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독자에게
-경기 심석고등학교 학생 시를 중심으로(2024.11.08.)
멀리 남양주하고도 마석에 있는 심석고등학교 1, 2학년들을 만난 것은 수능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떨어지고 단풍잎들도 늦가을을 진하게 물들이는 오후, 다른 행사에 겹쳐서 신청한 학생들이 다 오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금요일인데도 교실에는 꽤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두 학생의 사회로 국어 선생님의 시 낭독과 함께 시작했다.
산에는 꼭대기까지 오르려고 가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생강나무까지만 가자
두더지가 떠들쳐 놓은 흙 아래 숨소리도 듣고
마른 나뭇가지 바람에 부러지는 어수선함 속에서도 정갈하게 오르는
새싹의 숨을 맡으며
산에서 가장 먼저 핀다는
생강나무까지만 다녀오자
곧 구름나무에도 새잎이 돋겠지
사진 좀 덜 찍자
프레임에 가두지 말고
눈에 담아 오자
꽃 피는 순간을 초고속카메라도 보여 주는 것도 폭력이듯
꽃은 뿌리의 말
생강 냄새 나는 이야기가 곧 시작되고
꽃 속에 아무개 벌레의 알이 자라
보드라운 잎에서 깰 거라는 것도 모른 척하자
바람 불어 좋은 날
마른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마른 잎새처럼 내려앉는 봄 햇볕에
젖은 몸 말리고 내려오자
신전의 기둥들인
나무 아래 숙연해지고 의연해지며
세상 아래에서 오늘도 열심히 살자
졸시, <오늘은 생강나무까지만 가자> 전문
마지막 줄의 ‘오늘도 열심히 살자’에 방점을 찍고 학생들의 눈빛을 둘러보며 시작하고 난 다음에는 ‘시를 쓰자, 시인이 되자’에 실린 어린 초등학생부터 어르신들 시까지 살펴보고 저마다의 시를 써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교과서에서는 만날 수 없고 배운 적 없는 시들에 학생들 눈빛이 더 반짝였다. 시가 무엇인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막연한 공포에서 벗어나 낯선 독자를 만나 자기만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일임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시가 개뿔이간디? 우리가 글을 몰랐지, 삶을 몰랐나”는 말처럼 각자의 삶이 묻어나는 시들을 보고 자기 시를 쓰는 것이 중요한 시간이다. 전체 두 시간 남짓 되는 시간 중에 시 쓰는 시간은 10분 정도지만 보기 시를 마중물로 하여 나온 학생들의 시 한 편 한 편이 절정이었다. 첫 시간이라 이름을 말하지 않고 낯선 독자로 만나는 시이자 날마다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며 사는 친구들의 시가 이 정도라고 칭찬해 주면 저절로 박수가 나올 수밖에 없다. 국어 선생님들도 “우리 애들 시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요.”하고 놀라는 시, 교과서에서는 만나지 못한 시들에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시란 낯선 독자를 만나는 길
평생 살던 마을에서 떠나본 적이 없는 어느 할머니가 시 좀 써보자고 하니 “개뿔이 시여? 그럼 소뿔도 시겠네.”하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시인이라고 초대받아 학교에 가면 처음은 벌쭘하다. 어렵게 모심 시인이라는 말이나 시를 써보자고 하는 말에 철벽이 가로막히는 느낌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시를 쓰기 위한 영감은 어떻게 떠올리나요? 영감을 시 속에 녹여낼 때 주의하는 점과 본인이 운율을 형성하는 방법에 특별한 점이 있으신가요? 목표가 필요 없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인가요?
많은 문학들 중 하필 시를 선택해서 시인을 하고 있는 이유, 시인 말고도 다른 직업이 있는지, 시란 무엇인가요? 시가 가지는 가치, 요즘같이 시를 포함한 문학(인문학)이 죽어가는 시대에 인문학 관련 직업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나는 어떤 삶의 태도를 지녀야 할 지, 시를 쓰는 방법, 시를 포함한 문학적 재능이란 무엇인가? 궁금합니다.
좋은 시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많은 문장을 사용해 확실하거나 정확한 묘사를 하는 것과 최소한의 문장을 사용해 독자가 생각하도록 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욱 바람직한가요?
이런 질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끌어내는 시, 내가 쓰고 싶은 시가 없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여러분들과 시 한 편 쓰고 돌려가며 읽어보면 왜 시가 문학 가운데 왜 하필 시를 쓰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기에 전과 후는 완전히 다른 판이 되는 셈이다.
시를 써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수업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말을 써야 할지
어떤 표현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불이라도 난 듯 복잡했다.
그러다 문득 앞을 봤을 때
“시는 내가 쓰지만 낯선 독자를 만나는 일”
이 말에 안도하며
낯선 독자가 내 마음을 공감해 주길 바라며
한 글자씩 적어본다.
전가인(1학년), <낯선 독자에게>
가인은 보기 시를 읽어주면서 가장 먼저 한 ‘시란 낯선 독자를 만나는 일’이라는 말을 잘 살려썼다. 못 쓸 뻔했는데 이렇게라도 고민해 보았다고 솔직하게 썼다. 무엇보다 시 안에 자기 마음 이야기를 담아 내보인다는 부끄러움과 함께 백지 공포를 느끼는 순간, 누군가 읽어주고 이해해 주는 독자를 만나 다른 작용이 일어나는 것임을 충분히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불이 날 지경이었으나 지금부터라도 한 글자 써보는 것이라고 궁색한 변명이라도 해보는 것이 시의 시작인 것이다. 순발력으로 만들어낸 재치 있는 시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유형도 있다.
무엇을 써야 할까?
지금하고 있는 고민이다.
무엇을 먹어야 할까?
조금 이따 할 고민이다.
무엇이 맞을까?
시험 볼 때 할 고민이다.
펜 돌리며 하는 고민
무엇을 고를까?
