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에 브로츠와프에서 조금 떨어진 서쪽에 살면서 울 장갑을 팔았던 신발 장수 야콥 뵈메는 세상이 일곱 단계를 거쳐 끊임없이 생성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첫 번째는 시큼함이고 두 번째가 달콤함이며, 세 번째는 씁쓸함, 네 번째는 따뜻함, 그리고 그에 따르면 따뜻함 뒤에 사랑이 오고, 그 다음에 소리와 언어가 뒤를 잇는다. 나는 따뜻함과 사랑 사이에 주파 시차비오바를 놓고 싶다. 이걸 먹으면 장소를 삼키는 듯한 기분이 든다. 달걀은 이곳의 흙 맛이고, 괭이밥은 이곳의 풀, 사워크림은 이곳의 구름 맛이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뒤집힌 배 같았던 그 방에서 나는 니스칠을 한 벽의 나뭇결이 이름 없는 것들의 지도 같다고 생각했고,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으로 그걸 외우려 했다. 이름 없는 것들의 왕국이라고 해서 형체가 없지는 않았다. 나는 그 곳에서 내 길을 찾아야 했다. 단단한 가구와 예리한 물건들이 있고 칠흑처럼 깜깜한 방에 들어간 것처럼. 그리고 어쨌든, 내가 아는 대부분의 것들, 내가 가진 대부분의 예감은 이름이 없거나, 그 이름은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세상의 모든 책만큼이나 길었다.
존 버거, <슘과 칭> 중에서
존 버거의 소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에 나오는 장소들은 우리의 예감 속에 있는 과거인지도 모른다. 리스본과 제네바, 크라쿠프와 마드리드 등에서 주인공은 존은 죽은 어머니를 만나 대화하기도 하고 친구들을 떠올리며 길을 걷고 생각한다. "우리네 삶 속으로 스며드는 생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는 말로 죽은 이들이 불러내는 보이지 않는 그 장소들의 내면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기억하며 따뜻함 뒤에 비로소 소리와 언어를 빌어서 말해야 하는 곳들을 .
진정한 앎, 질문, 글쓰기 -에드몽 자베스의 <질문의 책> (0) | 2023.02.20 |
---|---|
"빨리" 대신 '천천히'와 '안전하게'를 지향해야 한다 (0) | 2022.12.26 |
<아포칼립스> 자신들의 바로 그 공포에 의해 악을 낳는 약한 개인들의 무리로 이루어져 있다 (0) | 2022.09.02 |
텍스트는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관능적인 공간이다 (0) | 2022.07.01 |
새로운 모험을 향해 몸을 던졌다 (0) | 2022.02.15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