는 도둑 사절이라는 흰 페인트 글씨가 아이러니하게 빛날 뿐이다. 한창 골목 사업한다고 언덕빼기를 쏘다닐 때는 어떤 젊은 부부가 아이를 낳아 잠깐 살다가 간 적이 있다. 버리고 간 살림살이가 그대로 있는 어두컴컴한 집에 언제부터인지 젊은 부부가 살림을 차린 것을 보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동사무소에 부탁을 했는데 오래 살지 못하고 떠나버린 일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오죽하면 빈 집에 들어와 살았을까.

의료원 자리는 온통 밭이었다고 한다. 피난민들이 천막 치고 산 이후로 마을이 생기다 보니 도둑골이라고 부르는 마을도 있었다고 한다. 아편을 피우는 사람들에 세숫대야 같은 세간살이를 훔쳐가서 형사들이 그렇게 불렀다는.

 

그럼에도 골목은 궂은 이야기를 따지지 않고 다 간직하고 있는 듯 길을 열어준다. 일종의 문화자원처럼 아직도 살아있는 골목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들려주면서 모두가 골목에서 태어났고 골목은 떠났지만 여전히 골목과 이어지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체육관을 3학년 때인가 4학년 때인가부터 짓기 시작했는데 여기가 산이었거든요, 그때 집게벌레 잡으러 다녔다고. 부잣집 애는 후레시를 들고 와요. 나머지는 촛불이지 뭐. 집게벌레 한 마리 잡으면 신방 나지. 언덕배기로 올라가면 공터면서 절이 하나 있었고 사촌이 살았고, 외삼촌이 여기 살았고. 닭을 키웠고, 화단에는 포도나무 심고. 봉숭아 같은 것도 심고. 산에서서 총 싸움도 하고 개구리도 많이 잡고. 도마뱀, 풀무치도 잡고. 그게 날개가 커서 예쁘다고. 떼까치(방아깨비) 잡고. 필통에 집게벌레 몇 마리씩 넣어 다녔죠. 하늘소도 잡았는데 돌진애비라고 불렀어. 돌을 잡으면 놓지 않는다고. 십자가 가이생(일본말), 오징어 가이생, 찐돌이, 구슬치기…….”(김성식 구술)

 

육거리에서 미소약국을 하는 김성식 씨의 기억을 보면 한 권의 곤충도감이자 놀이지도를 보는 것 같다. 딱지동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도 골목길에서 얻어들었다. 딱지 둘이 동무가 된다는 말인데 서로 딱지를 떼이면 꿔주는 단순한 협정 같은 것인데 그 말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처럼 들린다. 골목의 아이는 누구나 딱지동물인 셈이다. 골목집 한 집에 세 명에서 많으면 다섯 명 정도 있었으니 같은 나이가 아니더라도 어울려 놀았다. 같은 초등학교 다니면 대충 얼굴 보고 다니고 어울려 노는 딱지동무가 되는 것이다. 사람 맞춰서 노는 찐돌이는 골목을 더 넓게 만드는 마법과 같았을 것이다. 깡통을 멀리 차서 술래가 주우러 간 사이에 숨는 골목 골목의 장소들이 지금처럼 하냥 좁기만 한 골목의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직 60대가 되지 않은 50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골목이 더 한층 젊어진 느낌이다. 신이 나서 이야기의 물꼬를 터가는 구술자는 입에 침이 마를 세가 없다.

쫀드기라고 허리띠처럼 생긴 거 사 먹고, 옅은 심 3원짜리 연필. 책받침 싸움이라고 아세요? 얇은 건 10, 두꺼운 건 20원 하는. 부잣집 애들은 60원짜리 두꺼운 거로 했어요. 중학교 가니까 곤색 운동화 벗고 스파이크 운동화로 신었어요. 그 다음에 프로스펙스 생기고 나이키 생기고.”(김성식 구술)

가파른 골목을 다 오르니 체육관이 보인다. 나이 대에 따라 기억하는 것이 다르지만 구술자의 말을 들어보면 체육관 지붕이 열리면서 마징가제트가 나온다고도 했다. 체육관 지붕에 올라갔던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실없는 거짓말에 지나지 않지만 골목의 이야기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충분히 그렇게 상상할 만한 여유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체육관 꼭대기에 올라간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지. 내가 앵글 팀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지붕 꼭대기로 올라다니면서 일을 한 거야. 그때는 사는 게 너무 힘들었으니까 그런 거 신경도 안 쓰고 다녔지. (줄임) 체육관 지을 때 뼈다귀 씌우면서 올라간 거니까 기초나 같죠. 청주 시내에서 체육관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 본 여자는 나 하나밖에 없다고 내가 강조를 하는데 지금도 새로워요. 당시만 해도 청주에서는 제일 큰 거니까.”(선정숙 구술)

골목을 다니다 보니 지붕이 열리고 마징가제트가 나온다는 믿음을 말끔하게 지워주는 어르신까지 만났다. 고생고생하며 살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 중간 중간 골목의 삶을 이끌어낸 자부심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사는 게 힘든 건 나아지지 않았지만 골목의 삶이 부잣집 부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열심히 산 자부심이지 않을까.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하고 살아놔서 지금은 호강이라고 생각해. 부자 부럽지 않고 호강이고 뭐, 남들 빌딩 갖고 몇 억을 갖고 살아도 나한테 돈 백만 원 있으면 그게 부자 부럽지 않아. 항상 어둡게 안 살고……. (줄임) 지금은 게을러서 못 살지. 자기가 일하기 싫고 게을러서 못 살지.”(선정숙 구술)

그런 삶이 골목을 지켜내고 분가시킨 근간이 되었다.