변진혁(1학년), <무엇을>
정작 시를 쓰려고 해도 가장 막히는 것은 ‘무엇을 쓰느냐’이다. 백지 공포는 비단 학생들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다. 어른들 대부분도 누군가 써준다면 모를까 첫 시작부터 공포스러움을 겪는다고들 한다. 생각이 났다가도 하얗게 지워져버린다고 한다.
그런데 진혁은 재치 있게 넘어서고 있다. 지금 시각은 슬슬 배고파지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지는 때, 고민 세 가지가 이어진다. ‘무엇을 써야 할까’가 다급한 고민이고, ‘무엇을 먹어야 할까’는 다음 고민이다. 게다가 시험 문제 앞에 맞닥뜨린 고민까지 엮어서 ‘무엇을’에 방점을 찍었다. 그 ‘무엇’이 문제인 것이다. 조금 이따 할 고민과 문제를 알지 못해 연필을 굴려야만 하는 상황과 함께 제목으로 ‘무엇을’이라고 하면서 숙제를 푼 셈이다.
다음 시 또한 보기 시로 들려준 것에 대한 풀이를 담고 있어서 재미있다. 그 ‘무엇’이 될 것을 담았으면서 정작 자기 말은 없는 것이 아쉽지만.
시가 무엇인지
깨달을 듯 말듯
아직도 이게 맞나 고민이 되지만
한번 써 본다
한 사람이 겪은 일과 느낀 점을 쓴 것
한 사람의 일생을 표현한 것
한 사람의 말하지 못한 말들을 늘어놓은 것
이런 글들을 보니
자연스레 손이 가는 대로 써본 글
이게 시인가 보다.
김시우(1학년), <시란>
시란 내 삶에서 무엇인지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기 시들이 말하는 것은 주저 하지 않고 말하는 것이고, 겪어서 깨우친 것, 삶 그 자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번에는 ‘시란’ 제목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어디 가나 꼭 나오는 시의 유형이다. 그냥 모르겠다, 골치 아프다고 써내는 숙제와는 다른 애교 있는 시이자 앞으로 쓸 시의 첫 관문 역할을 하는 시라 할 수 있다.
돌같이 살자는 말
우리는 종종 길을 걷다가 콘크리트와 하수구 사이에서 피어난
작은 꽃 한 송이를 보곤 한다.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날아가 없어질 것 같은 작은 새싹이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꽃을 피우고 냄새나고 어두운 하수구 안에서
홀로 빛을 내고 향기를 내뿜으며 피어있다.
고작 이 작은 꽃 하나도 이렇게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내고
포기하지 않는데.
우리는 편하고 안전한 길만 선호한다.
또, 길이 없는 길을 마주하며 피하고 외면하기만 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는 이 길도 처음엔 누군가가 걷고,
바위가 있다면 부수고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야 비로소
우리가 걷는 길이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나는 길이 없어도, 내가 설 자리가 없더라도
작은 꽃처럼 어떻게든 피어나고 나아갈 것이다.
이선근(1학년), <작은 꽃>
선근의 시 처음은 어디선가 많이 듣는 교양조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자신의 의지를 담아내는 마무리에 다다르면 그야말로 창대한 시가 된다. 콘크리트 길이나 벽 틈에서 피는 작은 꽃이란 어떤 존재인가. 먼지나 흙이 쌓여 다져진 곳에서 씨앗이 떨어져 피어나고 향기를 내뿜는 갸륵한 존재가 아닌가. 어쩌면 모방일 수도 있는 그 터전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보면, 순전히 자기 말이다. 성적과 성공을 최우선을 여기는 인생길에서 편하고 안전한 길은 어쩌면 포기나 다름 없는 것인데 선근은 그 길에서 누군가 첫걸음을 딛고 딛어 만든 길을 생각한다. 새로울 것 없는 여기서 선근이 배우는 것은 바위마저 부수고 가야 한다는 굳은 의지이다. 길이 없어도 만들어야 하고, 설 자리가 없을 것 같아도 비집고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작은 꽃’의 정신을 배우는 것이다. 작은 꽃에 ‘나’를 들여놓은 것만 해도 대견하다. 어떻게든 피어나고 나아갈 길을 생각하는 선근의 시에 아낌없는 박수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바위마저 부수고 길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의지는 다음 시에서 본질을 만났다.
돌 같은 사람이 되자
별 볼 일 없어 보여도
단단한 돌
돌 같은 사람이 되자
아무리 상처 입어도
깎여도 본질을 잃지 않는 돌
돌 같은 사람이 되자
깎여 별 볼 일 없어도
누군가는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돌
돌 같은 사람이 되자.
김소영(1학년), <돌>
소영의 시에서 나온 돌의 본질은 돌의 의지이기도 하다. 바위가 부서져도 본질은 없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사람의 힘 앞에 부서지더라도. 소영은 선근의 시에 화답이라도 하듯 돌 같은 사람이 되자는 의지를 드러낸다. 바위나 돌은 깎여도 본질을 잃지 않는다. 그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굳건한 의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소영에게 돌은 어쩌면 별 볼 일 없는 존재이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존재일 거라는 의심을 갖게도 할 것이다. 선근이 수없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이겨내듯 소영도 끝내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돌을 본질을 알아보고 ‘돌’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돌’은 상처 입어도 ‘돌’이라는 본질 그 자체임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북적이는 도시 속
단단하고 무거운 차들이 아스팔트 길을 한순간 지나간다
한가로운 시골 속
푸릇푸릇한 새싹들이 흙길을 비집고 나와
새싹은 영양분을 얻고
흙은 그늘을 얻는다
나는 세련됨보다는 소박함에서 더 많은 가능성을 본다
서우혁(1학년), <길>
우혁도 그 비슷한 느낌으로 합세했다. 선근의 시와 비슷하지만 자기 나름의 느낌을 잘 살렸다. 흙길을 비집고 나온 새싹은 흙에서 영양분을 얻고, 흙은 나무일지 풀이 될지 모르지만 흙에게 그늘을 준다는 상호작용을 말하고 있다.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양분과 그늘을 준다는 소박한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가능성’은 ‘잠재성’으로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새싹이라는 작은 존재가 안고 있는 잠재성이란 말이 더 어울린다. 가능성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자 보여지는 것이라면 잠재성은 새싹이 양분을 얻고 흙으로 하여금 그늘을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넓은 폭의 차이를 말해주는 잠재성에 어울린다. 소박하면서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가능성’보다는 ‘길’이라는 깨달음으로 느끼는 잠재성 말이다.
