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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표는 -증평 형석고등학교 학생 시를 중심으로

시와 함께한 나날

by 참도깨비 2024. 1. 2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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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표는

-증평 형석고등학교 시

 

오랜만에 고등학생들과 시 쓰기 수업을 했다. 수업이라기보다는 작가 초청 강연 비슷한 것이었는데 시 이야기 반, 시 쓰고 함께 읽어보는 시간으로 거의 번갯불에 콩 구워 먹기 식으로 진행했다. 초등학생부터 어르신들까지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보고 각자의 간절한 시를 써보고 읽어보면서 서로 다른 시선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공감하는 시간이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먼저 살펴본 작품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에 즉흥적이고 순발력이 돋보이는 시였다. 도서관 창문으로 바라본 그대로 느낀 것이면서 그런 풍경에서 우러나는 마음을 그린 시가 세 편이었다.

 

앉아서 창문을 보니 산 한쪽은 다 뽑혀 비어있고

한쪽은 곧지만 조금은 앙상한 나무들이 자리 잡고 있다.

살면서 어떠한 일이 있을 때 버티려는 나의 마음 한켠과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 한켠이 생각나는 풍경인 것 같다.

 

손은아(1-5), <창밖>

 

도서관 창문으로 보이는 야트막한 산과 공장 건물들, 겨울이어서 더욱 황량해 보이는 풍경이 두 갈래로 나뉜 자신과도 같다는 은아의 마음이 쓸쓸하게 다가온다. 여름이었으면 달라졌을까? 나무들이 뽑힌 자리와 앙상한 나무가 만들어내는 풍경에서 어떻게든 버티려는 마음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현실은 무엇일까? 구체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살면서 어떠한 일이 있었을 때마다 버티려는 쪽과 포기하고 싶은 쪽이 꼬였던 때가 황량한 풍경 속에서 떠오른 것 같다. 산 한쪽이 다 뽑혀나가더라도 버티고 있는 나무를 닮아 나머지 한쪽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었으면 좋겠다. 오히려 그런 살풍경한 현실이 버티는 힘을 더 강하게 해줄 것이기에.

 

정보실 책상 맨 오른쪽 맨 뒤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면

공장 같아 보이는 건물 두어 채와

조그마한 마을, 큰 산이 보인다.

바로 옆에도 산이 있는데 거기서 고라니와 청설모도 봤다.

원래 나무가 빼곡했지만 최근에 많이 베어버리는 바람에

산이 초라해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고라니가 잘 보이지 않는다.

괜스레 내 탓 같고 미안해진다.

다시 또 정보실 책상 맨 오른쪽 맨 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백지민, <정보실 책상 맨 오른쪽 맨 뒤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면>

 

또 다른 관찰자 지민은 자기가 있는 자리를 굳건하게 표시하면서 제목을 정하고 시작했는데, 친구들이 웃었다. 정확하게 그 자리를 강조했기 때문일까? 처음이라 이름을 말해주지 않고 시를 읽어주었는데 누가 썼는지 바로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아무튼 그렇게 지목한 자신의 자리가 시의 분위기를 묘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자리에서 보는 풍경 또한 앞의 은아 시만큼이나 살풍경하다. 끝자리이다 보니 좀 더 너른 풍경을 볼 수 있어서 멀리 있는 산과 공장 두어 채, 마을까지 볼 수 있었는데, 역시 베어낸 나무들이 걸린다. 고라니와 청설모를 본 적이 있는 산이었지만 간벌해서 을씨년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은아의 시가 자기 마음을 비춰본 것이라면 지민의 시는 고라니까지 보기 힘들게 되어버린 풍경이 자신의 탓인 것 같다고 미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시작과 마무리까지 자기 좌표를 찍듯 표현한 부분이 모든 풍경을 책임지기라도 하듯 말이다. 따져서 깊숙이 들어가 보면 그런 마음을 갖게 된 데는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냥 보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된 데에는 사람들의 편의대로 풍경을 바꾸어 고라니나 청설모가 살 수 없게 만든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이다.

 

하늘은 창창하고 망망한 들판은

바람이 불면 소와 양들이 보인다.

이것은 인생과 같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에서

그 소와 양 같은

묘소한 것들을 찾아내야 한다.