 

 

여기는 달동네라고 안 하고 고 밑에 기와집들 보고 달동네라고 하는 거요. 우리 집 같은 경우에는 요기 바로 앞에서 버스도 탈 수 있고……. 여기가 막혔으면 여기가 꼭두배기 집이지. 근데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사람 살기는 그만이에요. 자전거 타고 댕기면 땀이 쭉 나지. 얼마나 그걸 나는 고맙게 생각하나 몰라요. 의료원 뒤쪽 사자 동상은 저 왔을 때 있었어요. 그걸 애들이 타고 놀았는데 어느날인가 목이 부러져 나갔어요. 다리도 부러져 나가고. 땅에 꼬꾸라져 있었어요. 철근이 나왔어요. 오래 돼 가지고 어느날인가 동네에 도둑을 맞았는데 보따리를 집었는데 금붙이가 있다고 해서 보니까 가짜 금 도금한 것만 골라놓고 갖다 버렸다고 하대요. 그걸 사자 동상 옆에다 숨겨놓았더라니까. 내가 찾아다 보니까 쓸만 한 것도 많길래 동네 애들 주고 그랬거든요.”(정형숙 구술)

 

오랫동안 통장을 한 정형숙 씨는 의료원 바로 옆 골목에 살며 골목 사업 한다고 할 때 담벼락에 벽화를 흔쾌히 그리도록 돕기도 했다. 가난하지만 인심이 좋아서 살기 좋다고 한다. 집도 예쁘게 꾸미고 살아서 한 번은 드라마에도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변전소 길과 이어지는 또다른 골목

 

옛날에 드라마 시티에서 사진 찍어 갈 때 그때 돈 40만 원 줬어요. 두 시간 찍었는데 텔런드들이 와 가지고. 참 꽃이 이쁘게 잘 피고, 사랑, 추억, 약속, 세 가지를 엮어서 70분 방송을 하는 드라마였는데. (처음에는) 집도 거지 같은데 뭘 쓰냐고 다마 방앗간에서나 봄직한 피댓물 걸어서 모터로 돌리는 세탁 기계를 쓰던 시절 이야기다. 일이 없으면 다른 데로 갔겠지만 전용례 씨 말에 따르면 노다지가 따로 없는 동네였다. 정년퇴직 없이 아직도 세탁 일을 하며 노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것도 영화로운 사직동 시절 덕분이라고 여긴다.

재개발이 되니 안 되니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은 사직1동 골목의 혼잣말이기도 하다. 떠날 사람들은 오래 전에 떠나고 재개발을 바라며 낡은 집에서 사는 사람들만 담장 그대로 다닥다닥 대문을 달고 사는 곳. 빈 집도 많다. 운동장으로 가던 80년대 초반만 해도 사람들도 넘쳐나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의료원으로 오르는 골목마다 빈집 대문에는 도둑 사절이라는 흰 페인트 글씨가 아이러니하게 빛날 뿐이다. 한창 골목 사업한다고 언덕빼기를 쏘다닐 때는 어떤 젊은 부부가 아이를 낳아 잠깐 살다가 간 적이 있다. 버리고 간 살림살이가 그대로 있는 어두컴컴한 집에 언제부터인지 젊은 부부가 살림을 차린 것을 보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동사무소에 부탁을 했는데 오래 살지 못하고 떠나버린 일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오죽하면 빈 집에 들어와 살았을까.

의료원 자리는 온통 밭이었다고 한다. 피난민들이 천막 치고 산 이후로 마을이 생기다 보니 도둑골이라고 부르는 마을도 있었다고 한다. 아편을 피우는 사람들에 세숫대야 같은 세간살이를 훔쳐가서 형사들이 그렇게 불렀다는.

 

그럼에도 골목은 궂은 이야기를 따지지 않고 다 간직하고 있는 듯 길을 열어준다. 일종의 문화자원처럼 아직도 살아있는 골목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들려주면서 모두가 골목에서 태어났고 골목은 떠났지만 여전히 골목과 이어지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체육관을 3학년 때인가 4학년 때인가부터 짓기 시작했는데 여기가 산이었거든요, 그때 집게벌레 잡으러 다녔다고. 부잣집 애는 후레시를 들고 와요. 나머지는 촛불이지 뭐. 집게벌레 한 마리 잡으면 신방 나지. 언덕배기로 올라가면 공터면서 절이 하나 있었고 사촌이 살았고, 외삼촌이 여기 살았고. 닭을 키웠고, 화단에는 포도나무 심고. 봉숭아 같은 것도 심고. 산에서서 총 싸움도 하고 개구리도 많이 잡고. 도마뱀, 풀무치도 잡고. 그게 날개가 커서 예쁘다고. 떼까치(방아깨비) 잡고. 필통에 집게벌레 몇 마리씩 넣어 다녔죠. 하늘소도 잡았는데 돌진애비라고 불렀어. 돌을 잡으면 놓지 않는다고. 십자가 가이생(일본말), 오징어 가이생, 찐돌이, 구슬치기…….”(김성식 구술)