몰아치는 폭풍우 속
앙상한 고기잡이배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기울 듯, 말 듯, 기울 듯, 말 듯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
빛조차도 두려운 어두운 파도가
고기잡이배를 뒤집으려 매섭게 몰아치지만
고기잡이배는 쉬이 뒤집히지 않는다.
어두운 밤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
모든 것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 바다에
떠 있는 고기잡이배 하나.
그 배의 선장은, 바로 당신이다.
이산(1학년), <고기잡이배>
이산은 한 발짝 물러난 자리에서 앞의 시에 나온 상황을 고기잡이배에 빗대어 말하고 있는 듯하다. ‘작은 꽃’과 ‘돌’ 같이 살자는 말이 여기에서는 파도 치는 바다 위로 나아가고 있다. 어두운 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바다는 상상만으로도 더 험난해 보인다. 두려움으로 가득 찬 바다, 보기 시에서 나온 ‘우울’과 ‘고립’으로부터 누구도 구원해 주지 않는 바다에 떠 있는 고기잡이배를 보여주고, 당신이야말로 뒤집히지 않는 고기잡이배의 선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친구들에게 말하는 것일까? 자신에게 하는 말일까? 누구든 모두가 고기잡이배의 선장이라고 생각해 보자는 말로 들려 한세상 살아가는 데 용기를 북돋워주고 있는 듯하다.
가장 밝은 별이자 무거운
자기이기도 하면서 ‘너’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시’라는 것을 알아가는 친구들. 시는 낯선 독자를 만나 ‘나’를 각인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스스로 빛나는 존재임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지내는 학교에서 시 쓰기는 아주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다. <고기잡이배>에서 험난한 바다를 이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 키를 잡은 선장이었듯이 가원의 시에서도 빛나는 존재는 역시 ‘나’이다.
숲 한가운데에서
정월대보름맞이 달집태우기
납작한 돌을 쌓아 올려 돌탑 만들기
저마다 소원 비는 방법이 다른데
나는 별이 보고 싶어서
굴러다니는 조약돌 모아 바닥에 하늘을 그렸다
네 이름은 가장 밝은 별
시리우스로 하자!
박가원(1학년), <시리우스>
아주 평범한 소원 빌기로 시작했지만 중간에 가원이 내놓는 방법은 스스로 빛이 나는 별 그대로이다. 별을 보고 소원을 비는 것은 단지 절대적인 대상에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바닥’에 별을 그리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빛나는 조약돌을 바닥에 하늘을 그리고, 그것을 가장 빛나는 ‘시리우스’로 하자는 자신감은 하늘로 솟아오를 만하다. 무엇이 기대지 않고도 스스로 빛나는 때이고 바닥이라고 느꼈을 때는 이렇게 하늘을 그리고 스스로 별이 된다고 생각해 보니, 굳이 소원을 빌 까닭도 없어지고 당당해지는 느낌이다.
방금까지 네가 앞에 있었는데
너에게 손을 뻗는 순간
보이는 건 천장뿐
아직 하고팠던 말을 하지 못해
애써 눈을 감아보지만
너는 나중에 오라는 듯이
자취를 감췄다.
황정원(1학년), <낮잠>
그러는 사이 정원은 낮잠을 자다 여기가 어디인지 실감한 모양이다. 꿈일까? 잠깐 다녀간 ‘너’라는 존재는 친구보다는 학교 밖의 누군가일까? 손을 뻗어 잡으려는 순간, 보이는 건 자신을 가둔 천장 아래 교실일 뿐이다. 잠깐의 낮잠 동안 간절했던 이야기가 펼쳐지기도 하기에 ‘너’는 구원자이거나 그리는 대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장’을 확인하는 순간 멀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여서 허망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허전한 마음을 시에 담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낯선 독자이자 ‘너’에게 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 화려한 옷을 입어
오늘은 홍대로 갈 거야
컨실러, 쿠션 피부를 깨끗하게 하고
팔레트 블러셔 생기를 채워
아이라이너와 애교살도 빼먹지 않게 주의하고
마지막으로 화룡점정, 틴트랑 송충이 같은 속눈썹까지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친구의 한마디
“누구세요?”
아니, 너야말로 누구세요?
서하은(1학년), <꾸밈 단계 5>
하은의 시는 그런 꾸밈 단계를 훨씬 넘어서서 자신의 욕망하는 바를 잘 드러내고 있어 재미있다. 천장뿐인 교실에서 곧 다가올 주말과 홍대라는 화려한 사람 물결 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어찌 그러한 욕망마저 잡아두겠는가. 잔뜩 치장하고 다른 누군가가 되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은 마음을 잘 표현했다. 읽어주는 순간, “누구세요?”하는 밝은 얼굴로 박수를 쳐주는 것만 보아도 대부분의 욕망을 끌어 올려주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다. 공부와 학생이라는 신분이 금기하고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숨통을 틀 수 있는 것도 시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
어릴 때는 작고 가벼웠던 가방이
중학생이 되니 커지고 교과서가 들어간다
고등학생이 된 더 커지고 참고서가 들어간다
대학생이 되니 더 더 커지고 학술서가 들어간다
어른들의 가방은 얼마나 무거울까?