 

엄성준(1-4), <찬송시>

 

그런 점에서 성준의 시는 그 마음을 묘소’, 그러니까 작고 어린 것에서 찾고 있는 듯하다. 창창하고 망망한 들판은 앞의 시가 향한 곳과는 같지 않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바람까지 불어 들판에 소와 양들처럼 작고 어린 것들을 찾아내는, 길 잃은 양 한 마리 찾는 예수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찬송시라는 제목이어서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작고 어린것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우리가 되찾아야 할 덕목이자 시의 역할이기도 하다.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는 누구일까?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갈 때마다 터져 나오는 수많은 는 대부분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과도 같다.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힘든 학교, 친구가 있고 경쟁이 있고 목표가 있는 삶은 에게 무엇을 주는가? 먼저 친구 관계를 보자.

 

너무나 밝은 내 친구

밝은 친구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어디서나 밝고 명랑한 내 친구와

말장난도 하고 웃고 떠들며

오늘 하루도 재미있게 보냈다.

인사를 하고 서로 헤어지며

나중에 또다시 만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하고 돌아간다.

나는 집에 가서 다음에 무엇을 하고 놀지 생각하는 동안

친구는 이유도 모른 채 깊어져 가는 상처에

택도 없는 반창고를 붙여가며

상처가 나아지기만을 기다린다.

 

연정빈(1-2), <우울증>

 

정빈의 시는 나와 친구가 어떻게 부딪혔는지 말하고 있지만 많은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학교에서 늘 해맑기만 한 친구와 재미있게 웃고 떠들고 돌아온 시간, ‘는 재미있는 시간을 어떻게 놀지 생각하는 동안 친구는 상처를 안고 낫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니, 반창고를 붙인다고 낫지 않을 상처라 했기에 우울이 깊은데 왜 는 태평하기만 할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거나 그 친구의 상처가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내막을 알고 있다는 것인가. 밝은 얼굴이 밝게만 느껴지지 않고 우울이라는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가면처럼 보인다. ‘우울고립의 바다를 말한 보기 시 영향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꺼내주지 못하는 그곳에 친구가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우울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고, 친구들 앞에서는 밝게 보이려고 행동해도 집에 가면 이유도 모른 채 깊어져 가는 상처를 안고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이런 우울한 시를 쓰게 된 것일까?

 

거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들어온

이 피아 없는 전장 속 그는

 

모든 걸 잃어버릴 만용도

모든 걸 취득한 기개도

없기에 그저 순응하며 하염없이 죽어간다.

 

아무런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나가는

이 고요한 무저갱 속 그것은

 

심해를 관망하는 비루한 망루꾼의 사념에도

만물을 초탈한 군자와 천자의 괄시에도

그저 어찌할 도리가 없기에

하염없이 생의 역을 유지 시켜 나간다.

 

최정민, <>

 

정민의 시가 의미심장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이란 피아 없는 전장이어서 죽어가는 무저갱의 삶이라고 비틀어서 말하고 있다. 무저갱無底坑. 악마가 벌을 받아 떨어지는 밑 닿는 데 없는 구렁텅이가 아닌가. 여기는 피아 없는 전장은 이런 곳일까?

 

엄마, 난 지금 전장에 서 있어요

옆에 앉은 지친 동료는 붉은 피 위에서 신음하고 있어요

 

날아오는 총알은 날 여전히 지치도록 만드네요

한 녀석은 호시탐탐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요

배신의 깃발을 품 안에 감춘 채 말이죠

난 그를 쏠 수밖에 없군요

우리라는 거창한 명분이 아닌 나를 위해서요

 

우린 많은 전리품을 얻을 수 있어요

쓰라린 상처를 움켜쥐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말이죠

자신이 영웅인 줄 알던 애송이는 눈을 감지만

아무도 그를 위해 울어주지 않아요

 

먼저 나서길 기약한 형제들은

누구보다 집과 가족이 그리울 거예요

포화 섞인 하늘보단 파란 풍경이 보고 싶어요

 

이기적인 생존을 위해 도망치고 선동하던

그들이야말로 승자겠죠

아빠, 꼭 만나러 갈게요

하지만 난 어쩔 수 없는 군인인가 봅니다

새로운 전장을 기대하며 가슴이 뛰어요

 

안태경(금산 간디고), <학교>

 

