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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앎, 질문, 글쓰기 -에드몽 자베스의 <질문의 책>

책 속 한 문장, 또는 장소

by 참도깨비 2023. 2. 20.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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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앎은,  우리가 결국 어떤 것도 배우지 못하게 될 것임을,  매일같이, 아는 일이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 즉 무란,  앎인 동시에,  모든 것의 이면이기 때문이다. 마치 공기가,  그것에 받쳐지는 날개의 이면인 것처럼.
우리의 희망은 곧 절망의 날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에드몽 자베스의 <질문의 책>은  “이는 소설도 시도 아니요, 에세이나 희곡도 아니다. <질문의 책>은 이 모든 양식들의 조합이며, 단편과 아포리즘, 대화와 노래와 주석이 어우러진 하나의 모자이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책’의 중심 질문을 끊임없이 맴돌고 있다. 바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폴 오스터). 끊임없는 질문의 책이다. 유켈과 사라라는 두 인물과 가상의 랍비들의 말로 가득한 독특한 글쓰기를 보여주는 책이다. 

 

에드몽 자베스는 유대인이면서 이집트에서 태어나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 살면서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마주하고 작가로서의 글쓰기에 집중하며 "곧 모두가 작가의 소명을 짊어질 수 있다. 그때 작가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들은 다음과 같다. 진리로서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기, 언어화할 수 없는 울부짖음을 글로 옮기기, 그렇게 울부짖음의 흔적을 거처삼아, 새로운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기, 그러는 와중에 글 속에서, 책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박해자들의 추적으로부터 몸을 감춰 버리기. 이를 우리는 문학적 저항운동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고, 혹은 자베스 본인의 표현을 따라 “신의 몸짓을 되살리는 일”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는 말을 한다. 유대인은 유대 민족만의 것이 아닌 작가로서의 글쓰기가 가야 하는 끝없는 질문임을 말한다. 물소가 회전식 양수기를 돌리는 일과 마찬가지로, 글쓰기 역시 매번 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듯하지만, 실은 갈증에 시달리는 타인에게 마실 것을 내어주는 일임을 말하고 동일성으로의 환원에 대한 저항이자, 질문 던지기이자, 타인의 갈증에 대한 답, 곧 새로운 질문이다. 그렇게 세상은 절대적인 창조자도 피조물도 존재하지 않고, 영원히 순환과 확장을 거듭하며, 새로운 시련에 대한 새로운 생존을 거듭하는 ‘책’임을 .


아, 유대인이 아닌 그대여—나는 거의 유대인이 아니었다. 지금 나는 유대인이다—나는 그대를 나의 영역으로 인도한다. 작가가 아닌 그대여—나는 거의 작가가 아니었다. 지금 나는 작가다—나는 그대에게 내 책들을 선사한다. 그대, 유대인이며, 어쩌면 작가이기도 한 사람이여.(127-128쪽)

끊임없이 윤리적인 성찰을 이어나가지만 거처가 없고, 돌아갈 땅이 없으며, 국가가 없는, 핍박받는 민족인 유대인, 어느 곳에서도 환대받지 못하는 유대인, 방랑자이자 이방인인 유대인은 모든 인간 실존의 근원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한 사람의 학자: 처음에 나치는, 쓸모없는 유대인들만을 화장터의 가마로 보냈다. 나중에는, 이 ‘쓸모없음’이란 개념조차 파기되었다. 모든 유대인들이 몰살되어야만 했다.
어쩌면 언젠가는, 단어들이 영영 단어들을 잃게 될 날이 오리라. 시가 죽는 날이 오게 되리라.
그것은 로봇의 시대, 그리고 옥에 갇힌 말의 시대이리라.
유대인들의 불행은 보편적인 것이 되리라.(349쪽)



세상은 이름 속으로 망명한다. 이름 안에는, 세상의 책이 있다.
쓴다는 것은, 기원에 대한 정열을 갖는 일이다. 글쓰기는 바닥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바닥은 언제나 또 다른 시작이다. 죽음 안에서는, 분명, 여러 바닥들이 모여 가장 깊은 밑바닥을 구성한다. 따라서 쓴다는 것은, 목적지에 가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목적지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467쪽)

자베스에게 글쓰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작가의 글쓰기는 마치 유대인들이 거처의 부재를 체험하듯, 매순간 소통의 실패를 체험하는 일이다. 쓰는 일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가능하리라는 믿음 속에 희망이 있다. 작가는 그 가능성에 대한 믿음으로 글을 쓴다.

책에게서 쫓겨나고 책에게서 요구되는 책이여. 내가 그것의 성찰이자 고통이었던 말은 깨닫는다, 진정한 장소는 주님께서 머무르시는 면소(免訴)임을. 장소 아닌 장소인 그곳에서, 존재하고 있지 않으며 결코 존재한 적도 없다는 사실에 의해, 주님께서는 반짝이신다. 따라서 엘로힘에 대한 모든 해석과, 아도나이에 대한 모든 접근은 다만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모든 법은 개인적인 법일 수밖에 없으며, 모든 진리는, 그 진리가 우리에게서 끌어내는, 절규 속 외로운 진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공인된 진리의 전달 가능성 안에, 공통되고 완결된 법의 전달 가능성 안에 있다.(556-5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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