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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붙어 죽은 매미를 위한 시 -금산 간디고등학교 학생 시를 중심으로

시와 함께한 나날

by 참도깨비 2023. 11. 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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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금산 간디고등학교 지혜마루도서관에서 간디고등학교 과정 친구들과

 

 

말라붙어 죽은 매미를 위한 시

-충남 금산 간디고등학교 학생 시를 중심으로

 

금산 간디학교에 가기 위해 일찍 길을 나섰다. 문화가 있는 날이면 으레 먼저 둘러보고 이야깃거리가 없는지 찾아내는데 이번에는 간디학교 건너에 있는 진악산 보석사에 들러 절집 구경하고 단풍 구경하다 보니 날이 저물었다. 배도 고프기도 해서 보석사 앞 주차장에서 마을 어르신에게 밥 먹을 식당이 있느냐 물으니 없단다. 그러면서 저기 참새방앗간에 가면 라면을 끼려 줄 거유.” 하신다. 가게라고 보기에는 그냥 절 어귀에 있는 집으로 보여서 궁금했는데, 들어가 보니 과자와 사탕 몇 가지가 옛날 점방처럼 칸칸 진열되어 있다.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다른 건 말고 라면은 끓여줄 수 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낯선 티를 벗으려니 자연스레 간디학교 아이들에게 들려줄 시가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 눈과 손길이 탔을 양파링, 바나나킥, 콘칲, 고소미, 에이스, 초코파이 등속을 빙긋 바라보며 간디학교 어둑한 언덕으로 올라갔다.

 

여기는 강원도나 마찬가지로 춥고 눈이 많이 오는데

몇 년 전부터 눈도 안 오고

고구마, 마 농사 조금 짓는 것도 션찮네

고구마는 뭣해도 백 오십 박스는 캤는데

올해는 오십 박스도 못 캤네요. 그것도 잘고

 

금산 간디학교 지나 보석사 아래 참새방앗간 아주머니

보석사 들러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삼 천 원하는 라면 끓여주고 간디학교 아이들 과자 몇 개 단촐하게 벌여놓고 농사짓는다고

보석사 은행나무 구경도 못 갔단다.

(천 년 묵었어도 올개는 노랗지도 않고 비척비척 웅숭거리기만 하다)

 

단풍도 션찮고 뭔가 바뀌긴 바뀌는 것 같은데 심란하기만 하고

 

김치는 젓갈이 안 들어가서 어쩔란가 모르겠네

밥 한 그릇 주고 싶어도

아직도 밥도 안 하고 저녁이니 또 심란하고

뭔 뜻인지 모르것네

 

이종수, <보석사 아래 참새방앗간 아주머니>

 

일반학교를 나와 간디학교에 들어오셨다는 우정아 선생님이 마중을 나와 지혜마루도서관에 들어가니 막 저녁을 먹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두런거리는 소리와 함께 빗소리가 들렸다. 시인이 온다고 시집 제목 빗소리 듣기 모임에 맞게 우정아 선생님이 틀어놓으셨다.그러니 여기는 빗소리 듣기 모임 간디학교 지부인 셈이다. 어쩌면 블랙홀처럼 거대한 힘을 가졌을 아이들 시는 어떨까? 이것이 시 이야기를 하면서 내내 궁금했다. 한때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회성이 낮다는 평가를 받은 아이를 보내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는 간디학교에 오니 저마다 다른 단풍잎을 보는 느낌이었다. 보석사가 들어앉은 진악산 단풍잎처럼 여러 삶을 살고 있는 얼굴들 하나가 시였다고 할까. 앞의 시를 먼저 와서 썼다고 이런 시를 쓰는 시인쯤 된다고 읽어주니 조금은 경계를 풀어 반갑게 맞아주니 시 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피티로 준비해 간 보기 시를 한 편 한 편 읽어주며 거침없이 써야 한다고 강조하고, 2시간째에는 시를 쓰기로 했다. 참새방앗간 아주머니가 말했듯이 춥고 외진 곳이지만 낮은 산과 달 뜨는 언덕에서 각자의 사연을 접어두고 함께 지내는 마음은 어떨지 궁금했다. 그야말로 낯선 상황에서 즉흥적이든 오래 품어왔던 마음이든 드러내놓고 보여주는 것이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과연 그랬다. 하나도 같지 않으면서 다른, 낮게 웅얼거리거나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보여주는 시들이야말로 또 한 번 시 쓰길 잘 했다는, 더 열심히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였다.