안팎으로 나름 경쟁 없는 학교라 알고 있는 곳에서도 학교를 전장이라고 표현했듯이 정민의 시도 그런 것일까? 만용이 통하지 않고 그것을 벗어날 기개도 없이 순응만 강요당하는 곳은 관망만 하는 망루꾼의 사념과 초탈한 듯 비전과 행복과 평안을 말하는 군자와 천자의 괄시만 있을 뿐이라고 어렵게 돌려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생은 어쩔 수 없는 역을 사는 신세인 것이다. 혼자 해결할 문제도 아니고 정답이 아닌 함께 해답을 찾기 위해 애써야 할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전장과 무저갱을 드나들 때의 비용이란 무엇일까? 비싼 비용을 치르고 들어온 전장과 아무런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나가는, 여기서는 학교이고 다르게 말하면 이 이루어지는 바깥의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비용은 아무것도 낳지 않는 생물체처럼 허무하다. 좀 더 다른 시로 구체화시켜 쓰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다경의 시는 처음의 나무 뽑힌 자리가 그렇듯이 뭔가 남기는 흔적이라고 말하고 있어 대비된다.

 

나무가 지키고 있던 자리는

전쟁이 나도

불이 붙어도

나무가 베여도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한 번 무너졌다고

포기하지 말자.

적어도 나의 노력은

흔적이라도 남길 테니까.

 

김다경(1-2), <흔적>

 

흔적이란 중요한 말이다. 뭔가 하고 난 자리에는 흔적이 남겨 마련이다. 잘된 일이든 잘못 된 일이든 그 일을 말해주는 흔적. 싸움의 앞자리가 아니라 뒷자리인 셈이다. 다경은 몸부림 같기도 한 그것을 노력이라도, 최선을 다 했다고 하면 그것대로의 흔적만으로도 있는 것이지 않느냐고 말한다. 동물의 흔적을 좇는 생물학자나 세밀화 작가의 시선이 말하는 것도 흔적이다. 그 흔적을 보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있으니까 나무가 있던 자리는 나무의 삶이 묻어날 수밖에 없다. 베어졌고 불에 탔다고 나무 자체를 부정할 수 없는 일이듯 적어도 나의 노력이 남긴 흔적을 평가해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앞의 시들과 묘한 울림을 가져오는 시이자 그것대로의 답을 찾아가는 길이 얽히면서 풀리는 것 같다.

 

한번 말한 비밀은 SNS와 같다.

한번 말한 나의 비밀.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모두가 알고 있다.

한번 말한 것이

입소문을 타 멀리멀리 퍼져간 것이다.

이를 통하여

한 번이라도 말한 비밀은

비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겠다.

 

김나영, <비밀이란?>

 

나영의 시는 친구 관계에서 일어난 이야기 한 부분을 말하고 있다. 비밀이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말했던 이야기가 어느새 모두에게 퍼져 뜻하지 않은 오해와 곤란을 겪었던 일에 대해, 그것이 SNS상에서 벌어지는 현실까지 아우르고 있다. ‘한번이라도 말한 비밀은 비밀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 말이다. 그러니 말에 신중을 다해야 하겠지만 앞으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입을 닫는 화자의 마음을 읽으니 난감하다. 내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기 어려운 데다 소문에 의해 와전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우리의 소통 현실이기도 하니 안타깝다. 이렇게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의 처지를 알 수 있고 진정한 소통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애매한 재능

애매한 노력

애매한 성격

 

여기까지 쓰는 것도

한세월

 

1등을 위한 보통들

그러나

박수는 오직 1등에게

 

이번에도 애매한 나는

숨어야 한다.

 

최민석(1), <그림자>

 

내 안에 두 자아가 있다.

두 자아는 서로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쪽 말도 맞고

저쪽 말도 맞고

어떤 것이 맞는 것일까?

두 자아는 계속 싸운다.

 

신지성(2), <두 자아>

 

민석은 스스로를 평가하면서 늘 애매한 그림자로 말하고 있다. 잘하는 거도 아니고 그렇다고 못 하는 것도 아니기에 그렇다. 시를 쓰고 있는 순간까지 허덕이고 있다고, 그래서 1등에게만 박수가 가고 애매한 나는 그림자로 숨어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숨어들 수는 없는 법. 그림자 없는 삶이 없듯이 이것 또한 인정하고 애매함을 자신만의 특기나 노력으로, 흔적을 남기는 최선의 삶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시로서는 성공하고 있다. 애매한 자신을 숨길 수밖에 없는 그림자로 표현하면서, 인정하면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시에서 얻었으리라 믿기에. 다음 시는 샤미소의 단편소설 <페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에서 슐레밀이 악마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팔고 황금 주머니를 얻었다가 나중에 그림자 없는 삶은 가능하지 않음을 깨닫는다는, 그림자에게서 배우는 삶을 말해준다.