서우혁(1학년), <가방>
그런가 하면 우혁은 ‘가방’에 마음이 묶여 있다. 어릴 때 가볍게 매던 가방이 점점 더 용량이 커지고 무거워지는,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가방’에 묶여 있기에 더욱더 짠하다. 교과서와 참고서, 학술서로 무거워지는 상징은 무엇일까? 우혁에게 짐 지운 목표를 말해주는 것일까? 교과서 〈 참고서 〈 학술서 다음은 무엇으로 무거워질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성장이라는 말, 진로라는 말, 인생이라는 말도 어쩌면 가방으로 보는지도 모르겠다. 꼭 그런 것만이 아닌데도 그렇다면 짐보다는 가장 밝은 ‘별’이자 ‘나’로 다시 시작하고 ‘돌’이라는 본질이자 의지로 딛고 일어설 수 있게 도와주어야 마땅하다.
태어나면 열쇠 하나, 걸음마 하면 열쇠 둘
학교 가면 열쇠 여덟, 지금은 열일곱 개
양손 가득 열쇠 들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문 앞으로
알고 보면 별거 아닌 자물쇠 하나
그 중 하난 맞겠지
서연우(1학년), <19.9살>
연우는 더 복잡하게 ‘열쇠’를 들고 왔다. 어느 열쇠든 맞으라고 만들었겠지만 ‘가방’ 대신 열쇠를 주고 책임과 결과라는 무거움을 담보한 현실을 말하는 것일까? 스무 살을 앞둔 카운트 형식의 ‘19.9살’이 숨막혀 보인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문’이란 두려움을 낳는다. 뭐든 하난 맞겠지 하는 기대치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든 열린 자유의 문이 아니라 또 다른 문과 문이라는 통과의례만으로 겹쳐진 것이라면 아찔하다. 가볍게 밀 수 있는 문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현재의 심정을 잘 헤아릴 수 있는 ‘열쇠’와 ‘19.9살’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어 좋다.
2달 같은 2년이 지나갔다.
한참 남은 줄 알았던 20살
벌써 1년 정도밖에 안 남았네.
그렇게 되고 싶어 했던 것인데
이제는 조금 두려운 것 같다.
조금 더 학생일 수는 없을까?
물론 성인이 되어 하고 싶은 것도 많지만
안대를 쓰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안대를 버리고 밝은 빛을 보고 싶다.
김진형(2학년), <20살>
그에 비해서 진형은 1년밖에 남지 않은 20살의 문턱에서 솔직한 심정을 밝히고 있다. 한때는 얼른 스무 살이 되어 떠나고 싶었던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안대로 가리고 문턱을 넘어야 하는 심정이어서 두려울 뿐이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조금 더 학생일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이 부디 스스로 안대를 버리고 만날 수 있는 ‘밝은 빛’의 시간이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하고 가야 할 길이기에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다. 괜찮을 것 같지만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구간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저 악몽에 지나지 않은 불면의 밤도 많기 때문이다.
잠들 수 없는 밤이 있다
침대가 나를 잡아먹는 밤이 있다
어둠이 너무 거대한 밤이 있다
하루 동안 나에게 너무 실망해서
내 자신에게 불면을 선물해야만 숨 쉴 수 있는
밤이 있다
눈꺼풀 안쪽의 어둠과
눈꺼풀 바깥쪽의 어둠이 똑같아져야만 잠들 수 있는
그런 밤이 있었다
○○○(1학년), <불면>
이름을 밝히지 않은 <불면>의 시는 비단 이 시기에만 겪는 것이 아니라. 요즘 사회의 화두 또한 ‘불면’이기 때문에 ‘불면’을 낳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해야 한다. 잠들 수 없는 밤을 ‘침대가 나를 잡아먹는 밤’이라고 격하게 표현하였지만 한 행만 넘어가면 불면의 실체가 밝혀진다. 나 자신에게 실망해서 불면의 밤을 선물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비단 자신만의 책임이 아니다. 왜 밤에는 자책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학교에서 직장에서 집안일은 끝내고 누운 밤은 왜 단잠을 선물하지 않는가. 쉬이 잠들 수 없게 만드는 자책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것일까? 화자는 그러기 위해서 눈꺼풀 안과 밖의 어둠이 같아져야 한다고 했다. 불면을 다루고 있지만 산뜻한 표현이다. 충분히 그런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만큼 ‘불면’의 속을 읽을 수 있다. 수면제나 유도제로 달랠 수 없는 지점이다. 깊은 바다의 잠수정이나 우주선에서 유영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같은 단계의 교차점이다.
빨리 갔으면 좋겠지만
느리게 갔으면 좋겠는 것
기다려지지만
기다려지지 않는 것
잡고 싶지만
이미 저만치 떠난 것.
○○○, <시간>
시간도 그렇다. 느리게 갔으면 하고 바라지만 그럴 수 없고, 잡고 싶지만 저만치 벌써 가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은 나와 함께 가고 있는 엄연한 시간 그대로이기도 하다. 이것이 더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스스로 지체되어 있다 생각하면 일정하고 어김없이 가고 있는 시간이 벅차고 숨 막힐 수밖에 없다. 역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 시에서는 ‘시간’에 좀처럼 맞추지 못하고 있는, 그렇다고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꼬리를 자르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나는 항상 같은 시간에 일어나
항상 같은 시간대의 버스를 타고
학교로 등교한다.
매일 매일 짜여진 시간표대로 행동하니
마치, 로봇이 된 기분이다.
서문지선(1학년), <로봇>
그에 비해서 지선은 같은 시간대에 일어나고 버스를 타고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자신을 ‘로봇’에 빗대었다. 한 치 밖으로도 나갈 수 없는 학교 로봇의 심정조차 더는 터뜨리지 못하고 ‘로봇’의 기분 그대로 있을 뿐이다.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프로그래밍 된 로봇의 심정 그대로여서 안타깝다.
나는 어제의 내가 밉다
어제의 할 일을 오늘의 나에게 미룬
어제의 내가 밉다.
오늘의 나는 또다시
미룬 과제를 내일의 나에게 부탁한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미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 곤이 잠이 든다.