 

도시에서 살아보고, 시골에서 살아보고,

섬에서, 어딘가에서 살아보고 나니

나의 마음은 어느 날 바다로 가 있었다.

앞에는 파도가 치고

뒤에는 모래가 있는

그런 바다가 있었는데

나는 바다로 들어가고 싶었다.

바다로 들어가 바닷속에서 살고 싶다.

하지만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바닷속은 너무 춥고, 어둡고, 위험하니까

내가 먼저 바다를 밀어냈다.

바다를 밀어내고 나니 그곳에 갯벌이 생겼다.

바다를 밀어냈는데 다시 바다 생각이 나서 일단 바다가 있었던 갯벌에 갔다.

이제 내 마음은 갯벌에서 살고 있다.

내가 어디 있든 어딜 가든 뭘 하든 그는

지금 갯벌에 살고 있어요.

 

김연재, <갯벌에서 살고 있어요>

 

연재는 제목부터 토씨 하나까지 챙기는 꼼꼼한 성격 같다. ‘갯벌에서 살고 싶어요하고 잘못 읽었더니 살고 있다고 바로 잡아주며 원고지를 꼼꼼히 채웠다. 바다는 어떤 곳인가? 누구나 동경하는 곳이다. 밤새 달려가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바다에 가면 바다에 가로막혀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다가 오는 때가 많다. ‘바다로 들어가고 싶고, ‘바닷속에서 살고 싶지만 그곳은 춥고 어둡고 위험하다. 망망대해에 떠서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질어질하고 공포가 밀려오기도 한다. 그러니 화자는 바다를 밀어낼 수밖에 없다. 이 직전까지는 그렇게 바다를 실감하는 데서 그치지만 바다를 밀어내고 나니 갯벌이 생겼다는, 어찌 보면 달만이 할 수 있는 밀물과 썰물의 힘이 관장하는 갯벌이 나온다. 의도했던 하지 않았든 두려운 마음을 떨쳐내고 갯벌이라는 자리를 발견하고 거기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갯벌은 어디일까? 연재가 자리한 간디학교일까? 13바다를 밀어냈는데 다시 바다 생각이 나서 일단 바다가 있는 갯벌에 갔다는 것이 좀 더 드라미틱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달이 이끄는 대로 생명력이 깊이 숨 쉬는 갯벌을 발견했다는 것이 이 시의 알갱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가 다 끝나가는 곳에서 난데없이 가 나오는 것도 자연스레 이해가 될 것이다. 어디에 있든 어디에 가든 뭘 하든 함께하는 갯벌의 생생함이었으면 한다. 바다는 그저 관념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복잡하고

 

상관없다가도

짜증이 나고

 

행복하면서

불행해.

 

어제 좋다가도

오늘은 별로야.

 

알다가도 모르겠는

그게 마음이야.

 

맹소이, <마음>

 

-

화가 난다.

투둑투둑

송하에 간다.

 

- -

무거워진다.

토독토독

한결 낫다.

 

- -

버거워진다.

퐁당

환희한다.

 

문혜성, <>

 

소이는 마음이라는 갯벌에 발이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마음이 그렇다. 종잡을 수 없고 온데간데없기도 하다가 화학 작용처럼 좋았다가 싫기도 하는데, 그것 또한 자신이기 때문에 어렵다. 어디에 가든 꼭 나오는 제목이면서 내용도 비슷한 시다. 잘 안다고 오인해도 문제이긴 하지만 지체 현상일 수도 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오래 빠져있으면 더 힘들어진다. 차라리 그런 마음의 변화를 인정하고 솔직히 드러내 다음 시를 쓰는 것이 좋다. 어쩌면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그 순간을 즐기지 못하고 바로 바뀌지 않을까 저어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마음을 회로도나 지도로 그려보면서 다음 시를 써서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각자의 마음은 무겁고 흔들리는 무엇이다. 혜성이는 소리 나는 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쓰고 있지만 화가 나고 무겁고 버거워지는 마음을 감추고 있는 것 같다. 빗소리를 영상으로 틀어놓은 탓일지 모르지만 비의 마음으로 땅에 내리는 쓰고 있다. 느닷없이 내리는 비를 그으려 송하(소나무?)에서 비를 맞아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변화가 느껴진다. 어쩌면 우울한 기운이 몸에 늘 배어있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빗소리처럼 또 풀려 땅으로 스며서 굳어지길 바랄 뿐이다.

