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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가족사를 다룬 그레이스 M 조의 <전쟁 같은 맛>

새책 소식

by 참도깨비 2024. 3. 21.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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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스 M 조는 주한미군인 미국인 아버지와 기치촌 여성이었던 어머니 '군자'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다. 그런 작가가 어머니 '군자'의 삶을 필두로 하여 쓴 회고록이다. '군자'는 딸이자 작가인 조를 통해  1941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고 미8군을 위한 기지촌에서 살다 이민하여 2008년 갑작스레 찾아온 물리적 죽음 이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군자'는 한국인이자 여성, 디아스포라이자 유령으로도 불렸던 삶을 살았다. 저자는 이 책의 쓰게 된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진실되고 근면했던, 사랑과 고독으로 가득 차 있었던 어머니의 삶을 그려내보고자 했다. ‘타락한 여자’라는 꼬리표에도 불구하고 명예로운 삶을 살았고, ‘정신병자’라는 꼬리표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이었던 어머니의 존재를 말이다.”(10)                                                                                                                                                                                                                    '군자'의 가족은 한국전쟁으로 해체되다시피 한다. 살아남기 위해 기지촌에서 일하다가 상선 선원이던 미국인과 결혼하여 이민을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는 삶을 말로 다하지 못할 만큼 처참했다. 


***2021년 전미도서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작***
***『타임TIME』, NPR 2021년 ‘올해의 책’***


1986년. 열다섯 살 되던 해, 그레이스는 세상 가장 중요한 이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과정을 목도한다. 그 사람은 ‘군자’, 1941년 한국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고 기지촌에서 일하다 미국으로 이주해 험하고 치열한 삶을 살아낸 생존자이자, 이 책의 저자 그레이스 M. 조를 낳고 기른 여성이다.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야성미와 카리스마가 넘쳤던 군자, 동포를 보살피고 마을을 먹여 살렸던 그는 어느 날 ‘목소리’를 듣기 시작하더니 세상에 문을 닫고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소파에 틀어박혀버렸다. 모든 것을 바꿔버린 군자의 사회적 죽음은 조현병이란 이름으로 찾아왔다. 트라우마를 안고 명문대에 입학해 자유와 지성의 세계에서 학자가 된 그레이스는 ‘군자’로 대표되는 전후 한인 이주여성의 기구한 삶의 궤적과 지독한 병의 뿌리를 연구했다. 그리고 2008년 갑작스레 찾아온 모친의 물리적 죽음 이후, 다시 그 생애를 새롭게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스야, 나 기억나지?’ 군자는 오래전에 잃어버린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고, 거기에 귀를 기울이자 스스로 침묵을 깨고 이야기가 된 한 생애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민 1세대라 할 수 있었던 당시
한국인이 한 명도 없던 워싱턴주 셔헤일리스에 정착한 후에 블루베리를 따고 파이를 굽고 버섯을 채집하고 잡채를 만들며  밤에는 소년원에서 일하고 낮에는 숲과 바다에서 먹을 것을 구해다 팔며 가모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사람이다. 그곳의 삶은 차마 번역할 수 없는 고통스런 나날이었지만 군자는 생활력이 강했고 가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삶이라도 살아야 했다. 끝내 조현병까지 걸렸다. 이에 딸이자 저자는 어머니를 다시 조명하고 그 삶을 문장을 옮기는 일에 매진한다. 억척스럽게 산 삶에 비해 사회가 비정하게 내쳐버린 것이었기에 기록이자 치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전쟁 같은 맛Tastes Like War』이다.  전쟁에서 생존한 한국계 미국인 가족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이자, ‘전쟁 신부’ ‘성매매’ ‘조현병’이라는 낙인 속에 살다 간 모친에 대한 회고록인 셈이자 군자에 대한 평전이다. 역설적이게도 '전쟁 같은 맛'은 군자가 조현병에 걸린 뒤 분유를 두고 한 말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시절에 미군 보급품으로 먹었던, 복통과 설사를 가져왔던 그 맛이 군자의 삶을 대표하는 말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어떤 여성들은 한국 음식을 구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엌에 숨겨놓고 몰래 먹었다. 비밀 장소에 한국 식재료를 감춰놓고 냄새난다고 타박할 사람이 주변에 없을 때만 요리한 것이다.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여성들은 집에서 한국 음식을 먹는 것이 금지돼 먹지 못하는 여성들을 자기 집으로 불러 몰래 식사 모임을 했다. 이 여성들은 미국 가정에서 소외감을 느꼈고 자기 집을 보금자리로 여길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 심한 향수병에 시달렸다. 그래서 이토록 폭력적인 방식으로 동화되기를 요구받고 집이 없다고 느끼는 여성들의 삶을 되살리기 위해 공동체가 생겨났다. (…) 한국 음식을 마침내 맛보는 경험은 마치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가 처음으로 물 한 모금을 마시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천천히 다가오던 죽음을 가까스로 피하는 일이었다. 이 여성들 중 누군가는 잠시나마 그 맛으로 집에 돌아가는 길을 찾았다.”(154-155)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 같은 맛'을 넘어 군자를 다시 소생시킨 음식의 이야기도 있다.  담백하고 뭉근한 콩국수, 시원 칼칼한 생태찌개, 고소하고 감칠맛 나는 미역국, 무와 고기만으로도 깊은 맛이 났던 쇠고기국, 나물무침과 생선조림, 전과 떡. 길에서 산에서 뜯어다 말린 고사리, 민들레. 한인 마트에 가면 있던 미숫가루와 기차를 타고 가다 차창 밖으로 본 쑥, 기지촌에서 처음 맛보았을 ‘치즈버거’까지. 저자와 소통하게 되고 치유의 기록을 낳게 한 맛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뜻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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