김예성(1학년), <나>
예성은 앞의 시와는 또 다르게 구체적으로 무엇이 힘들게 하는지, 시간보다 다른 관념을 들고 왔다. 어제와 오늘, 내일로 이어지는 숨막힘 속에서 ‘나’의 자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어제 했어야 할 일을 오늘로 미룬 ‘나’는 어제의 ‘나’가 당연히 밉다. 그리고 오늘의 ‘나’는 또 내일의 ‘나’에게 부탁하는 상황이라니! 우리가 쉽게 미래를 꿈꾸기도 하지만 그 미래의 어제와 오늘의 ‘나’가 만드는 일이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면 흔히 어른들이 말하듯 그때 가면 지금의 ‘나’가 미워질 거야, 그때 잘할 것을 하고 후회하는 순간이 오고, 늦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실패한 인생이 될 거야, 하고 말하는, 무서운 날. 그런데도 ‘나’는 곤히 잠을 잔다니! 아찔하지만 어쩔 수 없는 또 다른 ‘불면’이다. 아마 화자는 그렇게 미워하기 전에 마음을 고쳐 먹고 마음을 다지며 곤한 잠을 자는 것이이라. 그렇게 읽어야 한다. 그러면 짧은 시 안에 과거와 오늘, 미래를 모두 명확하게 담고 있는 것이 된다.
여기는 적막한 푸른 정원
시간이 지날수록 해는 사라지고 어둠만이 남았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에 세게 불어온다
아무리 바람을 막으려 발버둥 쳐도
바람은 걷잡을 수 없이 계속 불어온다
바람이 쎄게 불어서인지 방향 감각이 사라졌다
너무 어지럽다 어지럽다 어지럽다
그리고 눈이 떠졌다 지금 시간은 새벽 5시
여전히 바람은 세게 불어온다.
이경채(1학년), <귀에 이명>
그럼에도 현재는 바람이 그치지 않고 불어온다. 경채는 ‘이명’일 뿐이라고 했지만, 이명 또한 그런 현실이 만든 난청이기 때문에 여전한 바람 앞에 지치지 않고 방향 감각을 잡고 곧추 서 있어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시만 보면 어지럽게 울어대는 ‘바람’만 있지만 그래서 깨어있게 하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자리를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가야 하는 길, 또 다른 시
수많은 ‘나’들로 섞여 있는 시에서 다음 시들은 순발력과 또 다른 재미로 다급한 국면을 돌리고 있다.
우린 모두 죽음으로 간다
저놈은 뭐가 급해 저리 달려갈까
어어 밀지 마라
이우현(1학년), <가보자 가보자>
우현의 시는 제목부터가 압권이다. 무엇을 다룰지 제목만 보면 모르겠다. 모두의 예상을 깨듯 ‘죽음’의 길로 시작했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 모두가 끝내는 맞닥뜨려야 하는 ‘죽음’을 다루면서도 짐짓 여유롭다. ‘저놈은 뭐가 급해 저리 달려갈까’하고 여유와 웃음을 주다가 한 방 크게 터뜨린다. 그러더라도 ‘밀지는 마라’면서 어느 트로트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알아서 갈 때 간다고 전해달라고 말해 인기를 끌었던. ‘가보자 가보자’ 하면 아니 가지 못하는 길이지, 두려워 할 일이 아니지 하면서 잔뜩 허세라도 부려보는 것 같아 재미있게 시의 맛을 음미하게 한다.
야자들 하다가 창문을 봤다
오늘은 떡볶이가 먹고 싶다
붉은 노을 보며 침 꿀꺽
국물 한 입 하늘 한번
떡 한 입, 구름 한번
서연우(1학년), <야자 떡볶이>
연우도 금방 순발력을 발휘해서 맛있고 재미있는 시를 썼다. 무엇을 쓸지, 어떻게 쓸지 고민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만들어내는 것 또한 시다. 여자하면서 창밖을 보면 당연히 떡볶이 생각이 난다. 노을과 구름이 딱 그렇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이 노을 보며 침을 삼킬 수밖에. 여기서 시를 만드는 스킬 하나, 국물 한입에 하늘 보고, 떡 한입에 구름 본다는 운율을 맞추는 것, 예사롭지 않다.
손을 놓으면 보고 싶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리운
네모 상자.
부서지거나 망가지면 가장 슬픈 것
없으면 허전한 네모 상자.
보물 1호.
문채빈(1학년), <핸드폰>
채빈도 우리 모두에게 필수품이자 보물일 수 있는 핸드폰으로 즉흥시를 썼다. 조금 더 재치 있게 썼더라면 무릎을 치고 감탄할 수 있었을 텐데,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그려서 재미가 덜한 것이 아쉽다.
두 개의 머리가 아닌
세 개의 머리를 가진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나를 여러 방향에서 볼 수 있으니
너의 머리가 세 개이면
나의 기쁨도 세 배야.
이서현(1학년), <두트리오>
검색해 보니 1세대를 리즈 시절로 삼는 머리가 셋 달린 새 포켓몬이라고 한다. 긴 부리에 키위 비슷하다. 두트리오는 암컷이라는데 4세대에 와서는 달라지는 듯하다. 머리 3개는 각각 기쁨, 분노, 슬픔으로 일본판 이름의 유래는 멸종된 조류 도도새와 트리오(Trio), 한국판에서는 頭(머리 두)와 트리오로 적절하게 번안했다고 한다. 제목을 다른 것으로 했더라면 그게 뭘까 고민하며 제각작 다르게 상상했을 텐데, 단순한 기쁨에 머물러서 아쉽다. 그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짧고 간결하게 내보이는 것만으로도 잘 했다.
당신의 앞에서는
틀린 글자가 된 것 같다.