 

엄마, 난 지금 전장에 서 있어요

옆에 앉은 지친 동료는 붉은 피 위에서 신음하고 있어요

 

날아오는 총알은 날 여전히 지치도록 만드네요

한 녀석은 호시탐탐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요

배신의 깃발을 품 안에 감춘 채 말이죠

난 그를 쏠 수밖에 없군요

우리라는 거창한 명분이 아닌 나를 위해서요

 

우린 많은 전리품을 얻을 수 있어요

쓰라린 상처를 움켜쥐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말이죠

자신이 영웅인 줄 알던 애송이는 눈을 감지만

아무도 그를 위해 울어주지 않아요

 

먼저 나서길 기약한 형제들은

누구보다 집과 가족이 그리울 거예요

포화 섞인 하늘보단 파란 풍경이 보고 싶어요

 

이기적인 생존을 위해 도망치고 선동하던

그들이야말로 승자겠죠

아빠, 꼭 만나러 갈게요

하지만 난 어쩔 수 없는 군인인가 봅니다

새로운 전장을 기대하며 가슴이 뛰어요

 

안태경, <학교>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읽어주었는데도 아이들이 적잖이 놀랐다. 태경이 말대로라면 지금의 학교도 전장터란 것인가? 전에 다니던 학교가 그랬을까? 지치고 배신의 상처가 깊고 생존을 위한 피나는 전장터라니, 게다가 전리품은 다 무엇인가? 전장에서는 모든 것이 파괴되기 마련이다. 포화 섞인 하늘보다 파란 하늘을 보고 싶어 하지만 새로운 전장이 있을 뿐이다. 만약 이 전장이 지금의 자리에서 펼쳐지는 것이라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친구와 같이 화자도 총부리를 겨누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어쩌면 저만 살겠다고 도망가며 선동하던 이들이 승자이고 새로운 전장에 가슴이 뛰는 화자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은 또 무엇으로 서로를 지치게 하고 배신하게 하고 상처를 남길 것인가? 어른들이 겪었던 학교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숨을 곳도 쉴 곳도 없는 학교란 괴물이 무기를 주고 끊임없이 새로운 전장을 만드는 일에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러려고 대안의 공간에 모인 것이 아닌가? 어디까지나 시로 답답한 현실을 넘어 구축한 전장에서 평화로운 자리로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바다에 파도 치는 깊은 물만 있는 게 아니라 갯벌도 있으니 다 같이 집과 가족이 그리운 친구로 만나길, 이 시를 가지고 돌아와 어른들과 읽는 마음이 먹먹한 것은 연대책임과도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나는 영원한 것이 좋다.

왜냐하면

무언가가 떨어지거나 없어지면

그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는 게 싫고 죽는 게 두렵다.

 

안진혁, <영원>

 

도서관 자리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서로의 숨결과 말풍선처럼 올라올 것 같은 이야기를 가늠해 보는 것은 역시 시로 표현하는 길임을 진혁이는 잘 말해주고 있다. 솔직하게 무섭고 두려워 영원을 꿈꾸고 불멸을 바라는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죽는 게 싫고 두렵지만 그것조차 그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영원을 말하고 있는 진혁이의 마음은 어른도 마찬가지다. 의연한 것 같지만 그러기 힘들다. 백 살을 넘어 3백 살 넘어 살고 싶다고 말하는 초등학생의 시와 다를 게 없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두렵다. 학교 안에서 만나는 친구들 가운데 거의 절반에 가까운 시의 내용과 비슷하다. 사회학자라면 일종의 지체 현상이라고 하겠지만 한 발짝 용기 있게 나아가며 지금을 누리는 수밖에 없다.

 

내 친구는 나보다 수학을 잘한다.

내가 아는 형은 나보다 게임을 잘한다.

내가 아는 누나는 나보다 영어를 잘한다.

내가 아는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보다 더 잘한다.

그럼 내가 잘하는 건 뭘까?