그런 연장에서 보면 그림자는 두 자아가 아닐까 싶다. 지성의 말처럼 이쪽도 맞고 저쪽도 맞는애매한 상황에 빠진 인 것이다. 문제는 서로 말을 듣지 않고 따로 움직인다는 것인데, 지성은 애매한 상황은 좀 더 확실한 두 자아의 싸움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제 뇌 과학자의 연구에 보면 우리의 뇌가 그렇다고 한다. 천사와 악마의 역할을 하는 부분이 따로 있고, 그것을 조정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니 두 자아는 싸울 수밖에 없고, 포기와 수긍, 긍정적이고 부정의 연속이고 그것을 조정하고 양심이나 정의, 용기와 믿음을 갖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큰 걱정보다는 인정하고 서로의 말을 경청하고 해법을 찾아주는 것 또한 통합된 자아가 해야 할 몫이다.

 

나는 높은 곳을 좋아한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훌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고소공포증이 심하다.

시선도 항상 바닥을 향해 있다.

그래도 난 아쉽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언제나 내 밑에서 나를 올려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 존재 따라 다른 누군가를 올려준다.

그래서일까, 나는 높이 올려보아도, 낮게 내려보아도

두렵지만 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니 내 위도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박가빈, <믿음>

 

믿음은 지도자란 시가 있다. ‘믿음은/지도자./우리에겐 믿음만 있으면 되지.’(메리 올리버, <> 부분)처럼 두렵지만 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높은 곳이란 목표이기도 하여서 고소공포증과 두려움을 함께 가져온다. 그럴 때마다 믿음은 굳건히 나를 받쳐주고 누군가를 올려줄 수도 있는 힘이 되고 애매한 삶에게도 용기를 주고 그림자가 숨어드는 바닥만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서로에게 줄 것을 작정하고 쓴 것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마음이 관계 짓고 있는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이렇게 타자는 소통할 수 있음을 시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짐을 짊어질 것이다.

모든 짐을 짊어지면 모든 것이 괜찮아지겠지.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바라볼지라도

결국에는 부정적인 생각마저 잊어버리니

나의 무게는 줄어들겠지.

 

김주호(1), <짐을 짊어짐>

 

기꺼이 <짐을 짊어짐>이라 말한 주호는 그림자와 믿음 사이 다른 위치를 보여준다. 짐은 부정적으로 쓰일 때가 많다. 그렇기에 무게는 갈수록 짐을 진 자를 골병들게 만든다. 그러나 주호는 기꺼이 짐을 짊어질 것이라고 선언하고 시작했다. 쉽지 않다. ‘를 바라보는 사람들마저 모든 짐을 짊어지라고 말하는 현실에서 그것을 부정적인 생각이라 치부하며 기꺼이 짊어지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무게가 줄어든다는 역설. 길이 없어도 가야 하는 중국 톈산의 짐꾼 같다. 그렇다면 은 무엇일까? 편견과 무시, 오해와 같은 그림자일까? 생각하기에 따라 각자의 화두가 되는 것 같다.

 

짧은 길로 가는 목표

긴 길로 가는 목표

어쩌면 끝내지 못하는 목표

 

나의 목표는 어느 정도일까

나의 목표가 짧을지라도

나의 목표가 먼 길로 이어지더라도

만약 나의 목표가 끝내지 못해도

나는 그 길을 따라갈 것이다.

너의 목표는 어느 정도일까

 

박상현(1-2), <목표>

 

목표보다는 목적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가는 길인지 역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목표는 나를 긴장하게 하고 삶의 정체를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목표는 수단이고 목적은 의미이다. 짧고 긴 길을 가는 목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적이 중요한 것이다. 왜 그곳에 도달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물어보고 목표를 조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표는 누가 세워주는 것이기도 하고 사회가 인정하는 데로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곳에 가는 즐거움이 없으면 목표로 세운 곳에 도달하더라도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래서 목표를 끝내지 못해도 자기 길을 가겠다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짧은 길이 될지 먼 길이 될지 모르지만 목표가 그 길을 가는 자신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기에 목표 너머의 길이 또 다른 나를 만들어주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좀 쉽게 말하면 뒤에 오는 시처럼 모래시계를 뒤집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시험도 망쳤다.