잉크가 마를 때까지
당신과 눈을 맞추며
나를 쉽게 지나치지 못하게
당신의 주의를 끌면서도
완벽한 문장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결국은 지워지기를 택하는 것까지
김나운(1학년), <여백>
나운의 시는 한 편의 연애 시 같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대로 시에 가까이 가기 위한 완벽한 자세라고 봐도 좋다. ‘여백’은 얼마나 깊고 넓은 자리인가. 스스로 지워지기를 택하는 것은 완벽한 문장을 망치지 않기 위해 비워둔다는 설정 그 자체가 여백의 마음이다. 이렇게 충분히 시를 쓸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스스로 지워져 다른 문장을 쓰기 위한 길이니 앞으로도 계속 시를 써가길 바랄 뿐이다.
멀쩡한 줄만 알았다.
그렇게 갈 줄 몰랐다.
빌어먹을 빙판길, 나는 고꾸라졌다.
구급차를 타봤다. 재밌진 않더라.
수술을 하랜다. 처음 느끼는 공포였다.
수술이 잘 끝났다. 그래도 슬프더라.
몇 달간 못 걸었다. 화가 나더라.
남 탓을 해봤다. 날씨는 죄가 없드라.
나는 그 길을 걸을 때마다
기분이 뭣 같다.
이환(1학년), <발목>
환의 시는 아직도 시큰한 발목을 떠올리며 환상통을 누리고 있는 듯하다. 빙판길에 넘어져 구급차를 탔던 일을 떠올리며 길 탓을 해보지만 기분만은 뭣 같다는 말을 아주 솔직하고 거침없이 말해서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었으니, 역효과일까? 시가 굳이 근사하고 진지하게만 쓸 게 아니라 거침없이 쏟아붓듯 쓰는 것도 필요하다. 앞에서 매기는 소리와 뒤에 뒷받쳐주는 구절들이 잘 어울리며 자신의 심사를 돋워주고 있어 더 재미있다.
오늘은 또 무엇을 할까 하며 왠지 모르게 무기력해진다.
계속 기분이 좋아지 않는다. 오늘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네.
생각하면서도 막상 친구들과 얘기하며
어울리다 보면 어느샌가 기분이 좋아진다.
친구들이 어쩔 땐 나에겐 상처를 주는 날이 있어도
나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해준다.
친구, 요즘엔 친구들에게 의지하는 것이 좋다.
이윤후(1학년), <친구>
윤후는 ‘친구’에 대한 재발견을 했다. 무기력하고 기분이 좋지 않은 학교 안에서 어디 숨을 데가 있다면 모를까. 그런 기분대로 간다면 친구마저도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을 것이다. 무기력하니 기분이 금세 좋아지거나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기분으로 지내는 것도 친구들 사이에 있으니 상처와 위안이 함께 섞이면서 어느새 전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어울려 지내면서’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날은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어느날은 위안의 말로 화해를 하고 기대게 되는 것이다. 같은 창과 같은 천장 아래 지내는 나날이 만들어준 ‘친구’란 말이 정감있게 다가온다.
냉기만이 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이곳은 지하 미궁 351층.
날 때부터 이곳에서 자라왔으니 익숙하다.
그럼에도 무언가 이상하다.
커갈수록 TV 속 슈퍼스타들을 동경하게 된다.
“분명, 난 이곳이 편하고 안락한데…”
점점 이곳을 벗어나 TV의 사람들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커진다.
갑자기 하늘에서 검이 하나 내려와 꽂힌다. 뽑는다.
검이 나를 부른다. 결국 터진다.
나를 구속하던 사슬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지만 거칠게 베어버린다.
검을 치자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그들은 분명 부르고 있다.
사랑의 하모니를…
이제, 소년이 온다.
박시완(2학년), <소년이 온다>
시완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시의 내용을 따로 요약해 구분했다. ‘약 17년간 구속되어 살아온 소년이 엑스칼리버를 뽑음으로써 자신을 속박하던 사슬들을 베고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지하 미궁 351층은 저 아래 바닥에 고립된 소년의 상황을 돋보이게 한다. 17년, 현재의 나이를 바닥 아래 살았음을. 그런데 바닥이자 고립된 지하 미궁에서도 익숙하게 살아왔다 싶은 게 무슨 연유일까? TV 속 슈퍼스타를 동경하는 삶이어서 잊을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 그 동경을 통해 자유롭고 싶다는 욕망이 커진다는 설정도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다. 냉기만이 가득 찬 지하 공간은 스스로 갇혀 있고자 한 욕망 아닌 욕망마저도 검을 기다려 베어내어야 할 순간을 기다린 것일까? 소설 제목을 빌어 전혀 다른 시를 썼지만 크게 공감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판타지를 그리다 만 느낌이다. 그래도 17년이라는 시간 동안 스스로 갇혀 있던 공간을 설정하고 ‘검’이 아니고는 벨 수 없는 사슬과 욕망을 짜임새 있게 표현했다는 것만은 예사롭지 않다.
도시에는 야생동물이 없다.
뒤룩뒤룩 살찐 비둘기는
나무 열매를 따 먹지 않고
최상위 포식자가 위협해도
날 줄 모른다.
그런데, 길고양이는
간이 츄르에 절여졌는지
최상위 포식자 앞에서도
새끼를 치고
비둘기를 물어뜯는다.
츄르 아니면, 먹지도 않으면서.
뚱뚱한 비둘기에 구멍 뚫는다.
도시에는
이런 것들만 산다.
1
있잖아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여름의 이파리는
미치도록 뜨거운 햇님 아래
겨울나기를 하도록
두껍게, 익어갑니다.
그 햇님 하나뿐으로
한강도, 바다도,
위태로이 빛나다가
시월이 되면
그 눈빛을 바꿉니다.
2
가을의 이파리는
서늘해진 햇님을 대신하여 빛을 채우듯
보드라운 빛깔로 태웁니다.
꾼 고구마가 꺼멓게 그을리듯
노오랗게, 벌겋게,
또는 다방의 믹스커피처럼
제각기 다른 색으로
들큰하게 익었습니다.
가을의 햇님은
여름보다 차가운데,
어떻게 익었는지 늘 궁금합니다.