 

안진혁, <나보다>

 

두 편을 연달아 쓴 진혁이의 이 시도 그렇다. ‘영원이 저 너머에 있기에 숨길 수 있다 해도 지금 있는 자리에서는 모든 것이 나보다잘하기 때문에 비교가 된다. 대안학교에서도 감출 수 없는 비교우위의 부럽고 두려운 마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수학’, ‘게임’, ‘영어만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마저 나보다 더 잘하기에 내 존재가 작게 오므라드는 기분이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을 것이나 이 지점이라면 진정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기회라 여기면 좋을 것 같다. 사람은 바교우위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한 를 찾는 물음에 답하기 위한 길을 가면 좋지 않을까 싶다.

 

누가 당신을 기억할까요?

누가 당신의 이름을 사랑스럽게 불러줄까요?

어떠한 이름도 갖지 못한 채

마땅한 동정도 애도도 받지 못한 채

변변찮은 무덤도 지니지 못한 채

쓸쓸한 임종을 맞이하는 당신을

저는 흐린 눈으로 지나칩니다

 

김예원, <말라붙어 죽은 매미를 위한 시>

 

예원이는 자신의 이름에 괄호를 치고 (추정)이라고 썼다. 예원으로 추정된다는 농담 반 진담 반의 표시를 해놓았다. 이 시에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매미의 죽음이지만 우리 사회가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 기억하지 않으면 지워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 바치는 애도라고 할 수 있다. 애매하게 자신을 밝히고 있는 예원이가 정작 받고 싶은 이름사랑’, ‘동정같은 것일까? 그런 뜻도 감춰져 있지만 여기서는 말라붙어 죽은 매미에 대한 예우와 애도로 보자면 마지막 행에서 밝힌 예원이의 흐린 눈은 중의적인 뜻을 나타내고 있다. ‘눈물로 흐려진 눈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마음의 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에서 밝히고 있는 기억이라는 방식, 진정한 애도라는 말의 깊은 뜻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시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세상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누구도 듣지 못한

누구도 알지 못한

그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편지일까?

나에게 오고 있는 편지일까?

아니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까?

 

김해밀, <세상 모든 이야기>

 

그런 점에서 조금은 나직하게 물음을 던지는 해밀이의 시 또한 의미심장하다. ‘이야기란 무엇인가? 한병철 철학자가 서사의 위기에서 말하듯 고유한 이야기를 잃은 사회이자 내 생각과 느낌을 말하지 못하고 입력한 정보와 이슈에 따라 휘둘리는 사회텅 빈 삶을 채워줄 서사 그 자체인 것 같다. 진정한 이야기는 사라지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나에게 오는 유리병 편지처럼 오는 것을 해밀이는 숨겨져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스토리텔링으로 포장한다 해도 그것은 우리가 듣고 싶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데?”,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기 쉽게 요약해서 말해!” 하고 뚝뚝 끊어버리는 이야기를 맥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또한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고 사회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과 연관이 되어있다고 할 것이다.

 

맨날 보는

눈엣가시

걸리적거린다

 

지나가다

넘어지고

 

피해 가다

늦어지고

 

지켜보다

짜증 난다

 

,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부리 탓만 한다.

 

아무도 치워주지 않는다

나만 불편한 것인가?

 

돌부리를 피해 걷는다.

돌부리는 사라지지도 않은 채

누군가가 해주겠지 하는 생각에

모두의 불편 속 계속 박혀만 있다.

 

김민준, <돌부리>

 

민준이는 조금 세세하게 들어가서 돌부리로 대표되는 삶의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남들은 다 피해 가는데 나만이 불편해하는 돌부리인 것일까? 잘못된 방식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서로에게 불편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피해 가면서 누군가 해주겠지 하고 거두지 않는 것이 어디 한 가지뿐일까? 역설적이게도 발부리 아래의 돌이란 책에서는 귄터 뎀히니의 말을 빌어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걷다가 돌부리 같은 걸림돌 때문에 발을 헛디뎌 잠시나마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보자는 프로젝트로 나온다. 그렇다면 민준이도 돌부리를 두고 새로운 생각의 전환을 해보아도 좋겠다 싶다. 우리 안의 돌부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 시가 그 첫 시라면 앞으로의 시에서 하나 하나 밝혀가는 것이다. 그렇게 시를 또 쓰면 이런 생각이 혼자만의 짜증하고 불편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프로젝트처럼 세상을 밝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사과가 되었다.

거울을 보니 붉고 영롱한 예쁜 사과다.

옆에는 녹색 사과가 있다.

붉어지기 전에 영롱한 초록빛이다.

 

비슷하게 붉어지길 바랐다.

사실 붉어 보여서 부러웠다.