모래 한 알 스르륵,

이번 면접도 떨어졌다.

모래 두 알 스르륵,

이번 회의에서도 혼났다.

모래 세 알 스르륵,

이번 명절 때도 창피했다.

모래 네 알 스르륵,

그럼에도 나는 다시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지민영, <모래시계>

 

시험, 면접, 회의 때마다 깨지는 는 창피한 존재이나, 그럼에도 다시 모래시계를 뒤집어 자기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민영은 말하는 것 같다. 애매하고 실패하고 목표에 다다르지 못할 때 기꺼이 모래시계를 뒤집어 다시 길을 만드는 것까지. 미루고 지체하는 것이 아니라 망치고 떨어지고 혼나면서 자기만의 새로운 시도를 할 시간을 버는 것이다. 모래시계의 한 알, 한 알은 시간에만 한정된 것이기에 그것을 넘어서면 다른 세계가 보인다. 다시 반복하지 않을 나만의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기에 과감히 모래시계를 뒤집는 민영을 응원할 수밖에 없다.

 

감정을 다스리는 일

다음은 흔히 기분이라고 말하는 감정에 대해 가볍게 다룬 시다. ‘를 다루는 것이 어쩌면 기분 같기도 할 만큼 현재의 상태를 말해주는 시, 많은 이야기를 감추고 있는 시.

 

내 방은 나를 따라 한다.

내 기분이 좋으면 이불도 뽀송뽀송

바닥도 반짝반짝

 

내 기분이 나쁘면 이불도 헝클헝클

바닥은 부스스

 

내 방은 나를 따라 한다.

매일 깨끗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배예빈, <내 방>

 

직접 구경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방뿐이겠는가? 옷차림이나 가방, 그날그날 사람을 대하는 자세까지 기분에 좌우되기 쉽다. 방구석이 이게 뭐냐고 나무라는 말까지 들리는 것 같다. 솔직한 시다. 날마다 깨끗하면 좋겠지만 마음먹고 실천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래서 기분이라는 감정을 다루기 쉽지 않은 것인데 그렇다고 기분에 따라 모든 것이 좌우된다면 감정에 따라 끌려가게 되는 일도 벌어지게 될 것 같다. 사람을 대하는 것까지 그렇게 바뀐다고(내 기분이 좋으면 친구 얼굴로 뽀송뽀송, 기분이 나쁘면 친구 기분도 헝클헝클) 생각해 보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기분이 오락가락

마음이 들쑥날쑥

어떨 땐 슬프기도, 어떨 땐 화나기도

나는 또, 오늘도

알 수 없는 내 마음에 힘없이 휘청이다

그래도 나는 내 마음이, 내 감정이 좋다.

나의 감정 없이는

두근거리는 설렘도, 웃음꽃 피는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게 될 테니까

 

연서인(1-2), <감정>

 

그런 점에서 서인의 시는 그 감정을 정확히 다루고 있다. ‘알 수 없는 힘이 휘둘려 휘청이는 를 발견한다. ‘, 이렇게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구나 하는, 그래서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앞의 그 감정에 휘둘리다 보면 두근거리는 설렘이나 웃음꽃 피는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고 말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감정은 따라쟁이가 아니어야 한다, “내 성격 알지?” 그러니까 알아서 해, 나는 변하지 않으니까 조심하라고 말하는 어른들을 볼 때마다 진정한 감정 뒤에 감응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생의 첫 야자를 겪고 나에게 집중할 힘이 다 닳아버렸다.

아무 생각 없이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는데,

저 아래 수많은 것들이 보이고 들린다.

장난치고, 웃고, 떠드는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전화하는 소리 등등

나를 볼 수 없으니 저 밖을 보았다.

내 몸을 통해 전해졌던 감정들을 이번엔 직접 느낀다.

나는 왜 나의 감정만을 느끼려 했을까?

주변에 이렇게 많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을 사용하면 되는데

어째서 나의 감정만을 키우려 했나?

 

박성훈(1), <저 밖의 삶>

 

그런 점에서 성훈의 시는 감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들끓는 내 감정에만 쏠리다 보니 밖의 것들에 대한 감응이 없었다는 것을, 그 감응은 내 몸을 통해 전해졌던 감정들임을 알게 되었다니 얼마나 놀라운 발견인가. ‘어째서 나의 감정만을 키우려 했을까?’ 하는 자각은 잠시 들끓는 나에게서 한 발 비껴 서서 감응할 시간과 여유를 찾는 것이다. 현명한 판단이다. 타인의 소리도 그렇게 를 볼 수 있는 진정한 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이치가 있다.