 

육거리에서 미소약국을 하는 김성식 씨의 기억을 보면 한 권의 곤충도감이자 놀이지도를 보는 것 같다. 딱지동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도 골목길에서 얻어들었다. 딱지 둘이 동무가 된다는 말인데 서로 딱지를 떼이면 꿔주는 단순한 협정 같은 것인데 그 말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처럼 들린다. 골목의 아이는 누구나 딱지동물인 셈이다. 골목집 한 집에 세 명에서 많으면 다섯 명 정도 있었으니 같은 나이가 아니더라도 어울려 놀았다. 같은 초등학교 다니면 대충 얼굴 보고 다니고 어울려 노는 딱지동무가 되는 것이다. 사람 맞춰서 노는 찐돌이는 골목을 더 넓게 만드는 마법과 같았을 것이다. 깡통을 멀리 차서 술래가 주우러 간 사이에 숨는 골목 골목의 장소들이 지금처럼 하냥 좁기만 한 골목의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직 60대가 되지 않은 50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골목이 더 한층 젊어진 느낌이다. 신이 나서 이야기의 물꼬를 터가는 구술자는 입에 침이 마를 세가 없다.

쫀드기라고 허리띠처럼 생긴 거 사 먹고, 옅은 심 3원짜리 연필. 책받침 싸움이라고 아세요? 얇은 건 10, 두꺼운 건 20원 하는. 부잣집 애들은 60원짜리 두꺼운 거로 했어요. 중학교 가니까 곤색 운동화 벗고 스파이크 운동화로 신었어요. 그 다음에 프로스펙스 생기고 나이키 생기고.”(김성식 구술)

가파른 골목을 다 오르니 체육관이 보인다. 나이 대에 따라 기억하는 것이 다르지만 구술자의 말을 들어보면 체육관 지붕이 열리면서 마징가제트가 나온다고도 했다. 체육관 지붕에 올라갔던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실없는 거짓말에 지나지 않지만 골목의 이야기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충분히 그렇게 상상할 만한 여유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체육관 꼭대기에 올라간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지. 내가 앵글 팀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지붕 꼭대기로 올라다니면서 일을 한 거야. 그때는 사는 게 너무 힘들었으니까 그런 거 신경도 안 쓰고 다녔지. (줄임) 체육관 지을 때 뼈다귀 씌우면서 올라간 거니까 기초나 같죠. 청주 시내에서 체육관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 본 여자는 나 하나밖에 없다고 내가 강조를 하는데 지금도 새로워요. 당시만 해도 청주에서는 제일 큰 거니까.”(선정숙 구술)

골목을 다니다 보니 지붕이 열리고 마징가제트가 나온다는 믿음을 말끔하게 지워주는 어르신까지 만났다. 고생고생하며 살던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 중간 중간 골목의 삶을 이끌어낸 자부심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사는 게 힘든 건 나아지지 않았지만 골목의 삶이 부잣집 부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열심히 산 자부심이지 않을까.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하고 살아놔서 지금은 호강이라고 생각해. 부자 부럽지 않고 호강이고 뭐, 남들 빌딩 갖고 몇 억을 갖고 살아도 나한테 돈 백만 원 있으면 그게 부자 부럽지 않아. 항상 어둡게 안 살고……. (줄임) 지금은 게을러서 못 살지. 자기가 일하기 싫고 게을러서 못 살지.”(선정숙 구술)

그런 삶이 골목을 지켜내고 분가시킨 근간이 되었다.

 

 

여기는 달동네라고 안 하고 고 밑에 기와집들 보고 달동네라고 하는 거요. 우리 집 같은 경우에는 요기 바로 앞에서 버스도 탈 수 있고……. 여기가 막혔으면 여기가 꼭두배기 집이지. 근데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사람 살기는 그만이에요. 자전거 타고 댕기면 땀이 쭉 나지. 얼마나 그걸 나는 고맙게 생각하나 몰라요. 의료원 뒤쪽 사자 동상은 저 왔을 때 있었어요. 그걸 애들이 타고 놀았는데 어느날인가 목이 부러져 나갔어요. 다리도 부러져 나가고. 땅에 꼬꾸라져 있었어요. 철근이 나왔어요. 오래 돼 가지고 어느날인가 동네에 도둑을 맞았는데 보따리를 집었는데 금붙이가 있다고 해서 보니까 가짜 금 도금한 것만 골라놓고 갖다 버렸다고 하대요. 그걸 사자 동상 옆에다 숨겨놓았더라니까. 내가 찾아다 보니까 쓸만 한 것도 많길래 동네 애들 주고 그랬거든요.”(정형숙 구술)

 

오랫동안 통장을 한 정형숙 씨는 의료원 바로 옆 골목에 살며 골목 사업 한다고 할 때 담벼락에 벽화를 흔쾌히 그리도록 돕기도 했다. 가난하지만 인심이 좋아서 살기 좋다고 한다. 집도 예쁘게 꾸미고 살아서 한 번은 드라마에도 나온 적이 있다고 한다.