3
그러다 첫서리가 내리면
이파리들은 얼음이 무겁던지
가지를 놓고 바닥에 드러눕습니다.
모든 이파리가 떨어져
거리에 빛이 사라질 때면
드러누운 낙엽 위에
눈이 한 코 두 코 쌓입니다.
여전히
서늘하기만 한 햇님의
첫사랑은 눈이었나 봅니다.
그 눈빛이
뽀이얀 이불에 닿으면
눈이 따가우리만치 부셔와
나도 몰래 눈이 찌푸려지지만
미소가 지어지는 까닭은
눈과 햇님의 모양새가
간지러운 멜로영화처럼 보여서입니다.
아, 나도 오늘 집에 가면
뽀이얀 털실로
내 이불을 한 코, 두 코 짜서
덮어볼까 합니다.
4
눈이 녹아
햇님이 엉엉 울어
초록비가 한바탕 쏟아진 후에는
길이고, 산이고, 밭이고
어디든 빛이 넘쳐나는 걸요.
어린 새잎들은
햇님 아래서 보석처럼
투명히 빛나 사랑스럽고요
진달래나 벚꽃처럼
잔뜩 들떠있는 색시들도 많고요.
싱그럽게 내 콧등을 간질이는
달래야, 봄나물들 덕에
식탁도 따사롭습니다.
이렇듯 사계는
언제나 빛을 담은걸요.
이영채(2학년), <사계>
영채의 시는 더욱더 예사롭지 않은 내공을 보이고 있다. 10분 남짓 짧은 시간에 이렇게 구체적이면서도 서정어린 시를 쓸 수 있다니 놀랍다. 하긴 시골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무지개’를 구름의 눈물이라고 쓴 보기 시에도 보았듯이 처처에 고수가 있게 마련이지만.
영채의 시는 새와 고양이, 바다새, 길고양이를 ‘길’이라 하고, 갈매기와 독수리를 ‘사람’이라 설정하고 여는 시와 ‘사계’란 제목으로 시작한다. 도시와 사계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하면서 우리를 계절 속으로 끌어당긴다. 야생동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도시에는 살찐 비둘기(닭둘기라고도 비아냥하듯)와 최상위 포식자 길고양이가 있다. 그걸 염두에 두고 읽으면 사계가 확연히 다가온다. 처음에 설정한 ‘길’과 ‘사람’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지만 사계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진경을 보여주고 있다. 온통 해의 제국이라고 할 수 있는 사계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인데, 서시와도 같은 앞의 시에서 느낄 수 있는 비정함이 따스하면서도 서정적인 구술로 바뀌었다. ‘여름의 이파리는/미치도록 뜨거운 햇님 아래/겨울나기를 하도록/두껍게, 익어갑니다’는 대목을 보면, 그냥 왔다 가는 계절이 아님을, 오래 관찰하고 새긴 계절의 뜻이 담겨있다. ‘시월이 되면/그 눈빛을 바꿉니다’는 것 또한 예사롭지 않다. 잘 다듬은 성숙함이 묻어난다. ‘가을의 이파리는/서늘해진 햇님을 대신하여/빛을 채우듯/보드라운 빛깔로 태’우면서 곧 ‘들큰하게 익’는다는 것이나, 그 익음조차도 단풍 들고 곡식을 여물게 하는 ‘햇님’이란 긴한 말씀임을 알게 한다. ‘어디든 빛’이자 ‘보석’과 ‘멜로 영화’ 같은 환하고 따뜻한 시의 구성이 돋보인다.
눈바람이 부는 날
한숨과 함께 시들어버린 꽃의 꽃잎을 날려 보낸다.
눈이 수북히 쌓일 때쯤에 뜨거운 손으로 눈뭉치를 집어든다.
이 눈이 녹기 전에 최대한 빨리 땅바닥에 눈뭉치를 굴린다.
급하게 빨리 굴렸는지 검게 때가 타고 모래와 자갈이 묻어
더 이상 처음 모습이 보이지 않는 눈덩이 겉에 다른 새하얀 눈을
굴려 검은 모습이 보이지 않게 한다.
이 하얀 게 맞는지 모를 눈사람을 만들고 나서 꽁꽁 얼어 빨개진 나의 몸 말단 부분들.
또다시 찬바람과 함께 한숨을 날려 보낸다.
담배 한 개비를 물고 눈사람에게 눈을 돌린다.
너처럼 밝고 새하얀 사람이
속이 까만 자신을 숨기려,
자신의 자갈과 모래를 보이고 싶지 않아 간절하고 애처로운지 몰라
부서지고 녹아내리면 자신을 내보이며 울어버리는 눈사람
나는 네가 눈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다 타버린 담배를 끄고 거리 밖으로 나간다.
김단비(2학년), <겨울바람의 눈사람>
단비의 시도 그에 못지 않다. 담배는 모자이크 처리하면 되니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겨울바람이 부는 날 눈사람을 만든다는 설정부터가 재미있다. 뜨거운 손으로 눈뭉치를 굴려 눈사람을 만드는데, 어릴 적 눈사람을 만들던 때와는 아주 다르다. 눈덩이를 굴리면 굴릴수록 묻어나는 검은 흙이 ‘겨울바람’처럼 만만치 않은 현실의 때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것은 곧 드러난다. ‘너처럼 밝고 새하얀 사람’이 ‘속이 까만 자신을 숨기려’하는 것은 아닌지, 자갈과 모래가 묻어 누구도 눈사람이라고 불러주지 않을 것 같아 애처로이 우는 그것을 눈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화자는 곧 눈사람을 부수듯 거리 밖으로 나가고 만다. 더 이상 어린 날의 새하얀 상징이 아니게 되어버린 현실에서 눈사람은 서글픈 자화상일 수도 있다.
계절은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데
나는 같은 자리에 여전히 서 있다.
미련 없이 떨어지는 낙엽이 나보다 더 성숙해 보이고,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요즘
따뜻한 햇빛 내려줄 다음 봄이 조금은 보고 싶으나
나에게는 오늘보다 더 차가울 것만 같다.