나무가 자라기 위해 물을 줘야 하고

꽃이 자라기 위해 햇빛을 받아야 한다.

감정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언제나 기쁘기만 할 수 없고

슬프기만 할 수는 없다.

 

연효준(2), <이치>

 

또 다른 시, 효준이는 중도에 섰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듯 한쪽으로 쏠리지 않은 자연그대로의 질서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나무가 자라기 위해 물이 필요하고 꽃에게 햇빛이 필요하듯 감정 또한 그렇게 자라는 생물과도 같다고.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언제나 기쁘기만 할 수 없고/슬프기만 할 수없다는, 자양분을 통해 스스로 자라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서로 다른 감정선을 읽고 난 뒤에 자신을 바라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고 삶이 달라질 것 같다.

 

지친 영혼들의 시

새로운 몰입이 필요한 시점의 시,

 

책상 바닥에 꽂히는 시선

눈에 힘은 풀려 시야는 손으로 문댄 듯 뿌옇다.

이것이 멍때린다는 건가

잊을 만하면 이렇게 떠오르곤 한다.

 

너무나 지루해 흥미를 잃고 만 순간에

피곤한 나머지 천장을 관찰할 순간에도

정작 몰입되어야 할 종이책엔

머리를 내준 채 코 골기 바쁘다.

 

그렇게도 허무하게 보내는 그 시간은 아깝지 않다.

반복되는 지긋지긋한 일상이 가득해 봐야 무슨 소용일까?

기까이꺼 비워놓고 태평하게 드러눕고파.

 

주혁진(2-1), <허무를 향한 몰입>

 

혁진은 지쳐있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서 그까짓것다 내려놓고 태평하게 드러눕고 싶다고 한다. 아니면 대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몰입하기 어려운 야간자율학습 시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허무하게 보내는 시간반복되는 일상조차 소용이 없다는 회의에 이르렀다. 허무보다는 회의에 가깝다. 해결책은 스스로 흥미를 잃고 난 순간에서 다시 찾아야 하고 허무로 빠져들지 않는, 반복의 일상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알아보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도 이런 상태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좋다. 그래야만 그까짓것!” 하고 자리를 떨쳐 일어날 힘이 생기지 않을까.

 

나는 우리 지역의 대표다.

장비를 착용하고 나무 작대기로 상대와 맞선다.

나는 최선을 다해도

그것밖에 못하냐면서 욕을 먹어왔다.

이 욕들이 나를 자극했다.

매일 매일 빡센 훈련과 욕설,

매우 힘들고 괴로웠다.

하지만 이것들이 쌓이고 쌓여

나는 지역의 대표가 되었고 거의 모두가 날 알아본다.

그동안의 고통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지만 또다시 이 짓거리를 다시 하고 싶진 않다.

 

김규래(1), <검도>

 

규래의 시 또한 안타깝다. 처음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운동선수로 모두가 알아볼 만큼 자긍심마저 가질 만한데 또다시 이 짓거리를 다시 하고 싶진 않다고 강하게 밀어붙이며 마무리했다. 그동안의 고통스런 시간마저 보상받을 것처럼 말했는데, 그 말은 그 모든 훈련과 욕설마저 참고 이 자리에 온 자신에게 보내는 응원으로 끝낸다는 것이다. 스스로 고난을 짊어지고 훌륭한 선수가 되겠다는 거짓 다짐마저도 없는 걸 보면 아무리 결과가 좋다고 하더라도 과정에서 겪은 마음의 상처가 큰 것이다. 최선을 다해도 돌아오는 것은 그것밖에 못하냐!”며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상처뿐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한때 무너진 자존감을 세우기는 쉽지 않다. 시합에서 이기고 얻은 지역의 대표라는 것도 허울인 것이다. 그저 그 모든 과정을 묵묵히 이겨낸 자신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만 남았다. 공부도 마찬가지이지만 운동을 즐겁게 할 수는 없을까. 성취감과 함께 스스로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고통은 고통일 뿐인가. 진정한 자신을 만들어주는 고통일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시는 한 선수의 고통을 이해하고 격려하면서 자존감 있는 지역 대표로 만들어야 함에도 현실이 그렇지 않음을 말해준다. 어른들이 답을 주어야 할 것이다.