 

옛날에 드라마 시티에서 사진 찍어 갈 때 그때 돈 40만 원 줬어요. 두 시간 찍었는데 텔런드들이 와 가지고. 참 꽃이 이쁘게 잘 피고, 사랑, 추억, 약속, 세 가지를 엮어서 70분 방송을 하는 드라마였는데. (처음에는) 집도 거지 같은데 뭘 쓰냐고 다마 했어요. 그런데 밤에 등을 갖다가 창문에고 뭐고 사방에 비춰 갖고 옥상에서도 찍고, 화단하고 대문하고 찍고……. 우리 집에 구경꾼들이 엄청 왔어요. 길을 막고 안 비켜준다고 욕을 하고 쇼를 했다니까.”(정형숙 구술)

일일드라마였으면 수암골처럼 명소가 되었을까. 사라진 사자 동상 대신 출연자의 동상을 세우고 드라마에 나왔던 장소라고 입간판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골목의 삶은 그런 것과는 달리 하는 고고한 삶의 원칙을 지키며 스러져 갈 뿐이다.

 

아직까지 여기는 시골 풍습이 있어요, 이웃간에 대화라도 하고 사람 사는 데 다 보면 형제간 같잖아요. 집에 가면 동생들이 있듯이 뭐 땜에 성질이 나다가도 에이 우리 동생 같으니까 이해해야지. 우리 애들 보고도 길거리에서 택시 기사가 속 썩이면 다 그런 거 아니니까 아버지를 보고 참거라, 그러고 니들이 나쁜 말로 구업을 지으면 자식한테 다 돌아온다, 절대 함불 말하지 말고 악담하지 마라, 그렇게 시키는 거죠. 구업이 죄 중에 제일 크대요. 꼭 손으로 때려 죽야야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세 치 혀가 사람들을 죽였다 살렸다 하잖아요. 그래서 진짜 귀한 생명, 다 똑같은 생명이고 그 집에 가면 다 귀한 자식이잖아요. 죽일 놈 살릴 놈 하면 뭐할거예요.”(정형숙 구술)

 

공설운동장(지금은 종합운동장) 한 켠에는 소년체전 시절의 성화대가 유물처럼 한켠에 방치되어 있다. 돌아가면 소년체전 10연패를 기념하는 조각도 있다. 신화라고 했다. 10연패라니! 작은 내륙의 도에서 일궈낸 땀과 노력의 상징이었다. 나중에는 10연패를 이뤄내려고 중학교에 가야 할 학생들마저 나이를 꿀려가며 출전시켰다는 것 때문에 신화가 허물어졌지만, 아직도 약동하는 소년상들과 횃불을 보면 공설운동장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다.

 

난리가 났지, 일등이잖아. 역사상 첨이잖아. 그러니까 선수들도 신나고 임원도 신나고 청주 와선 사단에서 짚차가 나와서 카 퍼레이드 하고 신이 났지.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있는 거야. 소년체전 연승한 게. (줄임) 시골에서 그냥 입던 옷에 꺼먹 고무신에서 새끼를 매고 공을 차던 시절이니 감동 안 할 수 있어. 그리고 이튿날 신문에 자기 이름이 나오니 붕붕 뜨는 거여.”(김운기 구술)

그날의 감동은 생생하다. 그러나 소년체전 때문에 바보가 된 학생들도 많다고 말한다. 후보 선수로 간 학생들은 공부도 못하고 그만큼 부작용 많았다고, 다 잘한 건 아니라고. 기념 동상과 상징물이 그렇듯 비탈의 마지막 사자 동상도 그런 것일까.

그래도 골목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좋은 기억만을 말한다. 어쩌면 좋은 편집이라고 할 만큼 이만큼이라도 살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듯 말한다. 어찌 보면 행복이란 것도 우리가 기억하는 구간만큼의 이야기에서 느끼는 소소한 부분인지도 모른다. 살아 보니 그 또한 행복한 시절이었노라고. 그래서 그런지 집은 누추해 보여도 꽃과 나무를 많이 심는 듯하다.

 

사직1동 골목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재개발

사직1동 통장을 지낸 박명희 씨는 이렇게 말한다.

재개발을 어차히 할 것 같으면 싹 밀어갖고 다시 짓는게 제일 바람직하죠. 어르신들 생각은 집터가 넓어서 5,60평 갖고 있으면 한 30평짜리 아파트는 나온다고 보는데 그거도 안 되는 집은 돈을 보태야 하잖아요. 그러니 괜히 집만 뺏기는 게 아닌가, 집도 없이 쫓겨나고 전세도 못 얻을까봐……. (줄임) 처음에 재개발 이야기가 나올 때는 여기가 중심이 되고, 새 집도 아니고 집값이 높은 집도 없어서 보상이 잘 된다고 봤는데 어려운가 봐요. 읍성을 살려서 중앙공원 있는 데를 정비하고 운천동 고인쇄박물관을 문화특구 지역으로 하듯이 여기도 체육관과 연계해서 시절을 갖추면 좋을텐데 여기만 빠졌어요. 예전에는 여기가 가장 잘 사는 동네였어요. 시내 중심으로 잘 사는 곳이었는데 자꾸 외곽으로 대단지 아파트가 생기니 낙후가 됐어요. 옛날에는 사직2동과 비슷했는데 지금은 약해졌죠. 사직1동이 옛날 이야기도 많으니 그걸 살리면서 개발이 되면 참 살기 좋은 동네가 될 것 같은데. 무심천도 가깝고 롤러스케이트장, 예술의전당, 체육관도 있으니……

 

나름 맞는 말이다. 재개발이 아파트 우선으로 하라는 법이 없는 것이다. 동네 이야기를 발굴하면서 문화 체육 시절과 연계하여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들어 갈 수도 있을 텐데, 아파트만이 수익성이 있다고 보고 찬반 대결로 양분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체육관에서 다시 내려와 변전소부터 국보제약 골목을 거쳐 사직1동으로 넘어가는 골목에는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 변전소 근처에는 청주 사진을 대표하는 김운기 어르신이 있고 조금 내려와 이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제천이용원이 있지 않은가.