그는 녹색이었다그냥 그랬다.

 

내 안은 혹시 물렁하게 썩어있을까?

 

○○○, <시기>

 

이름을 쓰지 않은 친구의 사과는 앞의 진혁이와 비슷하다. 사과는 어떻게 붉어지는 것인지 알지만 비교만 하다가 내 안은 물렁하게 썩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자책하는 것이다. 그 전에 붉은 사과에 대한 시기이다. 그러나 붉은 사과가 되어가는 길에 익지 않은 채 비슷하게 될 수는 없다. 비슷한 것은 가짜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제 스스로 바람과 비와 햇살을 담아 붉어져야만 영롱하다 할 수 있다. 비슷하게 붉어지려고 부러워해보았자 진정한 로 붉어지고 영롱해질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영원에 기댈 수 없듯이 저절로 붉어지는 길을 지금부터 가는 것이다. 그런 비교우위의 마음이 혹 썩었을까 저어하는 것이라면 기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각성하고 신발 끈 다시 고쳐매는 길 위의 자기 시간이길 바란다.

 

하늘의 온도가 높아지면

모두들 카메라를 열고 눈에 담는다.

 

나는 마음에 담는다.

이제는 나도 카메라를 열고 함께 담는다.

 

○○○, <보고 싶다>

 

역시 이름을 밝히지 않은 마음 하나. ‘을 통해 마음에 담는 것이다. 카메라의 렌즈를 여는 것은 진정 보고 싶은 대상에 대한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카메라의 해상도가 아무리 높아도 눈만큼 높을 수 없고, 사진이 오래 남는다지만 마음에 담는 것만큼 오래 가는 것이 없다. 눈과 마음을 열고 보고 싶은 것은 저 너머 어디에 있겠지? 가까운 누군가의 마음일 수도 있고, 아무튼 보고 싶다는 말이 이렇게 간절한 말이었나 싶다.

 

시간을 흐른다고 표현하는 걸 보니

엎지른 사람이 많았나 보다.

 

그믐달로 열고

초승달로 닫은

나의 괄호 속에서

 

나는 얼마나 엎질렀던가

 

나은결, <괄호 속에서>

 

할 일이 많아 걱정이다.

나에게는 그 많은 일을 다 할 시간이 없다.

하기 싫은 일을 할 시간에 마음 편히 놀고 싶다.

나에게는 왜 충분한 시간이 없는가?

충분한 시간이 있을 때 마음 편히 놀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시간이 있다.

할 일을 하지 않고 마음 편히 노는 시간이 있다.

 

강한결, <시간>

 

함께 읽어줄 때는 몰랐는데 다시 읽으니 ( )안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 놀라운 시다. 시간은 과학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시의 끝없는 주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은결(이름에도 흐름이 있다)이가 시간을 흐른다고 본 것은 예사롭지 않다. 시간은 그저 아무 데로나 흐르는 것이 아니다. 은결이는 그동안 그저 엎지러버리고 흘려버린 시간을 아쉬워하는 것일까? ‘그믐달로 열고/초승달로 닫았다는 표현은 괄호로 말한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더 환하게 만들어준다. 그믐달로 떴다가 다시 초승달로 뜬 밤하늘 동안의 시간과 기억을 되새겨주어서 그렇다. 여기까지 온 시간을 스스로 엎지러버린 시간으로 여길 수 있으나 흔히 소설에서 쓰는 기법대로 말하지 못한 말이거나 이렇게 시를 읽는 독자가 들여다보는 마음 한 대목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한결이의 시간은 엎질러버린 시간 그대로 있는 듯하다. 할 일이 많아 걱정이면서도 마음 편히 놀고 싶은 시간만이 고여있는 느낌이다. 괄호 안의 시간이라기보다 충분히 누리고 싶은, 격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 싶은 시간이어서 공감하면서도 다음이 걱정이 된다. 그러나 시로 표현한 지금의 마음이기에 충분히 누리다가 할 일을 찾기를 바랄 뿐이다.

 

작다.

하지만 크다.

작은 고추가 맵듯이

현금보다 작은 카드가

현금보다 더 크다.

카드는 다양한 색상의 디자인이 있다.

여러 가지 색상이 있지만

여러 색을 전부 가진 카드가

제일 크더라.

 

최예준, <카드>

 

사람들은 민감하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은

자기도 가져야 된단다.