 

안경 벗고 세상 보면 뿌예서 안 보여

안경 쓰고 세상 보면 눈 아프고 어지럽네.

내 눈을 감고 말지.

 

이승현(1), <안경>

 

그러니 승현이처럼 말을 하지 말아야지’, ‘내 눈을 감고 말지로 귀결되는 것이다. 안경은 장치일 뿐이다. 눈이 나빠졌으니 당연히 눈을 써야지, 하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게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집 가고 싶다.

310분이 조금 넘은 지금

등교한 지 7시간이 조금 넘은 지금

조금 있으면 집에 갈 수 있다.

집중해서 수업 들어야지.

집중하고 있는데

문득 드는 생각

, 집 가고 싶다.

 

유강석(2-1), <7교시>

 

7교시가 그렇다. 지치고 지쳐서 집중이 안 되고 집에 가는 것만이 구원인 지점에 서 있는 친구들이 보인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학생들이 학교에서 너무 오랜 시간 의자에 묶여있는 게 현실이다. 학교에는 쉴 만한 시내와 물과 바람과 를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있는지 묻고 싶다.

 

시간은 기억도 안 나게 금방 지나가 버리고

바쁠 땐 느리게 흐르다 못해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사진인 줄 알았던 긴 순간을 멈춰있는 동영상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그 친구가 보고 싶다.

 

위너, <재생>

 

위너가 말하듯 잠시 멈추고 바라볼 시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멈춰있는 동영상이란 말은 우리가 기억할 것들에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사진일 뿐인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멈춰있는 동영상을 누르면 반복되는 일상의 소중한 기억들이 지금과 맞닿아 새로운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 자리에 친구라는 또 다른 소중한 존재가 있고, 나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지친 영혼들에게 이런 순간들을 되새기고 누리고 앞을 내다볼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학습의 질과 방향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그 밖의 시들

한 가지 주제를 묶어둘 수 없는 개성 강한 시들도 많았다. 정해진 시간에 써야 한다는 부담을 떨치고 써주어 고마울 따름이다.

 

쓰면 쓸수록

중독된다.

 

얻으면 얻을수록

중독된다.

 

흔하지만 많으면 많을수록

중독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이에

중독되어서 살아간다.

 

신은설(1-3), <비싼 종이>

 

모든 일이 중독 아닌 게 있을까 싶지만 은설은 그 가운데 종이에 중독된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비싼 종이가 무엇인지는 알 것이다. 쓰면 쓸수록, 얻으면 얻을수록, 더 많을수록 좋다고 중독된 삶이 무슨 일을 만드는지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비싼희생을 치르고 사는 삶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 학교는 높은 곳에 있다.

증평 구석진 곳에 있어 안 보일까 그런가

하필 반도 제일 꼭대기 층이라

학교를 갈 때면

내년에 1층이길 빌며

두꺼워진 다리를 붙잡고

학교를 오른다.

 

오지수(1), <높이 있는 학교>

 

더 높은 곳에 있는 학교도 있지만 졸업하면 남는 건 두꺼워진 다리만 생각난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웃음짓게 만든다. ‘구석진 곳에 있어 안 보일까싶어 높은 곳에 있다는 말이나 내년에는 1층에 교실이 생겼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재미있기만 하다.

 

난 이렇게 학생과 가까이 있는

교감 선생님을 본 적이 없다.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은 되게 무거운 사람이라는 생각만 있었는데

정말 하루종일 학생과 붙어 계신 것 같다.

학생들을 좋아하시는 것 같고

학생들을 위해주시는 것 같고

학생들과 친해지려 하신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다.

 

○○○, <선생님>

 

이 시에 나온 교장 선생님은 천상 선생님인 분이시다. 아이들과 맞절을 하며 덕분입니다!”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어서 당연히 이런 시가 나올 법하다. 앞의 시와 쌍을 이루는 시여서 재미있게 쉬어갈 만하다.

 

대한민국에는 네 가지의 계절이 있습니다.

, 여름, 가을, 겨울

각각 계절마다 한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며

한 계절일 땐 다른 계절을 그리워합니다.

이 역시 다른 계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계절은 느끼는 감정과 경험이 다르며

사계절은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장우혁(1-4), <사계절>

 

눈이 내렸다.

온도를 보니 7란다.

입김을 불어보니

하얀 연기가 올라온다.