 

제기 여기 이사 왔을 땐 집고 한 20여 채 있었을까. 변전소는 있는데 전화기가 없었어요. 그때는 전화기가 나오면 추첨해서 살 수 있었어요. 그때 전화번호가 국번도 없이 6212였어요. 그런데 전화선이 없어서 남한제사에서 오는 선을 이어서 썼어요. 우리 집에만 전화가 있으니 동네 사람들이 다 쓰는 거지. 밤 열한 시가 되어 문을 두드리면 잠을 못 잤어요. 돈을 받을 수도 없고.”(김운기 구술)

김운기 씨는 충청일보 사진국장을 지낸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방 한 가득 쌓아놓은 필름은 청주만 아니라 충북의 자료들로 박물관을 차려도 좋을 만큼 역사가 깊다.

 

내가 처음 사진 배울 때는 청주공고 뒤에 수용소가 있을 때였죠. (줄임) 본정통(성안길)에 신라사진관이라고. 전쟁 직후니까 수돗물도 안 나오지, 전기고 없지, 그러니까 펌프로 물을 퍼다가 사진을 씻어야 했어요. 양은 다라이에. 그때는 전부 흙길이니 물걸레도 닦는 일부터 하면서 배웠지. 기사들한테 담배 한 갑씩 사주면서 암실에 들어가 사진 빼는 게 배우고 사진 찍는 거 열심히 배우니까 나중에는 웬만한 노인데들 있으면 나보고 찍으라고 했어요. 마그네슘이라고 화약을 갈아 넣고 쏘면 불 탁 하니 천장이 들썩들썩 했어요.”

 

사직1동 제천이발소 박복동 씨가 시내 이용원에서 배웠던 시절 -김운기 사진

 

변전소를 조금 지나 큰길가에서 아직도 제천이발관을 하는 박복동 씨는 청주 이발소의 역사를 다 꿰고 있다.

시내 있을 때 큰 데는 한 10여 명씩 일하는 곳도 있었지. 문화이발관, 선화이발관, 온천이발관, 위생이발관. 청주에서 큰 이발소가 한국은행에서 청주약국 사이 있었지. (줄임) 처음 이발을 배웠던 곳은 용담동. 용담동에서 배우다가 시내로 나왔지. 그때는 다 이발소에서 배웠거든

지금 같은 전기가 아니라 특선이라는게 있었어. 불이 나가면 촛불 들고 옆에 서서 비춰주는 거여. 기술자가 일하는데 빗자루질 하다가 발등이라도 스리면 발등으로 툭 차는 겨. 기술자들이 벗어놓은 팬티, 양말도 빨아주고 돈도 안 받고 댕겼어. 몇 년씩은. 한 달에 한두 번 놓고. 청주극장, 현대극장 구경 한 번 시켜두면 좋다고 따라다녔지. (줄임) 62년에 시험 한 번 떨어지고 64년에 실기까지 봐서 됐지. 학과를 봐서 합격이 돼야 실기를 보는 거야. 학과는 충북대학교에서 보고 실기는 도청에서에서 봤어. 중앙공원 앞에 보면 지게꾼들, 리어카꾼들이 있었는데 도청 사람들이 한 명씩 차로 싣고 왔어, 더벅머리에 수염 많은 사람들이 머리 공짜로 깎아준다고 하니까 오는 거야. 의자에 쭉 앉혀놓고 번호대로 깎는 거지. 잘못 걸리면 엄청 힘든 사람 걸리는 거고.”(박복동 구술)

그렇게 해서 딴 면허증 번호가 1270. 시험 보는 사람들이 많으니 국가고시나 다름 없었다고 한다. 요즘처럼 으레 미장원에서 가서 유행하는 스타일로 깎는 것이 아니라 규격화된 머리 스타일이 있었다. 애들은 상고머리라 했고 어른들은 하이칼라라고 했다. 여자들은 주로 단발머리로 잘랐고, 어른들 머리 중에는 삼팔갈이로 가르마를 타는 스타일이 있었다. 아무리 기술자라도 일이 시원치 않으면 인정을 못 받는 시절이었다. 그러니 잘 하는 사람한테 배우고 또 배우는 일이었다. 노는 날 손님을 가장해 대전이나 서울로 다니며 머리를 직접 깎이면서 돈을 주고 배웠다. 그러니 박복동 이발사의 명언이 등장한다.

누가 제일 잘 한다고 말할 수 없지. 손님 마음에 맞으면 잘 하는 거지. 누가 잘 한다 하는 것은 나부터래도 선생도 나한테 머리를 잘라서 마음에 들면 잘 하는 거고, 마음에 안 들면 못 하는 거지.”