서주은(2학년), <차가운 봄>
2학년이라 그런가? 1학년과는 달리 진중하면서 깊이가 있다. 주은의 시도 언덕 하나는 더 넘어온 듯 봄마저 차가울 것만 같다고 한다. 계절은 물과 같이 흐르지만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나. 낙엽마저 더 성숙하게 느껴지니 ‘나’는 한참이나 뒤처지고 무뎌진 존재인 것이다. 그렇게 봄이 온들 따뜻하겠느냐고 ‘차가운 봄’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봄은 어떻게 왔는지 봄의 시를 기대하게 한다. ‘미련 없이 떨어’져야만 봄이 오는 것임을 낙엽이 먼저 보여주고 있으니, 따뜻한 햇빛 내려줄 봄을 자책 없이 맞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점에서 권세의 시는 주은에게 내미는 따뜻한 발견의 시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 잡아주길 기다리며
차갑게 있던 나의 손.
누군가 자기 입김을 불어
따뜻했지만.
가슴속에 있던 공기가 없어진 뒤로는
다시 식었다.
따스함이 그리워
이것 저것 만져보다 상처도 났다.
어느날 뒷짐을 지다 찾았다.
내 손의 짝은 다른 내 손인 것을.
정권세(2학년), <손>
어느날 뒷짐 지다 만져진 자신의 다른 ‘손’. 그것은 따뜻한 손이었음을. 먼저 내밀지 못한, 나에게도 따뜻한 마음과 이야기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왼손이 오른손을 만져주는 일처럼 자신 안에 해결책이 있었음을. 누군가 잡아주기 전에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어 보면 쉽게 식지 않는 가슴이 있음을 깨닫게 되리라는 믿음이 또 다른 ‘봄’이지 않을까.
아가미를 갖고 싶었던 너는 바다로 향했다.
네 숨은 포말과 뒤섞였다.
폐로 엄습해 오는 물을 느끼며 숨을 쉬었다.
쉬었을 것이다.
눈을 뜨고 너의 하늘을 느꼈다.
날고 있었다.
틀림없이 자유로웠다.
깊은 곳으로 날아간다.
날아다닌다.
여러 절망의 잔존들이 추락한다.
서은새(2학년), <꿈>
은새의 ‘꿈’ 또한 낮고 진중한 울림을 준다. 이것은 물고기가 되어 바다라는 한계를 넘어 싶었던 자신이리라. ‘폐로 엄습해 오는 물’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틀림없는 ‘자유’란 말에 친구들도 공감하는 걸 보면 관념만은 아니다. 자유로이 날 수 있게 될 때 절망의 잔존들마저 떨어낼 수 있음을, 그것이 ‘꿈’만이 아니길 바란다. 그러니 다음에 오는 시도 공동 창작이라도 한 것 같다. 서로에게 위안을 주며 말하는 듯하다.
내 친구들은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낸다.
모두 목표가 있고 꿈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난,
괜찮아,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괜찮아,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
괜찮아.
김사랑(2학년), <괜찮아>
지금은 이 말이 가장 필요한지도 모른다. “괜찮아, 잘 하고 있어.”, “나도 두렵고 불안한 게 사실이야.” “조급해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야.” 하고 말해주어야, 아니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목표가 있고 꿈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목표와 꿈을 안겨준 어른들과 교사들도 충분히 알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의 시는 교과서에서는 만날 수 없는 친구들의 목소리이자 반가운 소리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들리는 반가운 소리
총총총
도어락을 두드리기도 전에
들리는 반가운 소리
왈왈왈
저녁에 침대에 눕자
들리는 반가운 소리
드르렁 쿨쿨…
유지희(2학년), <반가운 소리>
지희의 시처럼 반가운 소리를 온몸으로 맞으며 불면 없는 잠을 잘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단순하게 배고프면 먹고 싶다 하고, 문을 두드리기 전에 설레는 소리와 숙면으로 청춘의 계절이 흘러가는 것이면 좋겠다.
오후 네 시에 시작하여 모두의 시를 읽어주고 나니 저녁이다. 국어 선생님들과 학교 앞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같은 식당에서 나온 어느 학부형일지 모를 아저씨 말이 압권이다.
“야, 달이 떴네. 교과서에서는 본 적이 없는 달이네.”
한눈에 보기에도 사무치게 밝은 상현달이었는데, 방금 전에 교과서에서는 만나지 못할 심석고 친구들의 살아 있는 시를 영접하고 나왔는데, 아저씨의 그 말이 또 사무쳐서 시 한 편 썼다.
남양주하고도 화도읍 마석에 있는 심석고등학교에 와 시 이야기하고 시 한 편씩 썼는데
교과서에서는 본 적이 없는 시들이 쏟아져
선생님도 놀라고 아이들도 놀랐다.
근사하고 잘 쓴 시가 아니라 저마다 마음에 눌러둔 시가 나와
다 읽어주고 한 마디씩 덧붙여 칭찬과 박수를 쳐주고 나오니 저녁이다.
심석고 국어 선생님들과 늦은 저녁을 먹고 나오니
상현달까지 떴는데
식당에서 먼저 나온 취객이 하늘 보며 하는 말
아, 달도 오랜만에 보네
교과서에선 본 적 없는 달일세
교과서에는 없는 달이야
남양주는
양주의 남쪽이 아니란다.
남양주는 정확히 신도시와 밭, 산으로 나뉘는 곳
마석에는 교과서에 없는 시와 달이 뜨는 곳
그러니 모두가 시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아, 교과서에서는 배운 작 없고
일면식도 없는 달이 있었다니
모쪼록 아이들이 시를 계속계속 썼으면 좋겠다는 말을 끝으로 남양주를 떠나는 마음도
교교서에 없는 밤하늘 높이 도드샤
밝게 밝게 내려왔더랬다.
이종수, <교과서에는 없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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