없으면 유행에 뒤쳐졌다고 욕하고

있어도 이미 지나간 것이라고 욕한다.

너무 어렵다.

나도 민감해져야 되나?

 

최예준, <유행>

 

 

예준이는 보기시를 읽어주다가 즉흥적인 퀴즈를 냈을 때 단박에 맞춘 친구다. ‘원 방에 숫자들이 놀고 있다고 시작하는 <시계>란 시였는데 즉흥적이고 순발력으로 쓴 시답게 바로 맞춰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두 편을 이어 썼는데 앞의 <카드>는 또 하나의 보기시 <난 돈을 쓴다>는 공업고등학교 학생의 시만큼이나 많은 것을 담지 못해 아쉽다. 그러나 <유행>은 다르다. 민감하다는 것은 사실 짧게 스쳐가는 이슈일 뿐이다. 그것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면 유행에 늦었다고 말하거나 자기도 가져야만 뒤떨어지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욕까지는 아니겠지만 그것이 충분히 욕으로 들릴 만하다.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다 맞추려면 정작 나의 것은 사라지고 유행에 좇아가는 헛된 삶만 비칠 수도 있다. 그러니 예준이는 너무 여러운 문제라 여기면서 민감하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하는 물음을 던진 것이다. 예준이만의해답을 갖고 있으리라 믿는다. 이 시를 읽어주는 것만으로 확실한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충분히 공감한다는 친구들의 반응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난 배가 고플 때 냥

똥 싸고 싶으면?

오줌 싸고 싶다?

놀아줘라 냥

사랑해줘 냥

외로울 때도?

 

빨리 간식 줘라!

토하고 싶다. 침대의 나가.

우아아악!! ~

 

박나예, <냥이의 말>

 

고양이가 나예고 나예가 고양이가 된 것일까? 고양이는 개처럼 고분고분하지 않다. 사람을 집사로 부릴 만큼 도도하다. 고양이의 말을 잘 알고 있는 나예, 거꾸로 읽어보면 고양이의 말로 자신의 마음을 ()! 하고 말하는 듯하다. 짧은 한마디로 끝났지만 끊임없이 배고프다, 똥 싸고 싶다, 오줌 싸고 싶다, 놀아줘, 사랑해줘!” 하고 말을 거는 고양이를 잘 끌어들여서 말하고 있어 재미있다.

 

딸그락딸그락 열쇠 소리가

들린다.

나는 문 앞에 후다닥 뛰어간다.

문이 열린다.

나의 제일 친한 친구가 돌아왔다.

나는 펄떡펄떡 친구 위에 점프를 한다.

커다란 웃음을 보여주면, 집안에서 후다닥 뛴다.

어서 와 친구야~

그래서저녁밥은 언제 줄 거니?

 

박나예, <친구가 돌아올 때>

 

다음 시도 고양이의 말 같다. 집에 갔다가 돌아올 친구를 기다리는 마음은 늘 이렇게 후다닥 뛰고 설렌다. 마지막 행은 마치 밥을 해달라(놀아줘, 사랑해줘!)고 보채는 말로 끝났지만 친구의 존재로 환히 밝아지는 방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 친구에게 거꾸로 밥 해주고 사랑해주고 놀아주는 고양이의 말을 재미나게 실천하며 지내길 바란다.

 

마음에 안 들어하고 불평했다

으음?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모난 마음이 괜히 심통을 부렸나?

그래서 마음에 못 들어가게 했나?

마음아, 마음아, 예쁘게 좀 봐줘

네 마음에 들어가게 해줘.

 

전예슬, <마음>

 

다시 마음이 나왔다. 따로 또 같이란 말처럼 결이 다르면서도 같은 얼굴로 바라보던 도서관 안의 친구들이 떠오른다. 마음은 어떤 공간이고 어떻게 드나들 수 있는지, 바로 옆의 친구를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예슬이가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어쩌면 자신인지도 모른다. 어떤 말과 일로 틀어졌던 친구와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가 그렇게 불퉁거리는 내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이냐고 묻는 것 같다. 모난 마음 안에 깃들기는 남이나 나도 어렵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그럴 때는 이렇게 시를 써서 드러내는 것이 좋다. 시를 읽어주면 바로 진심을 알아주고 그 마음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알게 된다. 스스로에게, 혹 상대방이었다면 겸연쩍게 화해를 건네는 마음이라는 것을.