 

사직동 골목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 토요일, 일요일이면 학생들로 바글바글했다고 한다. 여자들도 이발소에 와서 면도를 하던 시절이었으니. 면도를 하면 화장이 잘 받으니 솜털을 뽑다 뽑다 이발소에 오는 것이다. 이후 미장원이 생기고 면도라는 특허마저 내어주고 나서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뒤늦게 배운 색소폰을 연주하면서 소일하듯 이발 손님을 맞고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 한다.

 

이발소에서 나와 비오는 날 손님들이 들끓는 전집 골목쪽으로 가다 보면 또 하나의 명소가 있다. 선화장. 얼큰한 짬뽕으로 유명한 집이다. 시외버스터미널이 있을 때는 직원도 많았지만 지금은 혼자 웍질을 하며 맛있는 짜장과 짬뽕을 만들어내고 있다.

자긍심이 있었어요. 어디 가서두 청주 시내에서 애기 아빠 이름 대면 다 알 정도로. (줄임) 전에는 여기도 말도 못하게 중국집이 많았어요. 해란강 전집 앞에도 있었고 미호아파트 일방통행길에 중국성이 있었어요. 변전소 앞에 대웅반점, 큰 도로에 기라성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없어졌고. 터미널이 있을 때는 사람 구하기도 쉬웠어요. 터미널이다 보니 집 나온 애들이 많아서 배달 사원 구함이라고 붙이면 많이 왔어요. 그러면 일단 밥 먹여 놓고 살살 꼬셔가시고 전화번호를 안 다음 집에 전화를 해서 보내기도 하고. 서울에서 부모님이 오시기도 했어요. 고맙다고 하고 가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우리 집에서 일하는 애들은 속을 안 썩였어요. 자식같이 왕래하는 애가 있거든요. 10년 이상 했을 거예요. 노랑머리라고 사직동에서 유명했어요. (줄임) 여기 건물 사기까지는 17년 넘었어요.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는데. 진짜 결혼 비용이고 뭐고 다 줄여가지고 장사 시작했거든요. 아는 언니가 중국집 해가지고 놀러 갔다가 만났어요. 눈이 크고 훤칠했어요. 저는 애기 아빠한테 배운 거죠. 칼질하는 것부터 면하는 것까지. 수타는 진짜 못 배우겠더라고. 애기 아빠는 많이 뺐어요. 한 번 빼면 일곱 그릇을 뺐으니까. 여름에 그렇게 뺐으면 엄청 잘 하는 거거든요. 여름엔 면에 축축 쳐져가지구. 저는 수타면하고는 안 맞는 것 같아요. 땀 반 밀가루 반이니. 기계면이 나은 것 같아요.”(심명순 구술)

 

전집 골목이라 부르는 변전소길 양쪽으로 2층집들은 시외버스터미널로 사직1동이 영화를 누릴 때 여인숙이나 숙소들로 번창하던 곳이다. 사직 사거리 쪽으로 나가서 돌아들면 전국체전이다 소년체전이면 합숙소로 쓰던 여관들이 있었고 선거철이 돌아오면 로타리다방에서는 양쪽 참모들이 모여 전략을 짰었다. 으레 다방 마담은 비밀 유지가 우선이었다. 시외버스 터미널 건물 2층에 있던 롤러스케이트장에는 청주 시내에서 논다 하는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거꾸로 상전벽해가 되어버렸지만 아직도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마치 옛 영화를 말해주듯 시끄럽게 골목을 서성이고 있는 듯하다. 아니 귀를 열어줄 때까지 반복해서 말해주고 있다.

 

롤러장이 왜 생겼느냐, 원래는 청주에 생길 게 아니에요. 그때 롤러부기란 영화가 들어오면 생긴 거예요.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롤러스케이트장에서 일해주는 사람인데 롤러스케이트 대회에 나가서 우승을 하는 이야기인데 그걸 보니까 청주에도 롤러스케이트 붐이 생겨서 생긴 거지.”(김성식 구술)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무것도 모르던 고등학교 맹탕 시절이라 가 보지는 못했고 영화에 나온 음악이 나오는 음반을 나중에야 샀다는 말이다.

 

두산 위브 자리가 옛날 터미널이잖아. 터미널 되기 전에는 전부 뽕나무 밭이었어. 잠종장이라고 해서 누에 뽕입 따가가 제사공장에서 실 빼는 작업 했지. 6.25 전쟁 터지고 폭격 맞고 다 폐혀가 된 거지. 연통만 남고. 조치원으로 가는 2차선 길 양쪽에 버드나무가 있었고 내수동 고개라고 불렀지. 서문다리가 철교였다고. 사직 사거리에서 흥덕 사거리로는 철길이었어. 의료원 뒤로 해서 올라갔지. 한벌초등학교 바로 뒤에는 전부 산이었어. 초등학교 바로 뒤가 화약고였고, 그 너머로는 과수원이나 전답이고. 사직2,3단지는 공동묘지였어.”(이해우 구술)

 

골목의 놀이

골목의 집들은 대부분이 양옥이다. 어르신들의 말씀에 따르면 판잣집으로 시작하여 흙벽돌 만들어 짓거나 점차 집 장사라고 부르던 업자들에 의해 비슷한 슬라브 집들이 들어섰다. 사직1동에서 유년기를 보낸 박영근 씨의 기억에 따르면, “우물 바로 옆에 돼지우리가 있었어요, 꺼먹돼지. 지금 생각하면 우물 옆에 돼지우리라고 하면 난리가 나는 건데 그때는 그렇게 했었어요. 우물이 몇 집의 중앙이 되는 거죠. 그리고 골목을 나가서 공터에는 한 집이 염소를 키우기도 했다. 요즘이면 시골집에서나 가능한 개, 돼지, 염소를 키워서 잡아먹거나 내다 파는 골목집들이 많았다.

