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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아감벤의 <내가 보고 듣고 깨달은 것들>

책 속 한 문장, 또는 장소

by 참도깨비 2023. 11. 9.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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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코모 다 로리오에서 종소리를 들었다. 종교인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사용하는 목소리와 종소리 가운데 종소리는 무척 친근해서 들을 때마다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낀다. 목소리는 너무 직설적이라 나를 부를 때 경솔하다는 느낌마저 주는 반면 종소리는 이해가 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다. 종소리는 부르지 않는다. 나를 부르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함께하면서 그 맹렬한 울림으로 나를 휘어 감고는 너무나도 감미롭게-울리기 시작할 때처럼 아무런 이유 없이-수그러든다. 아무런 말도 없이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소리, 그것이 내게는 종소리다. 산 자코모 다 로리오에서 내가 들은 것이 바로 이 종소리다. 9쪽

 

'사랑'에서 무엇을 배웠나? 사랑의 은밀함은 어떤 정치적 본질 같은 것에 가깝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공유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자산인 듯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의 은밀함은 정치에서 제외되고, 사실상 이에 대해 무언가를 더 잘 알고 있는 듯 보이는 여성들의 보호에 의탁된다. 우리 사회가 고질적으로 남성우월적이며 모순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69쪽

 

'시'에서 무엇을 배웠나? 어떤 정치적 과제나 열정은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고 이 과제는 -비록 지극히 공통적인 과제임에도-어느 누구도 떠맡을 수 없으며 이를 감당해야 할 민중이 부재하는 자리에서 시인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날 이것 외에 또 다른 정치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오로지 언어의 시적인 강렬함을 통해서만, 부재하던 민중이-잠시나마-나타나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97쪽

 

지노스트라(이탈의의 작은 섬)에서 당나귀를 바라보며 떠오른 것이 있다.고대인들에게 당나귀는 비너스의 신비와 직결되는 동물이었고 무엇보다도 제의에 쓰이는-즉 신비를 실어나르는 동물이었다. 인간은 신비 앞에서 잘난 척을 하거나 기가 죽거나 광분하거나 고개를 조아리지만 동물은 아무런 이야기도 늘어놓지 않는다. 그저 살짝 슬픔에 잠길 뿐 이 신비를 묵묵히 실어 나른다. 123쪽

 

이탈이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문학 작품이나 어떤 장소에서 보고 듣고 깨달은 것을 짧게 쓴 책 말미에는 <내가 보고 듣고 깨닫지 못한 것>이 나온다. 오래전에 어머니가 준 쪽지에 자신이 어렸을 때 쓴 글을 보고 나중에 쓰이게 될 철학의 본질적인 매듭이자 핵심적인 내용이었다고 고백한다. 자신에게 남은 기억이라고는 텅 빈 중심 혹은 정지 상태임을 느끼게 하는 결핍이 성찰을 만들고 이후의 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기억에 다가서는 일은 '말하지 못한 것'을 알지 못한 채로 남겯둔다는 조건하에서만, 다시 말해 어둠에 가려 있으면서도 구체적이지 않은 채로, 비밀처럼 드러내는 진실과도 같은 것임을. 

 

내가 찾으려 했던 것도 잋럼 분규와 조소, 전시와 심연, 어둠과 광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접촉의 틈새이자 공백이었다. 그곳에서 드러나는 비밀은 너무나 분명한 나머지 너무 쉬워서 풀지 못하는 장난스러운 수수께끼 또는 지루한 이야기로 변한다. 바로 여기에 나의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텅 빈 중심과, 내가 처음부터 글을 쓰며 구체화하지 않은 채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던 그 경험-불가능한, 축복받은 결함이 있었다.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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