 

설움이 목에 걸려 가슴을 퍽퍽 치다가,

눈물이 삐져나와 아픔에 몸서리친다.

아파 아파 아무리 소리쳐도 꿈속이고,

깨워주는 사람이 없다.

일어나야지, 지각이다.

 

전예슬, <새벽을 꿈꾸는>

 

예슬이가 이어 쓴 시를 읽어주니 친구들이 격하게 공감하면서도 마지막 행에서는 웃음을 보여주었다. 새벽 꿈은 이렇게 아플까? 우리의 두뇌가 편집하여 벌이는 이야기가 꿈이라고도 하지만 정작 아플 때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이렇게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죽음과도 같이 깊은 꿈은 그만큼 마음이 좋지 못하다는 예지몽일까? 그래도 예슬이나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 씁쓸하게 웃게 만든다. 이러다가 지각하겠다, 아니 지각이다, 그래서 바삐 몸을 놀리며 또 잊어버리는 삶의 시작. 그것이 삶이 진면목이지 않을까?

 

갯벌에 사는 작은 가재가 집을 짓는다.

집게발로 땅을 파서 흙을 퍼낸다.

우리가 신기해하며 둘러싸고 지켜보며

시끄럽게 떠드는데도 마다하지 않고 집짓기를 이어간다.

 

몸집 큰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도 무섭지 않은가 보다.

아니면 너무 무서워서 빨리 집을 완성해서 안에 숨고 싶을지도 모른다.

 

도훈, <활엽수>

 

도훈이도 열심히 시를 썼다. 모든 간디학교 친구들이 억지로 짜내어 시를 쓰지 않듯이 자기만의 결이 느껴지는 시를 썼다. 바닷가 모래밭에 가면 흔히 보았을 달랑게나 큰발농게 같은 것들이 모래경단을 만들어놓은 자리 말이다. 사람들이 오면 재빨리 숨는 게와 달리 도훈이는 구경꾼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집을 짓는 가재(게나 가재나)를 시 안에 끌어들였다. 시끄럽고 무서울 만도 한데 자기만의 집을 짓는 것은 어쩌면 얼른 집을 지어서 안으로 숨고 싶은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사람으로 치면 이렇게 지어라 저렇게 지어라 간섭하는 눈들로부터 얼른 숨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 같다. 그런데 제목은 활엽수. 활엽수에 일찍 집을 짓는 거위벌레?를 상상하다가 다른 상상을 해보며 숨고 깊을지도 모른다는 표현의 다른 뜻을 새겨볼 만하다.

 

엄마가 말한다.

공부는 언제 할 거야?

 

좀 이따 할게

 

엄마 빨래 개는 건 언제 도와줄 거야?

 

좀 이따 도와줄게

 

영어 단어는 대체 언제 외워?

 

이따할게

 

좀 이라는 단어 없이 말 해봐.

 

이따 할게.

 

유승주, <좀 이따 할게>

 

승주의 시는 모두를 웃게 하였다. 어쩌면 은결이의 엎지른 시간이나 한결이의 마음 편히 놀고 싶은 시간을 멋쩍게 만드는 또 하나의 유예된 시간을 말하는 것 같아서일까? 아마 간디학교에 오기 전까지의 시간이나 다른 방황을 할 때의 모든 말이 그랬는지도 모른다. ‘좀 이따가하고 말해놓고 자신을 가늠해 볼 시간, 그런 시간도 챙기지 못하고 말았을 것 같은, 웃고 있지만 씁쓸해지는 시간을 말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이리 귀한 시간을 마무리하면서 한 말은 시를 계속 쓰라는 것이었다. 쓰다 보면 내 마음을 내보이게 되고, 낯설지만 새로운 독자를 갖게 되고 그 다음은 더 홀가분해지고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간디학교에서 졸업에 맞춰 내는 논문집도 있지만 우정아 선생님이 담당하듯 시집 또한 내보면 어떨까 싶다.

밤을 달려오면서 얼른 다시 읽어야지 했던 시를 내놓고 글을 쓰는 것도 아이들의 시집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좋겠다. 모두를 위한 시에 바치는, 이름 있고, 마땅한 사랑을 받아야 하는 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 이 글은 2023년 10월 31일, 작은도서관 문화가 있는 날 <시를 쓰자, 시인이 되자>는 프로그램으로 충남 금산 간디학교 지혜마루도서관에서 한 수업에서 나온 시를 중심으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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