도시 골목의 놀이 또한 지형지물을 잘 이용한 것들이 많았다.

의료원 건물 골조 안으로 들어가면 기초공사를 해놓은 철근이 있었고, 전기 플러그 꽂는 데가 있었어요. 콘센트에 보면 얇은 양철판 같은 걸로 벽이 딱 박아놨는데 거기서에 동그랗게 동전(굵은 전선이 나올 자리에 떨어지기 쉽게 달아놓은) 같은 것으로 재기를 만들기도 했어요, 습자지에 둘둘 말아서 고무줄 묶어서 짝짝 찢으면 제기가 돼서. (줄임) 굴렁쇠 놀이도 했었죠. 철사를 구부려서 만들었어요. (줄임) 의료원에서 운천동 쪽으로 기찻길이었어요. 기찻길에 내려가 못을 철길에 놓으면 기차가 지나가고 난 다음에 보면 납작해져요. 그러면 끝을 뾰족하게 해서 칼처럼 만들어서 놀았어요. 연싸움도 했어요. 명주실을 많이 썼어요. 골목이라는 게 참 그때 서로 또래끼리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박영근 구술)

 

골목이 다 친구 맺어주고 놀게 해주었던 셈이다. “골목길이 소통의 통로였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길이라는 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사람 살아가는 데 있어서. 골목에 살 때는 다 형편들이 고만고만하고. 모든 게 골목을 통해서니까 지나가다 싸우는 소리도 들리고 웃는 소리도 들리고 서로 이웃의 사정도 알고 정이 쌓이고 그랬던 것 같아요. 큰 길가로 이사를 나오니 친구들도 많이 사귀지 못하고 기억이 별로 없어요.”(박영근 구술)

불과 50미터도 안 되는 거리인데도 안쪽 골목과 큰 길가는 달랐다고 기억한다. 골목에서 함께 놀았던 친구(위아래로 두세 살은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는)들과 서먹해지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도 어려웠던 까닭은 무엇일까?

 

골목은 다시 강으로

상당산성이나 우암산, 부모산에 올라 청주를 바라보면 아파트로 둘러싼 성벽 도시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해가 지고 만나는 저녁 풍경 또한 무수한 불빛과 함께 동맥처럼 흐르는 도로뿐이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을 만나기 어렵다. 그러나 오징어배처럼 불을 밝힌 그 아래 골목이 살아있다. 물고기가 집으로 들어가듯 골목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육거리시장 가덕순대에서 국밥을 먹다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뒷문으로 나오면 반찬 골목으로 나 있는 또 하나의 골목이 있고 사람들이 있다.

사직1동에서 만난 이해우 씨는 아직도 골목에 남아 사는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했다. “그 길이 이제 나의 고통스러운 나머지 세상을 사는 길이 됐지. 그래 이제 뭐, 어릴적 동네 친구들은 다 떠났어, 나만 남았는데 다시 안 들어오더라고. 느린 걸음으로 걸어본 골목의 사람들 심정이 그럴 것 같다. 모두가 떠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곳이어서 수암골처럼 명소가 되기 전에는 늙수그레하게 세월을 보낼 뿐이다. 골목 사업으로 담벼락에 벽화를 그려놓기도 하지만 밤길에 무섭다고 지워달라기도 한다. 실제로 무심천변 운천동에 있는 피난민촌이라 부르던 골목에서 있었던 일이다. 시민단체가 중심이 되어 사람들을 그려놓았는데 어두운 골목길 가로등에서 만나면 섬뜩해진다는 민원이 들어와 민화 소재로 바꾸어 그린 적도 있다. 밝아 보이기는 하지만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의 골목에서 더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어찌 보면 영정사진 같다. 오히려 담백한 회색의 빛깔이 더 솔직해 보이기도 한다. 어느 집에서는 벽화사절이라는 팻말을 붙여놓기까지 했다. 고심해야 할 대목이다.

재개발도 난관에 부딪혀 시간만 끌 뿐이다. 새로운 도심 재생의 문화로 가야 할 때가 되었다. 원주민을 내쫓는 재생이 아니라 골목에 사는 사람들은 우선시하고 살기 좋은 시설로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혹시라도 젊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새로운 이웃들로 북적이는 곳이 되지 않을까. 어찌 보면 골목은 손수 지은 집처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흙벽장 하나 찍을라면은 산에서 흙을 퍼다가 짚을 막 버무려서 쌓아놨다가 이튿날 학교 갔다 와서 찍었어. 비 오면 덮어 씌어놓고. 죄 뭉개져 허사가 되고. 그거 한 장 찍으면 일 원 몇 전 이렇게 할 제여.”(이해우 구술)

집장사가 비슷하게 지은 집들도 많지만 골목의 집들은 흙벽돌 한 장까지 찍어서 지었거나 화단이다 담장이다 공들여 지은 경우가 많다. 문전옥답이나 마찬가지다. 조금이라도 비는 공간이 있으면 꽃을 심고 고추, 상추, 깨를 심으며 궁벽해 보이는 삶터를 밝힌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기에 골목은 아직도 천천히 걸어보아야 곳이다.