 

아이들은 눈밭에서 놀고 있고

어른들은 차 유리에 쌓인 눈을 치우고 있다.

나는……

춥네, 집에 들어가 쉬어야지.

 

신정우(1-4), <12>

 

계절을 다룬 두 편의 시는 오랜 고민(?) 끝에 나온 시다. , 여름, 가을, 겨울이 그렇듯 눈밭에서 놀고 있는 평안한 시다. 우혁의 시에서 독특한 것은 각각 계절마다 한 사람의 이름이라는 것과 다른 이름을 부르듯 한 계절일 때 다른 계절을 그리워한다고 표현한 부분이다. 그러니 각자에게 계절들이 어떻게 왔는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나의 눈은 3개다.

예쁘고 신기한 걸 담을 수 있는 눈과

슬프고 우울한 걸 담을 수 있는 눈과

너를 담을 수 있는 눈.

 

○○○(2-3), <내 눈>

 

굳이 3개라고 하지 않아도 좋았겠지만 짧고 간결한 시의 덕목이 느껴진다. 살짝 연애시로 쓴 것 같은 시다. 그런 점에서 은 아주 중요한 감정이고 감응의 첫 번째 창이자 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는

내 옆에 항상 있어 준다.

 

내가 아플 때도

행복할 때도

울고 싶을 때도

기쁠 때도

화났을 때도

내 친구는 항상 내 옆에

같이 웃고 운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싸울 때도 있지만

금방 화해하고 같이 영화를 본다.

 

내 곁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하고

서로를 가장 잘 알며

서로를 위해주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내 친구는

우리 엄마입니다.

 

○○○, <내 가장 소중한 친구>

 

식스센스급 반전(?)이 돋보이는 시다. 냉장고에 붙이면 용돈이 늘어나고 맛있는 음식이 생길 시다. 누군가를 더 기쁘게 해 줄 시.

 

밤 구름이 나의 달빛을 흐려도

연거푸 드러낸 숨 사이로

비춰진 너의 얼굴이

어두워진 마음속 구름을 밝혀내어

달 없는 밤하늘도 빛이 오르네.

 

또 다른 밤하늘 구름은

비탄에 빠져서 눈물과

폭풍 같은 한숨을 내쉬어도

이 역시 너를 마음에 그리니

맑은 하늘 되어가네.

 

눈이 내려 나를 덮어도

된비 세차게 불어도

차마 가실 줄이 있으랴

너와 함께 할 이 세상은

아름답고 숭고한데

 

이혜성(1-3), <구름과 밤과 너>

 

또 한 편이 있다.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쓴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자주 써야 한다. 사람이 아닌 대상이더라도 좋다. ‘연거푸 드러낸 숨 사이달이 나오는 대목이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가. ‘어두워진 마음마저 씻겨 가는 아름다움을 자주 보고 느껴야 한다. ‘라는 존재의 바깥에서 눈이 내려 덮고 된비 세차도 나타나는 아름다움은 스마트폰과 온갖 정보의 홍수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니 구름과 밤과 너같은 시는 계속 씌여야 한다.

 

2월 마지막 주 매서운 추위가 지나가고

먼지 가득 따뜻한 날씨가 찾아온다.

코로 내쉬어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뭐라 말할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

이 분위기가 작년을 회상하게 한다.

지나간 과거들은 빛바랜 기억일까

빛바랜 얼룩마저 예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추억 아님

빈티지인가

다시 생각해 본다.

 

김경훈(2-1), <무제>

 

무제라고 했지만 지나간 그 시간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뭐라 말할 수 없는 특유의 맨 얼굴을 가리고 반쪽의 얼굴로 살아야 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빛바랜 기억만은 아니다. ‘빈티지는 포도주의 생산연도라고 한다. 어느 해에 생산되었는지를 말해주는 표시이지 몇 년산을 골라야 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품질 수준에 따라 알맞은 시기를 고르는 게 중요하다는 말인데 이 시로 말하자면 빛바랜 얼룩마저 예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각자의 시 또한 어느 해의 자기를 말해주는 표식인 셈인데, 그 시가 나올 수밖에 없는 각자의 날씨와 환경을 말해주는 것이니 한 편 한 편 소중할 수밖에 없다. 표제를 <나의 목표는>이라고 정했지만 끝없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생각하고 새로운 길을 만드는 빈티지의 시들에 감사하며 자기 시를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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