우암산 둘레길처럼 청주 둘레길, 청주 골목길 걷기(요란벅쩍하게 그곳의 삶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같은 일들로 확장되어야 한다. 고드미 나뭇꾼이 바람막이를 넘어오듯이 천천히 걸어서 안덕벌에서 바깥덕벌을 지나 남주동 시장이나 육거리시장으로 콩나물 팔러 가듯이 골목을 다시 걸어보는 것이다. 시내 가듯 때 빼고 광내고 성안길에 곳곳을 걸어보며 호떡을 사 먹고 떡볶이를 사고 철당간에 부는 바람을 느껴보면서 육거리시장 거손의류에서 시원한 냉장고 바지를 사는 것을 어떨까. 거손의류 사장님이 커피 한 잔 타주는 것을 받아들고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전집 골목에서 지인들을 불러내어 낮술을 마셔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가구 골목을 지나 솥전의 명맥이 아직도 살아있는 가게들과 적산가옥들을 둘러보고 사직동으로 가 보는 것이다.

 

우시장이 있었다는 모충교 다리를 건너 아파트 공사가 한창인 모충동과 사직1동 사이를 지나 효자문 길을 걷다 보면 사직1동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날 것이다.

 

도로 위에는 육중한 소리를 내며 덤프트럭들이 꼬리를 물고 씽씽 내달리고, 까마득하게 솟아있는 십 수개의 타워크레인이 공사장 하늘을 덮은 채 빙빙 돌며 무거운 물건들을 연신 공중으로 끌어올렸다. 공사장에서는 하루종일 온갖 굉음이 그치지 않고 들려왔다. 눈뜨면 아파트 층이 높아지고, 자고 일어나면 고층아파트가 비온 뒤 죽순처럼 하늘높이 솟구쳤다. 뿐만이 아니었다. 배티에 아파트 공사판이 벌어지며 하루가 다르게 동네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공사장 주변 집들부터 달라졌다. 세월에 때가 덕지덕지 묻어 칙칙하던 담을 헐어내고 외벽은 알록달록 페인트로 치장하고 내부도 그럴싸하게 개조했다. 그리고는 그곳에 밥집, 국수집, 한식집, 고깃집, 뷔페까지 생겨났다. 식당만 생겨난 게 아니었다. 술집에, 다방에, 오락실에, 안마소에 심지어는 하우스까지 비밀리에 생겨났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대규모 고층아파트 공사가 벌어지며 공사장에는 수많은 인부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타지뿐 아니라 외국에서 온 노동자가 훨씬 더 많았다. 아침으로 출근할 때나 저녁에 퇴근할 때 보면 길거리를 빼곡하게 메운 노동자들 생김새가 모두 제각각이고, 떠들어대는 말소리도 쏼라쏼라 몇 나라 말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순식간에 배티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드는 여행자거리처럼 변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몰려드니 처마 밑에 달아 붙인 코딱지만한 방이라도 비만 새지 않으면 없어 내놓지 못할 정도로 동이 났다.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면서부터 배티는 천지개벽했다. 배티가 이렇게 변하리라고는 귀신도 짐작하지 못할 일이었다.”(정연승 소설, <우리 동네 문경집>)

 

소설에 나온 배티는 얼음창고가 있었다는 뜻에서 빙고리(氷庫里)’에서 배티, 이현리(梨峴里), 화청리(華淸里), 화흥리(華興里)를 지나 모충동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안고 있는 이름이다. 해마다 청주읍성 탈환 행사에서 재현하듯 임진왜란 당시 조헌 의병군이 읍성을 공격하기 위해 머물던 곳이라 상징성이 더하다. 비라도 내리면 일대가 진흙탕(소설에서는 지랄물탕’)으로 변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곳은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가고 있다. 대학 시절만 해도 달동네여서 고학 하는 친구와 함께 밤에 찹쌀떡을 팔러 다니기도 했던 곳인데 어느새 골목의 흔적은 사라지고 깎아지른 아파트 능선으로 바뀌고 사진 속의 기록으로만 남았다.

 

귀신도 몰랐으리라. 상전벽해란 말은 알지만 이런 식으로 바뀔 줄은. 그렇게 바뀐 결과가 겉으로 보아서는 살기 좋은 아파트 정주 공간을 만들어내고 재산 증식의 윤택함을 가져가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골목의 삶은 더 피폐했다고 볼 수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골목을 걸어보면 어느정도 감은 잡히는 것 같다. 이야기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는 말처럼 다시 골목의 삶을 보아야 한다. 골목의 이야기를 정확히 듣고 그곳에서 살았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집을 짓고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과 함께 연구가 필요하다. 멕시코의 가난한 가족의 삶을 기록한 산체스네 아이들(오스카 루이스 지음/박현수 옮김/이매진)처럼 인류학적인 르포르타쥬가 이어져야 한다. 골목은 다시 강으로 흘러야 한다.

 

* 이 글은 2021년 <청주문화>에 발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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